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위선과 예수님의 저주

성경을 읽다 보면 놀라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 전율이 오거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한동안 멍한 느낌 또는, ‘아 이런 구절이 있었네!’ 싶어 눈을 의심하는 느낌.

오늘은 ‘아, 이런 구절이 있었구나!’ 싶었던 내용을 나누려고 합니다. 몇 년 전 마태복음 24장을 읽을 때 그 장의 끝부분에 주인 오심이 더디다고 생각해 먹고 취하도록 마시며 동료 종들을 때린 자들은 알지 못하는 때에 주인이 올 것이며, 그때 주인은 그를 잘라내어 위선자와 함께 받을 몫을 주어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마 24:48-51) 적혀 있었습니다. ‘위선자와 함께’라는 단어에, ‘아 그렇구나!’ 싶어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술 취해 동료를 폭행할 만큼 만행을 일삼은 자들과 위선자가 함께 쓰였다는 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내용만 보면 경건함과는 아무 상관 없는 포악한 건달 무뢰배 같았을 것 같은데 위선자와 함께 몫을 받는다니… 그건 속은 그럴지언정 겉은 경건하고 신실해 보이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주님이 비유하신 양의 탈을 쓴 이리들처럼,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땅을 팔아 교회에 헌금하는 바나바의 모습에, 자기들은 그보다 더 헌신적인 모습으로 인정받고 추앙받겠다는 속셈으로 밭의 일부분을 감춘 채 전부를 드렸다고 성령께 거짓말하다 죽습니다. 판 밭의 일정 부분만 드려도 잘한 일인데, 부풀려서 인정받고 영향력 행사하고 싶어 하는 ‘위선과 악독의 누룩 된’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돌아보고 또 교회를 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결같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인, 제사장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셨는데, 얼마 전 의문이 풀어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마태복음 21장과 마가복음 11장 두 군데 나오는데 마가복음엔 중요한 정보 하나가 더해져 있습니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막 11:12-14)”.

바로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시험에 들게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하니 열매가 없는 건 당연한 건데 열매가 없다고 저주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납득이 안 가고 횡포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며 늘 느끼는 것은 이처럼 모순 같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오히려 놀라운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성경은 이런 모순되고 이해할 수 없거나 소화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순화시키고 읽기 무난해서 마치 이해된 것처럼 느끼게 고쳐놓았기 때문에 도리어 성령의 조명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일단 무화과나무의 생태를 알아야 하는데,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먼저 맺히고 그 후에 잎이 나오는 나무입니다. 그렇기에 잎이 있었다는 것은 열매를 맺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는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은 양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열매를 찾아보니 당연히 때가 아니었기에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했습니다. 무화과는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여기에 관련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발견하신 이 잎만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나무였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무는 또한 사람들에 비유되어 여러 곳에 쓰입니다. 구약에 왕과 지도자들이 나무들에 비유되기도 하고 신약에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어떻게 찍혀 불에 던지우는지 예를 들어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열매 맺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열매 맺을 수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모세의 율법을 잘 준수하는 의로운 사람들인 양 행세하며 율법을 빌미로 백성들을 통제하고 군림했습니다. 열매는 인자가 오신 때에나 선물로 맺을 수 있는 건데도 그들은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있는 양 무성한 잎으로 가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위선과 거짓된 교만을 드러내시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나무는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이런 깨달음을 나눴더니 한 분이 재밌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은 그렇다 쳐도 자유의지가 없는 나무인데도 말씀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처럼 때를 어기고 생리현상을 어기며 잎부터 나는 게 가능한 것일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받습니다. 그래서 그전에는 없던 엉겅퀴며 가시를 내게 되고 ‘barren’ 즉, 불임과 같은 단어인 황폐한 땅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범죄로 저주를 받은 땅에서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마가복음 16장 15절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창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흠정역에 창조물로 번역된 단어는 예전 성경엔 ‘피조물’로도 번역되어 있지만 요즘 번역(개역개정, 개역한글)은 ‘만민’으로 바꿨습니다.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은 사람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해서 ‘만민’으로 바꾼 모양인데, 성경은 분명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16-22 (개역개정))”고 하십니다. 한군데를 고쳤다고 다른 곳에 나타난 진리가 가려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과 함께 저주받았던 모든 창조물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말미암아 선포된 복음을 듣게 됐고 그 약속의 말씀이 이뤄지기를 신음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창조물들이 재림 때 어떻게 회복되는가는 여러 예언서에 이미 생생히 기록돼 있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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