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시기에 가는 모세와 발람을 죽이려한 하나님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참 변덕스럽고 돌발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엔 모세와 발람에 대한 부분이 그랬습니다. 출애굽기 3장과 4장에 걸쳐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이집트에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하라고 하십니다. 지난 40년간 고향과 동족을 등지고 낯선 타향에서 딸 부자 장인의 더부살이 사위 중 하나로 늙어간 양치기 모세 입장에선 뜬금없는 상황입니다. 몇 번이나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하며 거부하는 모세를 하나님은 집요하리만큼 설득하고 더 핑계 댈 수 없게 하신 후에 떠나라고 재차 명령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런 여러 번의 재촉에도 뭉그적대던 모세가 겨우 마음을 다잡고 길을 나서서 가는 중에 하나님은 갑자기 그를 만나 죽이려 하십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출 4:24).’ 이 부분이 당황스러워서 주석을 찾아봤더니 대부분 그다음 구절인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 4:25-26)’는 내용을 미루어 아마도 할례를 주지 않았었기에 모세를 죽이려 했던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딱히 맘에 와닿지 않은 채 그냥 덮어두고 성경을 읽어나가던 어느 날 아하! 싶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아브라함같이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시며 이민을 명령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야곱처럼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창 31:3)’시며 귀향을 명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모세에게는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구출해내어 가나안 땅으로 이주까지 시키라는(출 3:8) 엄청난 명령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마치, 적진에 투입되어 인질들을 구출한 후에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하는 특전사처럼 긴박하고도 위험한 임무였기에 최전방에 투입되는 군인 같은 비장함으로 무장하고 가도 부족할 마당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전혀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가족 여행이라도 가듯 부인과 어린 두 아들까지 데리고 터벅터벅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세상 전투에서도 가족들을 데리고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전에도 모세에게 이미 한번 노하셨었습니다. 이스라엘 구출 작전의 필요와 전개 과정과 그 결말까지 미리 알려주시고 보장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의심하며 거절할 핑계를 찾았기 때문입니다(출4:14). 하지만 곧 오래 참으심으로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확신을 심어주며 격려하셨던 차이기에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는 모세에게 불같이 화나실만한 상황입니다. 세상 전쟁터에서도 자기 부하가 군기를 어지럽히고 해이하게 처신한다면 가만 놔둘 상관은 없습니다. 바로 불호령이 떨어지고 사기를 잡기 위한 징계가 내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아들 둘과 아내를 데리고 여관으로 향하는 모세에게 나타나 죽이려 하시고 그걸 할례 때문으로 생각했던 십보라는 얼른 돌칼로 아이에게 할례를 줍니다. 이 부분에서 하나 더 유추해냈던 것은 십보라가 할례를 줬던 아이는 아마도 둘째였고 갓난아기였을 거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나오기 전까지 맏이인 게르솜을 낳았다는 기록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22).’ 그런데 모세가 가족과 함께 떠나는 장면인 출 4장 20절에선 갑자기 ‘아들들’이라며 복수가 됩니다. 처음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을 때 이상해서 3장부터 다시 훑어봤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둘째에 대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을 여러번 찬찬히 읽는 가운데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출 4장 18절에 보면 하나님과의 몇 번의 실갱이 끝에 드디어 떠날 결심을 한 모세가 드디어 장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장인은 흔쾌히 허락하지만 모세는 바로 떠나지 않습니다. 다시 19절에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고 하시자 20절에 와서 겨우 가족들을 나귀에 태우고 떠납니다. 이때 처음 ‘아들들’이란 표현이 나오는 것을 미루어, 지체한 배경엔 둘째의 출산이 있었겠다 싶었습니다. 이렇게 낳았다는 기록도 이름도 없던 둘째의 이름은 모세의 장인이 딸과 외손자들을 모세가 있던 광야로 데려다주는 18장이 돼서야 나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 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왔으니 그 하나의 이름은 게르솜이라 이는 모세가 이르기를 내가 이방에서 나그네가 되었다 함이요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더불어 광야에 들어와 모세에게 이르니 곧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이라(출 18:2-5)’. 

어찌 됐거나 4장 20절에서 갑자기 ‘아들들’이란 복수가 되었던 단어는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는 장면에서는 다시 ‘아들’이란 단수가 됩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출 4:25)’.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 남편을 죽이려는 긴박한 상황에서 아들에게 할례를 줄 수 있었다는 건, 비록 미디안 여자였지만 모세를 통해 할례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더 나아가 첫째에게 이미 할례 준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십보라는 이렇게 둘째에게 할례를 주게 되고 그 일로 자연히 더 따라갈 수 없게 되어 아이들과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몸소 체험하게 된 모세는 군기가 바짝 들어 홀로 임무 수행차 떠납니다. 이걸 두고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라고 하는 거 같습니다.

모세처럼 발람에 대해 가졌었던 비슷한 의문도 성경을 꼼꼼히 읽는 가운데 풀어진 적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엔 널리 알려진 발람과 발락 이야기가 나오는데 하나님은 발락을 따라가지 말 것을 발람에게 명하셨습니다(민 22:12). 하지만 그들이 재차 와서 같이 가줄 것을 청하자 발람은 하나님께 여쭤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막상 발람이 그 다음 날 그들과 함께 가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민 22:21-22, 33)’. 이 글을 쓰며 한국어 성경 구절을 인용하다 보니 다시 한번 아쉽게 번역됐음을 봅니다. 20절이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라고 번역돼서 마치 그들이 부르러 왔으니까 함께 가라고 하신 것처럼 읽힙니다. 하지만 영어로는 ‘…If the men come to call thee, rise up, and go with them…’ 즉 ‘만일 그 사람들이 와서 너를 부르거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라’ 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다음 날 아침에도 사람들이 와서 너를 부르거든 일어나 같이 가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민 22:21)’. 그 어디에도 그들이 아침에 다시 와서 청했다는 부분은 없습니다.

이처럼 발람은 하나님의 명령 중 전제조건인, ‘만일 그들이 와서 너를 부르거든’은 깡그리 무시하고 마치 하나님 허락을 얻은 것처럼 그들과 함께 가버립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여쭙고 답을 듣는 시늉은 했지만 돈 버는 목적으로 이용했을 뿐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또한 20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들과 함께 가라’의 ‘함께’는 히브리 원어로 ‘에트(eth)’, 즉 한 방향으로 함께 가는 동행의 의미라면, 21절에 발람이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갔을 때 쓰인 ‘함께’는 히브리 원어로 ‘임(im)’, 즉 혈연처럼 결속해서 하나 되어 가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20절과 21절을 그냥 보면 겉으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걸로 보이지만 사람의 속중심을 아시는(삼상 16:7) 하나님은 그의 돈과 결탁한 불순종의 심령을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20절 명령의 마지막 부분인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가 이행 안 될 것을 아시고 그를 죽이려고 나타나셨던 것이고 그 일로 정신이 번쩍 든 발람은 발락에게 갔을 때 오직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말씀만을 전하겠다고 거듭 말하며 이스라엘을 축복함으로 이 모든 과정에서도 하나님은 뜻을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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