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단순하면서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오죽하면 복음이 전파된 지 얼마 안 된 바울의 때부터 이미 복음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마무리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성경을 여러 번 정독하며 읽는 가운데 성령이 조명해주신 것은 율법이 우리가 지켜야 할 법이라면, 복음은 그 법을 행한 분에게 묻어가는 것입니다. 율법이 what이면 복음은 who입니다. 율법이 걷는 놈, 뛰는 놈, 나는 놈을 뜻한다면, 복음은 그 유명한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누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들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는데 식량이 모두 홍수에 쓸려 내려가 굶어 죽게 생긴 겁니다. 그러다 아주 먼 곳에 식량이 있다는 소문을 참새에게 들었지만 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걸어서, 뛰어서 가기엔 가다가 굶어 죽을 판이니 날아서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모으게 됐고 서로 날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솔개가 나타났습니다. 모두 무서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땅속으로 숨었는데, 그 솔개가 하는 말이 저 위에서 너희들 하는 말 다 들었으니 내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내 등에 올라타면 양식 있는 곳으로 날아가 음식을 가져오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당연히 그런 솔개의 말을 믿을 들쥐는 없습니다. 잡아먹으려는 속셈으로 생각해서 꼼짝하지 않는데, 한 들쥐가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건데 싶어서 한번 믿어보자고 결심합니다. 그렇게 용기를 낸 들쥐 한 마리가 솔개를 올라타고 솔개는 모든 들쥐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솟구칩니다. 그렇게 되자 펼쳐진 풍경은 이렇습니다. 그 솔개 위에 탄 들쥐는 너무 놀라 자지러지며 비명을 지릅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며 솔개의 깃털을 혼신을 다해 움켜쥡니다. 그 들쥐의 절규에 땅에 있던 들쥐들은 혼비백산해서 서둘러 흩어져 땅굴 더 깊이 숨어듭니다.
안타깝게도 이 믿음으로 올라탄 들쥐의 모습이 바로 주님을 믿은 우리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들쥐는 분명 믿음 하나로 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지만, 그 참된 능력은 알지 못합니다. 왜냐면 솔개에게 올라탈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솔개 허락이 있었기 때문이듯이 솔개 등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도 솔개 덕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솔개는 들쥐가 올라탈 때 밑으로 늘어진 들쥐의 꼬리를 발톱으로 잡고 날아올랐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들쥐는 땅으로 추락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참된 은혜와 놀라움이 있습니다. 붙어가는 놈은 사실 안간힘을 다해 붙어가려고 발버둥 칠 필요도 없었다는 겁니다. 솔개의 등에 올라탔던 들쥐는 다른 들쥐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다른 들쥐들처럼 혼자 날아보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게 있다면 마음을 바꿔 솔개를 믿어보기로 하고 초청에 응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 하나로 솔개 위에 올라타는 행위를 해놓고도 복음의 엄청난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솔개에게 붙잡힌 바 됐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10:28-2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7)’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자꾸만 잊는 우리는 들쥐처럼 혹시라도 땅에 곤두박질칠까 염려하며 두 눈 질끈 감고 온 힘 다해 거머쥐거나 정신없이 떨어지지 않을 방도를 구상하느라 분주하단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나는 들쥐의 모습은 땅에 있는 들쥐들의 삶과 그 모양과 질에서 큰 차이를 내지 못합니다. 만약에 들쥐가 자신의 꼬리는 솔개가 잡고 있기에 땅에 추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하늘을 나는 신기한 경험을 즐기고 세상을 내려다보며 그 감격과 은혜를 누릴 텐데 말입니다. 그런 여유롭고 행복한 모습으로 하늘 나는 것을 즐기며 솔개와 혼연일체 된 모습을 땅에 있는 들쥐들에게 보인다면… 아마도 땅에 있던 들쥐들은 솔개를 믿지 못했던 걸 후회할 것입니다. 그리고 솔개가 더 많은 쥐를 식량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며 다시 땅에 내려오기라도 한다면 서로 다투어 올라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구원을 얻고도 여전히 안절부절하고 공포에 질리고 염려에 눌려 육신의 행위로 분주한 우리 모습 때문에, 땅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복음의 기쁨과 자유를 잃은 우리들이 세상 가운데 비치는 모습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예로 율법과 복음을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언약이 율법이라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복음입니다. 둘 다 언약이지만 하나는 what if, 가정법으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해야 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뿐이고 하나님은 그 믿음 하나를 보시고 의롭다 여겨 주시고 반으로 찢긴 동물들 사이로 혼자 지나가십니다(창15). 원래는 찢어진 동물들 사이로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만일 계약을 이행 못 할 경우 이처럼 되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보여주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홀로 지나가신 것은 그 언약을 체결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이행하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다시 ‘나의 의로운 행실’로 생각돼서 부담되고 부족함 느끼지만, 그리스도인의 의는 하나님의 의 (롬1:17),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순되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도로 복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구주로 영접해서 내 의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너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요, 나를 영접해서 내 의가 너희의 의가 되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에 덧붙여 율법과 복음과 함께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믿음이냐 행위냐에 대해 부족하나마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겠습니다. 원시인이 불을 얻기 위해 부싯돌을 열심히 문지르며 불을 지피려 하는 게 율법 행위라면, 불을 선물로 받게 된 사람이 그 불이 약해지거나 부주의로 산불 내는 일이 없게 하려고 바람을 막아주고 (여기서 바람이란 불을 훼방하려고 다가오는 마귀와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대적하는 모든 육신의 소욕), 나뭇가지를 넣어주며(말씀을 먹고 기도로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 충만함을 얻을 수 있기에) 조심히 관리하는 모습이 믿음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행위인 건 맞지만 불을 지피기 위한 행위와 불을 잘 관리하기 위한 행위는 전혀 다릅니다. 한 행위는 땀을 흘리며 내가 주워온 돌과 돌을 부딪치고 내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으며 연기로 눈물을 흘리는 행위라면 불을 관리하는 행위는 하나님이 주신 불 주변에 적당한 바람막이를 세워주고 나뭇가지를 가져와 던져주는 행위입니다. 이 행위의 차이를 이해 못 하면 많은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복음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날이면 구원을 얻은 거 같고, 그렇지 않은 날이면 구원 얻은 게 맞는지 의심합니다. 남들에 대해서도, 누가 잘 행하면 믿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실족하거나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면 가짜였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다 참된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면 행위와 정죄 의식에서 벗어나고 남이든 나든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으로 어떤 행위조차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관망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마귀가 원하는 바입니다. 첫째 경우가 참된 복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거였다면 둘째 경우는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입니다. 이럴 땐 행위의 주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선한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의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내 몸을 내어드리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아파서 음식을 해준 건 내가 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어떤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에 대한 마음을 주셔서 음식을 해줬다면 그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요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이 음식을 만들어 준 것이지만 주어가 바뀌었기에 하나는 자기 행위가 되고 하나는 믿음의 행위가 됩니다.
이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아니라 성경에 적혀있는 말씀이기에 행하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기에 하기 싫어도 하고, 또는 하고 싶지만 하지 않을 때, 성령의 열매는 자연히 맺혀지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야말로 주님을 영접함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맺게 되는, 말 그대로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맺으려고 노력한다고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닐뿐더러 육신은 도리어 성령이 맺으시려는 열매를 훼방만 합니다. 그렇기에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자기 부인하며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행위를 하면 성령은 자연히 충만해질 것이고 나를 통해서 일 하실 수 있게 되어 성령의 열매는 맺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