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청년에 대한 말씀은 제게 특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새롭게 알게 해주시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1년 전 쯤, 부자청년에 대해 읽는데 그동안 십계명을 지켰냐고 물으신 거로 생각했던 부분이, 그게 아니라 1부터 4계명은 빼고 5번째 계명부터 지켰느냐고 물어보신다는 사실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었습니다. 그러면서 ‘청년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닌 맘몬이었던 거구나’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그걸 아시는 예수님은 일부러 하나님에 대한 계명은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이웃에 대한 계명만을 물어보셨고 청년은 당당히 이 모든 걸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인이 맘몬인 줄도 모르고 자기 의로 계명의 행위들을 지켜왔던 청년에게 예수님은 그럼 네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즉 주인 삼은 맘몬을 깨끗이 청산하고 계명의 1부터 4가 되는 참된 하나님을 따를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그 당시 성경공부 그룹에서 나누자 어떤 분은 그 뒷부분에 나오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모든 걸 할 수 있느니라’는 부분에 대해 나눴습니다. 예수님께서 ‘with men this is impossible, but with God all things are possible (마19:26)’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의 ‘with’를 ‘함께’로 번역하면 ‘사람들과 함께라면 불가능하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로 풀 수 있지 않겠냐는 거였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싶어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다 어제 교회에서 부자청년 설교를 듣게 됐는데, 마태복음에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후 삭게오에 대해 나오는 이유는 맘몬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떠난 부자청년과 예수님을 참된 주님으로 만난 삭게오를 비교하기 위한 장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산의 반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는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율법대로 이웃에게 행하며 살았다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부자청년은 ‘구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겠냐’는 고귀한 질문을 갖고 예수님 앞에까지 나오고서도 그냥 돌아갑니다. 이처럼 먼저 하나님과 바로 된 관계가 맺어져야지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맺어질 수 있다는 걸 들으며 다시 26절의 의미가 상기됐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했지만 구원은 얻지 못했던 부자 청년과 하나님과 함께했기에 구원을 얻은 삭게오가 이렇게 비교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한편 같은 26절에 대해 다르지만 역시 타당한 해석을 얼마 전에도 듣게 됐습니다. 그분 말씀이 최근 하나님이 갑자기 조명하셔서 깨닫게 됐는데 이 부자청년이 바로 율법과 복음이더라고 했습니다. 이 부자청년은 자기가 칭찬받을 줄 알고 율법의 행위들을 갖고 예수님 앞에 나왔던 건데 예수님은 그의 탐심을 드러내심으로 네 율법의 행위가 온전치 않음을 알려주시고, 청년은 여전히 율법으로만 이 문제에 접근했기에 근심하며 떠나간 거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그럼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느냐며 놀라자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게 바로 복음으로, 너희들은 못 하지만 내가 하겠다. 즉 인간들에겐 불가능하나 하나님인 내가 십자가에 너희의 죄를 대속한 후 부활함으로 하시겠다는 거였더라는 말을 듣자 아, 하나님이 확실히 조명하셨구나 싶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조명으로 말씀을 깨달을 때의 신선함과 간단명료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찌 됐거나 어제는 부자청년에 대한 주일 예배 설교로 새로운 것들을 배웠습니다. 먼저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처음 나아올 때 ‘선한 선생님이시여!’라고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선하신 이가 없는데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반문하시는데 제겐 아리송한 부분이었습니다. 왜냐면 난 하나님이 아니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셨던 이유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하신 이가 없기에,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선하다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예수님을 랍비로 부르면서 자기 기준으로 선하다고 아부성 발언한 것이기에 지적했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부자청년의 질문도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며, 마치 자신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묻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율법으로 접근해오는 청년에게 일부러 내면을 다루는 1부터 4계명과 10번째 계명은 묻지 않고 5부터 9계명만 물으신 이유는 그 계명들은 드러나는 행위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눈에 드러나는 부분인 5부터 9계명만 묻자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다 지켰으니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음으로 예수님은 그의 숨은 교만을 드러내십니다. 그 후에 ‘네가 완전하고 싶다면 너의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며 부자청년의 숨은 탐심을 마저 드러내심으로 그가 하나님과의 계명은 물론 사람들과의 계명조차도 온전히 행하지 못했었음을 깨닫는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의 말씀처럼 탐심은 우상숭배이기에 10번째 계명과 1부터 4계명은 연결된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 부분을 스스로 깨달을 기회를 청년에게 주셨는데 그 이유는 성경에 나오듯이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자신의 우상을 더욱 끌어안음으로 근심한 채 떠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릴 사랑하시기에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부분을 반드시 말씀 가운데 비추시어 마음에 숨어 있는 많은 우상을 드러내시고 스스로 버릴 기회를 주신다고 하면서 그렇지 못하면 결국엔 그 우상들이 우릴 베고 찌르며 공격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부자청년으로 섰던 나의 모습이 말씀 가운데 비춰지며 회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숨은 우상들을 모두 드러나게 해주셔서 그 우상들을 숨기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게 해 달라고, 그것들을 버리고 돌이킬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됐습니다. 에스겔 14장 4절의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겔 14:4)” 우리 모두 헛된 탐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마음 가운데 만족하며 채움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