가룟 유다의 뉘우침과 참된 회개

성경의 많은 인물 중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만큼 이해 안 되고 모순처럼 느껴진 인물도 없는 거 같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는 생각 안 했대도,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수년간 이적들을 봐 왔고, 그런 권능을 위임받아 행한 적도 있으면서, 고작 은 30에 주님을 팔아넘겼다는 것. 그리고, 정말 돈이 목적이었다면 왜 성소 안에 던지고 자살한 건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저항할 것이고, 그러면 자연히 독립 투쟁으로 이어져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는 견해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생각처럼 안 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이어지자 자살했다고 들었을 때, 그동안의 의문이 풀리고 성경에 흩어져 있는 여러 구절이 생각 가운데 모이며 깨달아졌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의가 강한 자기 눈에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자기들의 눈에는 정결하나 더러움에 씻기지 않은 세대(잠 30:12)’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자기 눈에는 자기의 길이 옳으나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달아보신다(잠 21:2)’란 일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의로운 자가 그의 의로움에서 돌이켜 불법을 행하며 악인의 행함을 따라 모든 가증스러운 일들을 한다면 그가 살리요? 그가 행했던 모든 의로운 일들은 기억 (거론)되지 않을 것이고 그는 자신의 불법 안에서, 자신의 죄 가운데 죽으리라(겔 18:24)”고 말씀하십니다. 이 한 구절에 유다의 삶과 죽음이 요약된 게 놀랍기만 합니다. 유다는 자기 눈에 의로운 사람이었고 실제로 의로웠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불법을 행하며 악인의 행함을 따랐기에 그의 의로운 이전 행실은 기억(거론)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죽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 당시 대부분 사람처럼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한 모세 같은 지도자, 엘리야 같은 선지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그런 사람이 나타났으니 예전 사사들처럼 억압받는 이스라엘을 구출해내고 이스라엘을 제사장 왕국, 모든 민족의 우두머리로 일으켜줄 걸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 거사를 위해 예수님을 쫓았을 것이고 또 그런 열심 탓에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뽑힌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그가 돈주머니 즉, 재정을 담당했다고 나오니 그의 힘과 입지가 절대 하찮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4-6).” 이 구절만 읽으면 가룟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핑계 삼아 유흥비에 쓴 거 같습니다. 하지만, 은 30냥을 돌려준 것도 모자라 자살까지 한 성격인 걸 보면 그랬다기보다는 맡은 돈의 용도를 임의대로 결정해 썼던 것 같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혹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임의대로 인심을 썼기에 인기도 많고 칭찬받으며 존중받았을 것입니다. 물론 가끔 사적인 용도로도 썼을 수 있지만, 공을 위한 것이지 결코 사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 여럿이 기부한 돈을 맘대로 자기 눈에 옳은 데 쓴 그를 간단히 ‘도둑’으로 정의합니다.

그렇게 의로움에 불타있던 가룟 유다는 재판관이 되어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며 친구가 되어줄 땐 잘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동자의 일 년 치 월급인 향유를 어떤 정신 나간 여자들이 쏟아부어도 말리기는커녕 당연한 듯이 받을 땐 분노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막 14:4).” 더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몰려들고 드디어 군중의 힘을 빌려 거사를 이루는가 하면 피해 가거나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는 주님께 좌절과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자 하나님 노릇 하며 스스로 의롭기만 한 성향은 마귀에겐 좋은 먹잇감이며 ‘분 냄’은 마귀에게 틈을 줄 뿐입니다(엡 4:26-27). 사단은 그런 그의 성향을 부추기고 결국 그가 주님을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에게로 들어갑니다(눅 22:3).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마음은 곧 사단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구약에서 의로운 욥을 시험해 보자고 하나님께 제안했었고 신약에서는 주님을 광야에서 40일간 시험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마귀의 마음을 쫓아 하나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이스라엘은 40년간 죄 가운데 헤매다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40의 의미는 ‘이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주님은 유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전혀 저항하지 않으셨고 붙잡히신 후 빌라도에게 넘겨지십니다. 그 모습을 본 유다는 뒤늦게 ‘회개’하고 은 30냥을 성소에 던지고 자살합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7:1-5).” 여기서 ‘스스로 뉘우쳐‘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 킹제임스엔 ‘회개:repent’로 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회개를 한 걸까요? 그리고 회개하고 자살을 했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까요.

회개란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 중심이라면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되는 것이고 자기가 중심이 된다면 아닙니다. 똑같은 후회, 똑같은 돌이킴이라고 다 회개가 아닙니다. 담배를 끊어도 내 건강을 위해 끊었다면 그냥 건강을 생각해서 끊은 거고 자기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믿고 ‘너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에 찔림이 있어 담배를 끊거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올무가 될까 봐 끊었다면 목숨 뿐만 아닌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하십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같을지라도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옷을 찟고 돌아오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결국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란 예언의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씀에 비친 자신의 한없이 부끄러운 모습에, 그 말씀이 성취됐다는 기막힌 사실에 괴로워하며 통곡했습니다. 그토록 자신했건만 결국 주님이 옳았고 자신은 틀렸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똑같이 실족했지만, 베드로는 살고 가룟 유다는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베도로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어야 했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 26:2)”. 그 당시 상황에서 예수님이 로마법 최고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질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습니다. 일단 사형에 처할만큼 잘못한 것이 없었고 유대 종교법에 회부돼 돌에 맞아 죽는다면 모를까 로마정부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팔리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유다는 그 말씀에 비친 자신의 부끄러운 행실에, 그 말씀을 성취한 것이 자신이란 사실에 마음을 찢고 괴로워해야 했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이 옳았고 어디 두고 보자 했던 자신이 틀렸음을 절실히 통감했어야 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하나님은 악행을 일삼던 아합왕조차도 심판의 말씀에 옷을 찢고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며 풀 죽어 다니자 심판을 지연해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아합이 뒤늦게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겼던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심판의 말씀이 이를 것을 믿었기에 풀이 죽었고 두려워하며 근심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회개를 받으십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자기처럼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된 것을 참지 못하고 자살합니다.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 27:4-5).” 여기서도 그의 주어는 ‘내가’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조차도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이 선량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는 끝까지 의롭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회개, 즉 하나님이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거짓 회개입니다. 그는 한 번도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했던 적도 없고 주님으로 부른 적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유다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판단 착오로 목숨을 잃은 가여운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가룟 유다는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는 세상 근심 가운데 사망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살하는 가룟 유다를 처음부터 마귀였다고(요 6:70) 하시고, 성경은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갔다(행 1:25)고 합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 하나는 마귀니라(요6:70).” 예수님은 죄인이면서도 의인 행세 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바알세붑과 엮어서 모함하는 바리새인들에게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들의 아비는 마귀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로 옮겨지기 전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엡 2:3) 어둠이며(엡 5:8) 죄의 종이었습니다(롬 6:17). 마귀가 몸 안에 들어간 가룟 유다가 돌이키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을 것을 예수님은 아셨기에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의 배신과 죽음, 그리고 그 죽음 이후의 일까지 성경에 이미 예언됐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고 받은 은 30냥을 성소에 던지고 죽자, 대제사장들은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다음 두 구절에 간결하게 요약돼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슥 11:12-13)”.

말씀이신 예수님을 몰랐던 가룟 유다는 자신이 말씀을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다란 인물은 이름처럼 예전의 유다(유대)와 그 당시의 유다(즉 유대인)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입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했던 유다 왕국도 여러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한 심판과 회개의 말씀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은 하나님의 심판이니 저항하지말고 따르면 오히려 살 것이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킬 것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습니다. 그 거짓말을 믿고 바벨론에 항쟁하다가 결국 완전히 멸망당하고 맙니다. 가룟 유다는 또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으면서 자기 의와 잣대로 예수님을 거부한 채 죄 가운데 죽는가를 가장 잘 드러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이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셨었습니다. 이로써 다시 한번 말씀의 놀라움과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 내가 주인이 되는 것, 하나님을 불신하고 또 시험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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