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일 설교에서 흥미로운 포인트가 제시됐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한 후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19:8)’고 말하는 부분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문맥상 미래 시제로 풀면 예수님 만나고 변한 삭개오가 앞으로 그렇게 살겠다고 신앙 고백한 겁니다. 하지만 단어 자체가 나타내고 있는 현재 시제에 비추어 보면 이 구절은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나이다 그리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나이다’란 습관적 현재 시제가 됩니다. 즉 ‘지금까지 그렇게 갚아오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도 전에 이런 실행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누가복음 3장에서 침례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침례 요한에게 침례 받으러 온 세리와 군인들이 자신들은 어떡해야 하냐고 묻고 그가 이런저런 방침을 줬던 것과 연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3:7-14)’
즉 삭개오는 침례 요한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말씀을 믿었고, 믿었다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을 행하며 살았던 사람인 것입니다. 실제로 침례 요한이 타락한 세상을 떠나 정결한 삶을 살고자 형성했었던 쿰란 공동체의 문헌을 보면 훔친 것의 4배를 보상하라고 강조하는 부분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는 이 설교 해석이 맞겠다 싶었습니다. 왜냐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딤3:16) 쓰인 책으로,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낱낱이 적고자 했다면 이 세상도 그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하다(요 21:25)고 분명 증거하는데, 침례 요한이 세리와 군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분은 꼭 기록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이 권면의 내용도 너무 당연한 내용 같아서 굳이 넣을 필요가 있었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3장에 나오는 회개 선포를 그 선포의 합당한 열매가 되는 19장 삭개오의 삶으로 연결하면 시작과 결말이 되며 짝이 됩니다. 또 삭개오가 그런 회개의 열매를 맺고 있음을 아신 주님이 그를 부르셨고 함께 들어가 먹고 마시고 유함으로 구원하신 걸로 연결하면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고 늘 기도하며 많은 구제를 했던 고넬료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를 통해 구원이 임하게 하셨던 것처럼) 개연성이 확실해집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깨닫는 것은 어떤 단어, 어떤 구절도 괜히 들어가 있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괜히 들어가 있는 거 같고 모순인 거 같은 부분에 더 큰 숨겨진 의미와 은혜가 있는 것을 번번이 깨닫습니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침례 요한이 쿰란 공동체 문헌에서 훔친 것의 4배로 갚으라고 강조했다면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출22:1).’ 단, 그 도둑질한 것이 살아서 그의 손에 있어 돌려줄 경우엔 갑절을 배상(출22:4)하라고 돼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축은 재산, 곧 물질이기에 돈을 훔칠 경우에도 4배를 배상하라고 침례 요한이 한 모양입니다. 사무엘서에서도 나단이 다윗의 은밀한 죄를 드러내고 책망할 때 암양 새끼 한 마리가 전부였던 가난한 자와 부자의 비유를 들어, 부자에게 손님이 오니 가난한 자의 암양을 잡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분노하여,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삼하 12:6)’고 말합니다. 이렇게 다윗이 율법에 근거해 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마음 가운데 새겨뒀던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주님은 엘리야의 영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한 침례 요한의 회개 선포를 귀담아듣고 회개의 합당한 삶을 살았던 삭개오를 만나주셨고, 부자 청년에게서 숨은 탐심을 드러냈듯이(이 부분은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에게선 하나님을 찾는 열망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눅 19:9)’고 선포하심으로 그의 믿음의 행위를 확증해주신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렇게 선포하신 후 연이어 열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주인이 다시 올 때까지 이렇게 작은 것에 충성했던 사람이 어떻게 더 큰 일을 맡게 되고, 그렇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사람은 어떻게 있던 것마저 뺏기게 되는지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와의 만남은 계명을 지키고 행하는 것은 믿는 사람들에겐 부담이 아닌 당연한 것이란 한 구절로 요약된다”며 끝난 설교는 제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가져왔습니다.
계명 또는 율법으로 번역되는 ‘commandment(명령)’는 성경에 333번 나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 강조되는 계명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셨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계명을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함축해서 정의하십니다. 그렇기에 이것 역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이웃 사랑으로 함축되는 내용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3개의 서신서에서 누누이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는데 요일 3장23절에서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하며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 3:10)’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더러운 누더기 같은 우리의 의를 말하는 게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롬1:17), 즉 믿음을 말합니다. 결국 믿음의 행함과 형제 사랑을 말하기에 요일 3:23절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그러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게 되면 내게 있는 믿음과 소망이 성취되어 과거 완료형이 될지라도 사랑은 현재진행형으로 영원히 떨어지지 않기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고전 13:8, 13)입니다.
불신자였을 때에는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보면 준 것 없이 싫고 피했었습니다. 그들이 혹시라도 친절하게 대하고 잘해줄 경우엔 목적을 위해 속이는 것 같아 호의조차 거절했었습니다. 거듭난 후에는 교회와 형제들을 무조건 믿었고 나 좋다는 소리 들으려고 희생하고 참다가 한 번씩 의가 발동하면 잘못을 지적했었습니다. 그러다, 신앙의 연수가 길어지며 여러 모양의 시험과 시련, 환란과 연단이 오자 나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에 교회와 형제들을 깊이 불신하게 됐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일하심을 보여주심으로 교회와 형제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주셨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은 제게 아직도 부족한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단지 내 교회만 품을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판단 받아 마땅하고 정죄 받아 마땅한 불미스러운 일조차도 남의 일처럼 대하는 게 아니라 다니엘처럼, 느헤미야처럼, 나의 죄로 주께 고백하며 함께 아파하고 기도하라는 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덕에 주홍빛 같은 저의 죄가 가려졌듯이,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는 말씀을 주님의 몸 된 공동체 가운데 실천하며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려면 얼마나 더 많은 어려움과 시험과 환란이 닥칠지 엄두조차 안 나지만 그런 소원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뤄 가실 것으로 믿고 그분이 일하실 수 있도록 자기 부인하며 나가길 소망합니다. 창녀와 세리의 친구셨던 주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릴 위해 죽으심으로 그 크신 사랑을 나타내셨던 그 사랑과 은혜를 잊은 채 어느덧 첫사랑을 떠난 에베소 교회 같은 제 마음이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길 믿음 가운데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