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자 입장에서 드리는 객관적 관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목만 보면 ‘어떤 사랑 이기에 우리의 허물을덮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까’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 되었어야 했다고 봅니다. 구약의 계명이 율법이라면 신약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신약을 거의 이해했다고도 볼수 있을 것 같네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약에서만 나온 말씀이 아니라 구약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에서도 나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는 말씀을 새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요한복음 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5장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새계명은 즉 내 계명,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같이…’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인간적인 사랑의 교제를 말씀하시는 거고, 신약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새계명이라고 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물 과 피를 쏟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이기에 우리도 영혼 하나 하나를 그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고 믿어집니다. 구약과 신약의 사랑의 차이점입니다.그런 예수님의 새계명, 사랑의 관점으로 신약을 해석한다면..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라는 제목의 의미는 더 깊고, 의미있는 감동으로 결론이 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 썼었던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글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여러 가지를 다루다 보니 정작 제목에 걸맞게 ‘사랑’에 대해서는 충분히 못 쓴 걸 잘 보충해주는 코멘트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원래는 다른 걸 쓰려던 계획을 접어두고 성경에서 사랑에 대해 더 찾아보고 묵상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부분은 창세기 22장 2절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구원의 희생제물로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이미 2000년 전 아브라함과 이삭의 순종으로 예표하셨던 부분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단어가 처음 쓰인 구약의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순종하셔서 우릴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시는 신약의 부분과 묘하게 겹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요일 4:16)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구약엔 레위기 19장 18절의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신 이웃 사랑의 부분뿐만 아니라 신명기 6:5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도 나옵니다. 코멘트한 분이 지적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에서부터 내려온 계명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시는데, 이 새 계명은 ‘네 몸과 같이’도 아니고 ‘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도 아닌 예수께서 우릴 사랑하신 것처럼, 죽을죄는 네가 지었지만 내가 대신 그 죄를 덮어쓰고, 죽어야 하는 널 살리기 위해 내 목숨을 대신 내어주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수를 갚지 말라(레 19:18)’가 구약의 계명이라면 예수께서 주신 새 계명은 그 정도가 아닌, ‘원수를 사랑하라(마 5:43-44)’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됐던 자들을 먼저 사랑하셔서 화해시키려고 스스로 화평헌물이 되어 희생하신(롬 5:8-10) 그 사랑처럼 말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3-44)’. 누가복음 6장 27-28절에서도 주님은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는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입니다. 즉, 우리 상이 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한 분이기 때문이란 겁니다. 양자의 영을 받아(롬 8:15)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 우리가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게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6-38)’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고 하시고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잠 25:9)’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면을 쫓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한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 부인과 고난을 동반하지 않고는 맺을 수 없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라(벧전 4:1)’고 합니다. 영어를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하여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던 것처럼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무장하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로부터 그쳤기 때문이라’ 입니다. (Forasmuch then as Christ hath suffered for us in the flesh, arm yourselves likewise with the same mind: for he that hath suffered in the flesh hath ceased from sin;)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한 바울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는 예수님의 명령처럼 살아가게 되면 죄로부터 그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즉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덮어주시고 희생제물이 되어 주신 그 사랑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해서 남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라는 일차적인 의미뿐만이 아닌, 그렇게 자기 부인하며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한 채 사랑할 때 내 육신의 죄도 그치는 역사가 일어나기에 결국 서로의 허다한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인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7-31)’는 말씀을 좇아 하나님과 원수 된 세상 가운데 살아가고, 교회 안에서는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때 얻게 되는 상처와 모욕과 고난은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란 말씀이 우리에게 실제가 되게 함이니 오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밷전 4:7)’는 말씀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로 나아가기를 주께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