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자녀들로 인해 의롭다/옳다 함을 얻는다‘는 글 중에서 누가복음 7:35 “그러나 지혜는 그녀의 모든 자녀들로 인해 의롭다 함을(옳다 함을) 얻느리라”란 이 난해한 구절을 쉽게 풀이하셨네요. 잠언에서는 지혜가 여성으로 의인화되어 등장할때도 있습니다(1~9장) 그리고 새번역에서는 ‘그러나 지혜의 자녀들이 결국 지혜가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하신대로 지혜는 성령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 때문에 이 구절을 성령으로 인한 영적 출생으로 얻어지는 영생의 자녀들로 보면 “영생의 자녀들이 결국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코멘트를 접한 제 마음은 소통이 된 것 같아 기쁘면서도 무거웠습니다. 왜냐면 성령에 대해 알게 된 것들을 나눠야 할 것 같은 영적 부담이 있는데, 그것이 불필요하고 원치 않는 논란과 시비를 가져올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성경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적는 것까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성경엔 지혜가 여인화 됐듯이 하나님을 어머니나 여인으로 묘사한 구절이 가끔 등장합니다. 그중 몇 구절만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하나님은 아이를 달래는 엄마로 묘사되고(사 66:13), 젖먹이 아기를 잊지 못하는 어머니(사 49:15), 산통을 겪는 여인(사 42:14), 그리고 주인과 여주인으로(시 131:2) 함께 묘사되기도 합니다. 또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엔 날개 아래 새끼를 모으는 암탉으로(마 23:37; 눅 13:34), 그리고 누가복음엔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으로 비유됩니다(눅 15:8-10).

그러나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는 프랑스어나 독일어처럼 명사에 성별이 붙습니다. 히브리어로 성령 (Spirit) 즉, ‘Ruach’는 여성 명사이며 아람어로도 Spirit, ‘rucha’는 여성 명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shekhinah 쉐키나’와 지혜인 ‘chokmah 코크마’ 또한 여성 명사입니다. 어떤 명사에 성별이 붙었다고 구절의 주체가 항상 명사의 성별과 일치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동사 같은 경우는 다릅니다. 히브리어는 스페인어와 마찬가지로 동사로 그 행동의 주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됩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사사에게 임하는 주의 영(여호와의 영)은 일단 ‘주의 영’ 자체가 여성 명사이지만 임했다는 ‘came upon’이 히브리 동사로 3인칭 여성 동사입니다. 한 두 군데가 아닌 전체 사사기에 모두 그렇게 쓰였고 창세기 1:2절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다’ 또한 여성 명사에 여성 동사입니다. 이런 영향 탓인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남성성과 성령 하나님, 즉 하나님의 영의 여성성을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메시아닉 유대교와 동방 정교도 및 소수 교파에서는 성령을 3인칭 대명사로 ‘she’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약이 헬라어나 라틴어로 쓰이고 번역되면서 영을 뜻하는 헬라어 pneuma(뉴마)는 중성이기에 ‘it’으로 번역했고 라틴어로는 남성이기에 ‘he’로 번역하게 됐습니다. 초대 교회에선 성령의 여성성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던 진리였지만, 6세기부터는 성령을 ‘he’로 정의하고 더는 ‘she’라고 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렇게 원어의 명사나 동사로 자연스레 드러나던 성령의 gender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잃게 된 후에도 성경 곳곳에 그 흔적이 남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나 지혜를 he 혹은 it으로 번역한 영어 성경에조차도 ‘지혜는 그녀의 (her) 아이들로 인해…(눅 7:35)’란 구절같이 미처 가공 안 된 원석의 모퉁이처럼 불쑥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을 여성으로 볼 것이냐 남성으로 볼 것이냐 그도 아니면 중성으로 볼 것이냐가 이 글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냥 사실을 적은 것뿐이고 이 부분은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믿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성령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려고 오신 게 아니라 우리 안에 내주하사 오직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말씀을 깨달아 알게 하시려고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번역된 성경에서조차 하나님이 여성으로 표현된 부분이 나올 때는 반드시 성령 하나님을 뜻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말을 듣고 침례 요한의 침례를 받은 세리들과 백성들은 “하나님”이 옳다/의롭다 하였으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조언/계획(counsel:킹제임스)을 거절하더라(눅 7:29-30)’란 구절과 ‘그러나 지혜는 그녀의 자녀들로 인해 옳다/의롭다 함을 얻으리라(눅 7:35)’는 연결되는 구절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 특별히 성자와 성령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란 히브리어 Elohim(엘로힘)은 복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렇기에 율법이 아닌 성령의 법에 의한 영적 출산으로 성령의 법이 옳았음(의로웠음)을 알게 될 것이고 또한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의로웠음을 알게 될 거란 뜻으로 묵상 가운데 깨달았었습니다. 잠언 1장 8절에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란 구절도 일반적인 교훈과 적용 외에도 성자 성부 성령을 나타내는 구절로 조명됐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명제로 글을 올리고 코멘트를 받는 중에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안고 묵상하며 씨름했던 물과 피와 성령에 대한 부분이 깨달아졌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나는 물로 침례를 주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주실 것이다, 물로만이 아닌 물과 피로 오셨다. 그뿐만 아니라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 6동이를 붉은 포도주로 바꾸셨고 십자가 선상에서 옆구리로 물과 피를 쏟으신 걸로 인해 대충 그 뜻을 알 것 같았지만(특히 피와 포도주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질 새 언약이고 성령은 부어주실 주의 영이기에), 물의 의미는 알 것 같다가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특히 ‘물로만이 아니요 물과 피로 오셨다(요일 5:6)’라는 구절과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라는 구절이 단순히 침례로 이해하기엔 뭔가 부족한 거 같고 그렇다고 육적인 탄생과 영적인 탄생으로 이해하기에도 뭔가 석연치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외침을 믿고 회개의 물 침례를 받은 사람들(눅 7:29-30)과 35절의 성령으로 낳게 되는 아이들에 대한 부분을 같이 놓고 보니 의문이 풀렸습니다. 즉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예수님이 오셨던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위한 조언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왕국)에 들어가고 싶다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셨음을 믿고 침례 요한의 회개의 물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후 (십자가 보혈 사건이 성취된 이후) 성령으로 침례 받아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가 밤에 몰래 찾아와서 조언을 구하는 장면인데, 예수님은 대화 가운데 ‘나’란 일인칭을 쓰다가 “내가 너에게 말하건데 ‘우리’는 ‘우리’가 알고 ‘우리’가 본 것을 증거하거니와 너희들이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요 3:11)’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더구나 니고데모에게도 ‘너’란 이인칭으로 말씀하시다가 ‘거절했다’고 할 때는 ‘너희’라는 복수를 쓰심으로 니고데모 개인보단 그가 속한 바리새인 및 율법 학자 그룹을 지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요한복음 3장 기록은 누가복음 7장에 삽입되는 기록이기도 하며 다시 한번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1서에 적힌 물로만이 아닌 물과 피로 오셨다는 구절도 침례 요한의 물 침례와 성령으로 침례 주시게 되는 중간과정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구약의 마무리가 되는 침례 요한의 침례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피로 새 언약을 맺어주심으로 성령을 보내주시게 됐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성령이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강림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주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은 이 순서가 바뀝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고넬료 사건만 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은 예언의 성취이며 죄 사함을 위함이고 다시 오실 거라는 약속의 말씀(행 10:34-43)’까지 베드로에게서 들었을 때, 그 증거된 바를 마음 가운데 믿은 모든 무리 위에 성령이 강림합니다. 그걸 보고 놀란 베드로는 47절에 어떤 자가 이들의 물 침례 받는 걸 막겠냐며 침례를 줍니다. 9장에서도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메시야가 오셨었고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는 빌립의 증언을 믿은 에티오피아 내시가 ‘내가 믿으니 침례 받는 것에 걸릴 것이 있느냐’고 물으며 침례를 받습니다.

여기까지 깨달아지자 ‘3가지의 덧붙임‘에 썼던 것과는 또 다른 깨달음이 왔습니다. 다른 나무들은 잎이 나고 꽃이 난 자리에 열매가 맺어지지만,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나면서 잎이 납니다(이 부분은 ‘무화과 나무의 위선과 예수님의 저주‘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속죄의 보혈을 흘리신 후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는 그 약속을 믿고 회개의 침례(잎)를 받은 후에 성령의 침례(열매)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신 이후에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의 혈통이 아닌 영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 그 사실을 믿는 것으로 성령 침례(열매)를 받고 그 후 신앙 고백으로 물 침례(잎)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