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2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18,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란 글에 썼듯이 요한까지 간신히 읽고 난 저는 진심으로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정말 지난 수천 년간 사람들이 얘기해오는 내용이 이것인가? 정말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단 말인가?’ 저는 배우자에게 사람들이 이런 내용을 믿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고, 성경을 읽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번드르르한 목사 설교에 속아 이런 말도 안 되는 종교에 빠질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불교 집안인데 나 때문에 마지 못해  교회에 몇 번 가야 했던 제 짝은 무척 반기며 성경의 내용을 믿지도 않으면서 계속 교회에 나가는 건 위선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위선자는 될 수 없었기에 우릴 전도했던 분과 야박할 정도로 연락을 끊고 교회에 그만 나갔습니다.

그렇게, 거의 함정에 빠질 뻔했다 건져진 거 같은 안도감으로 홀가분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배우자의 학연으로 인도됐던 그룹이 알고 보니 전도 단체였고 그 교회에 여름방학에 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있으니 아이들 집에서 놀리지 말고 보내라는 회유에 일주일간 보내게 되면서 마지못해 예배도 참석하게 됐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새로 온 사람들을 위한 목사님 소개 동영상을 보라고 해서 보는데, 거기서 전혀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그 목사님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 완전히 뒤바뀌게 된 제자들이 모두 그 것을 증거하다 처형당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부활했다고 너희가 말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인정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는데도 모두 죽기까지 그 사실을 전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까지 읽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 치졸하고 비겁했던 제자들이 부활 사건 이후 한결같이 그 일을 증거하고 전도하다 목숨을 잃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제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위대한 명분이나 이상에 목숨을 내어놓을 수는 있어도 거짓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데 그걸 거짓이라고 인정만 하면 어떤 처분도 받지 않고 살 수 있지만 계속 사실이라고 우길 땐 죽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길 사람은 없다고 생각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그렇게 따라다니며 충성을 맹세하던 예수가 눈앞에서 붙잡히자 버리고 모두 뿔뿔히 흩어졌던 인물들인데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굳이 살아났다고 거짓말해서 그 거짓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집결시킨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는 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지라도, 그 사람이 죽게 되거나 눈앞에 없게 되면 뿔뿔히 흩어집니다. 그런데 예수가 살아 있을 때에도 도망갔던 제자들이 죽고 난 후에 굳이 얻어질 것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 핍박과 죽음을 자초했단 사실은 그런 일을 분명히 목격했고 경험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성령이 임해서 변했다고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싶어지자 처음으로 성경에 적힌 사건들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명절이면 틀어주던 명화들만 봐도 초기 크리스찬들은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사자에게 산 채로 먹혀 죽음을 맞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었다는 게 떠올랐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에도 복음을 전파하려다 목숨을 잃었던 선교사들을 감안해볼 때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로 교회에 좀 더 나가보기로 했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은 설교 때 ‘믿음은 결정이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었습니다. 복음이 저절로 믿어지거나 어떤 확증들이 더 주어진 후에 믿겠다고 하면 결코 믿을 수 없지만 도리어 의지적으로 일단 믿기로 결단하면 믿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꿈을 처음 꾼 이후로 십 년이 넘는 세월을 계속되는 꿈들과 믿어지지 않는 성경 사이에서 씨름해온 제 삶의 모든 순간들이 생각만 해도 지치고 고단하게 느껴져서 이제 그만 거부하고, 그만 버티고, 일단 믿기로 한 번 결정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어떡해서든 이 고해의 세상에 다시 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싱글일 때 어떡하면 이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 수도승이라도 돼야하나 하던 참에 결혼했고, 아무래도 인연을 만들었으니 이생에선 틀렸고 다음 생에나 기약해보자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된대니 자연히 이 세상에 다시 올 일도 없기에 붙잡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 교회 사람들의 밝고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던 어느 날 혼잣말처럼, ‘저 사람들은 다 사는 게 행복한가 봐요?’ 했더니 제 옆에 있던 사람이 ‘저 사람들도 다 예수 믿고 저렇게 변한 거지 전에는 저렇지 않았었다’라고 했습니다. 전혀 뜻밖의 말을 듣는 순간, 마음 가운데 깊은 탄식처럼, 나도 예수 믿고 변하고 싶다. 나도 예수 믿고 저렇게 웃고 밝아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전해 들은 제 짝은, 부부가 종교가 다르면 서로 어려움을 겪게 되니 믿어도 같이 믿고, 예수 안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지옥에 가야 한다면 같이 가기로 약속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을 서로에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짝의 가족들에게 생사가 달린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게 됐고 서둘러 한국에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자 저희 소그룹  리더는 제 짝에게 한국 가기 전에 목사님께 가족들을 위한 기도 부탁을 하고 가라고 설득했고, 저희는 지난 주일에만 해도 앞에 나가서 등록만이라도 하라는 걸 완강히 거절했던 터라 심한 갈등이 왔습니다. 주일이 되어 예배 후 기도 받으러 앞에 나가기는 해야겠는데 그것 때문에만 나간다는 게 면몫 없고 민망해서 그럼 교회 등록만이라도 우선 하자고 서로 동의하고 헌신대 앞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등록하러 나가서 종이에 적혀 있는 등록, 영접, 침례, 등등의 체크 박스와 기도 제목을 적을 수 있는 난을 보는 순간, 짝에겐 미안하지만 나만이라도 우선 영접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등록, 영접에 체크를 했습니다.

그런 후 기도 받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안한 마음에 짝의 것을 슬쩍 보니 그의 것도 등록, 영접에 체크가 되어 있었습니다. 순간, 이 사람이 내 걸 보고 뭣 모르고 카피한 건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엉겁결에 영접 기도까지 받고 영접 모임에 가기로 하고 나오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니, 가족들을 위한 기도 부탁을 하려고 막상 헌신대 앞에 나갔더니 갑자기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마치 자신한테 모르는 애가 찾아와서 대학 등록금 대달라고 하는 것처럼 황당하실 거 같단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일단 기도 부탁을 하려면 영접부터 해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접란에 체크했다고 했습니다. 장장 12-13년 정도를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분석하고 망설이다 지칠 대로 지쳐서 겨우 믿기로 결정한 제 입장에서, 그런 고민 한 번 안 해보고 바로 지난주까지 등록조차 안 하겠다며 버텼던 짝이 한순간에 변심해서 믿기로 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신실하신 하나님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낱 인간일 뿐이었던 우리는 이렇게 단번에 변심해서 서로 배신 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같은 날 배신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서로에게 했던 약속을 대신 지켜 주셨습니다.

그렇게 영접 모임에 참석해 예수님을 나의 삶의 구주로 영접하는 고백 기도를 하고 난 다음 주 예배를 드리는 데 그 주 설교 요약지에 적혀 있는 ‘심판의 날에 기뻐 날뛴다’란 원색적인 문구가 눈에 들어오자, 적나라한 그 표현에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며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늘 꿈 때문에 마음 한구석에 어떤 부담과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던 감정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었고 그 표현이 내게 사실 그대로가 된 것이 벅찬 감격과 안도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거부하며 버텨왔는데 그것과 달리 저희는 너무도 싱겁게 하나님께 항복했고 한동안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과 행복으로 이 좋은 걸 왜 진작 믿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영접하고 나니 사물을 보는 관점도 완전 변하게 됐습니다. 처음 이곳에 내려왔을 때에는 예전에 있던 곳보다 한국 가게도 훨 많고 서점에, 학원까지 있고, 한국 의사가 하는 진료소도 있어서 신기해서 가봤다가 전도들을 하는 통에 의사는 돌팔이가 틀림없다고 생각해 당장 바꿨고, 책도 전화나 인터넷으로 오더하고, 학원도 몇 달 만에 그만 보내는 등 극단적인 조치를 했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있던 도시와는 달리 이 곳은 일요일에 문 닫는 가게가 유난히 많은 거 같아 이상해서 (비지니스는 주말 장산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누군가에게 지나가는 말로 하면, 아마도 안식일을 지키는 크리스천들일 거라는 상상치 못한 답을 듣게 되어 도시 전체가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었는데 그런 크리스천들의 숨은 노고와 믿음을 지키며 사는 헌신 된 삶이 너무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져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한 며칠 후 다음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5. 꿈에, 집 거실에 사람들과 둘러앉아 있었는데 누군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난 그들 앞에서 ‘이제 나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고 그러면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다’며 눈을 감고 하나님을 떠올렸는데 큰 빛이 떠올려지며 강한 황홀함을 느꼈다. 그리고 (뒷뜰에서 우리 집 거실 쪽을 내려다보는 관점으로 바뀌며) 뒷뜰에서부터 하얀 새 (비둘기라고 생각됐었음) 두 마리가 집 거실 창문으로 유유히 날아들며 깼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막 믿게 된 사람들끼리 함께 신약을 읽고 큐티하는 모임에 초대 되어 약 1년간 신약을 읽었는데 그 시간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안 믿던 당시에 읽었던 성경과 영접한 다음에 읽는 성경은 이게 같은 책인가 싶을 정도로, 예전엔 있는지도 몰랐던 구절들이 소록소록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신약의 첫 복음서인 마태복음 3장 16절에 예수님이 침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시자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에게 임하셨다는 구절은 제 가슴을 뜨끔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영접하고 꾸었던 꿈에서 보았던 그 하얀 비둘기 두 마리가 저절로 생각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럼 꿈에 비둘기로 보여진 게 바로 성령?’ 싶어지자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였다는 것도 희한했습니다. 부부가 같은 날 둘이서 영접했었는데 두 마리가 날아드는 것을 보았으니 의미심장 했지만 조용히 가슴에 묻었습니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4:62절에 너희는 내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정확히 말씀하시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첫 번째 꿈에서 제일 유치하고 말이 안된다고 실소했던 바로 그 부분이 성경에 엄연히 적혀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쇼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신약을 읽어나가다 사도행전 10:9-16절에 적혀 있는 사건으로 두 번째 꿈에 대한 의문도 풀어지게 됐습니다. 바로 베드로가 환상을 보는 장면으로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담긴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자기 앞에 내려오며 잡아먹으라는 소리를 듣자 그는 부정한 음식을 먹은 것에 대한 질책으로 잘못 알고 자신은 절대로 부정한 음식을 먹은 적이 없노라고 강조하며 거부합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세 번 거부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 깨끗게 한 것을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환상이 사라지자 의아하게 생각하던 중에 이방인들이 자신을 찾아왔음을 알게 되고 성령의 말씀을 듣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거기서 배드로는 고넬료라는 이방인 장교가 며칠 전 기도하다가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불러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해서 자신을 수소문 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던 중에 성령이 모여있던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것을 목격하자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음을 깨닫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자 막연히 드는 생각이, 베드로의 환상에 나왔던 부정한 짐승들이 결국 이방 사람들을 뜻한 것이었다면 내 꿈에도 죄 지은 사람들이 짐승들로 보여질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두 번째 꿈에서 음성으로 들은 ‘죄지은 사람’과 막상 땅에서 솟구치며 하늘로 올라간 짐승들 무리 사이에 있던 ‘세상의 지혜’로는 불일치라고 생각한 부분이 오히려 성경에 비추면 일치하는 경험을 다시 했습니다. 이처럼 꿈으로 먼저 본 것들이 성경으로 나중에 확인될 뿐 아니라 특히 우숩다거나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이 오히려 성경에 극명히 적혀있음을 번번이 경험하면서 더욱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공고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꿈이 성경에 비추어 타당한 꿈으로 받아들여지고 난 오랜 후에도 가슴 한켠에 살며시 남아있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바로 휴거는 성도들, 즉 주님 보시기에 선한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사건인 거 같은데 왜 내 꿈에서는 죄인들이 올라 갔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분이 놀라운 말씀으로 풀어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나 훨씬 더 지난 후였습니다. 그때는 세월이 흘러 예수님 믿은 지 일 년 반 만에 소그룹 리더가 된 우리가 불신자 전도를 수년 간 해오던 차였습니다. 성경은 신약의 이런 저런 부분을 읽어본 것 외에는 더 이상 읽지 못한 채 녹록지 않은 전도와 섬김의 생활로 허덕이고 있을 때였는데 그 당시 성경 교사로 섬기던 분이 교회에서 나눠준 성경 교안을 가져 와 거기 적힌 대로 요한계시록의 휴거를 설명했습니다. 도표로 되어 있는 교안에 첫 번째 휴거, 두 번째 휴거, 이렇게 설명돼 있고, 첫 번째 휴거는 성도들과 의인들의 휴거고 두 번째 휴거는 하나님께 심판 받기 위한 모든 죽은 사람들과 죄인들의 휴거라는 설명을 듣는 순간 마치 번개에라도 맞은 것 같은 강렬한 전율이 왔습니다. ‘꿈에 본 휴거가 바로 죄인들의 휴거였다니…’ 요한 계시록을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설명으로 듣지 않고는 성도들만 휴거하는 게 아니라 나머지 세상 사람들도 모두 심판 받기 위해 휴거 한다는 것조차 깨닫을 수가 없었는데 그런 사실을 성경이나 예수님을 알기도 전인 시기에 꿈으로 보았다는 충격에 쇼크가 한동안 가시지 않았었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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