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를 듣다가 그 내용에 결부된 어떤 궁금증이 생기거나 갑자기 깨달음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중 한번은 창세기에서 야곱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것(창 46:2)에 대한 설교를 듣다가 문득 성경에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몇 번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았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성경 전체에 7번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은혜를 적은 글이 ‘이름을 두 번 부르심’입니다.
또 한번은 야곱이 천사와 밤새 씨름하는 부분(창 32:24)을 밤새워 기도하는 거로 비유한 설교에서, 그렇게 밤새워 기도했건만 야곱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잔머리 굴리며 형 에서에게 큰절하며 나아가더란 내용을 듣다 갑자기 온 깨달음입니다. 야곱이 천사와 밤새 씨름해서 이기고 축복까지 받은 걸 사람들은 ‘얍복강의 기도’라고 하며 우리도 야곱처럼 하나님께 매달리고 기도해서 승리하고 축복 얻어야 한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겼던 건 결코 좋은 게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육신적인 야곱의 의지를 꺾어 순종케 하시려고 씨름하신 거였는데 차라리 그때 졌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었을 텐데 싶었습니다. 그랬다면, 이삭처럼 큰 시험이나 환란 없는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자유 의지와 고집을 내세워 이겼기에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하나님은 아브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창 17:5)’가 될 거란 의미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창 17: 16)’가 될 거라는 의미에서 사라로 바꾸셨기에 축복과 결부되어 좋게만 여겨집니다. 물론 야곱의 이름을 바꾸시고도 축복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의미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게,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어떻게 초림의 예수님과 씨름하며 겨루다 이기게 되는지를 나타내는 예언적 요소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도리어 하나님을 이긴 야곱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에서를 만나고 더 나아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란 하나님의 말씀(창 31:3)을 무시한 채 세겜에 머뭅니다. 그러다 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아들들은 그 일로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몰살시키는 치욕스럽고도 불미스러운 일을 겪습니다(창 32-34). 그러고 나서야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쳤듯이 그곳을 도망치듯 떠나고 예전에 고향을 떠나던 자신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께 다시 벧엘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라헬을 잃고 그러고도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가지 않고 에델 망대를 지난 곳에서 장막을 치고 머뭅니다(창 35:21). 그러다 맏아들인 루으벤이 첩 빌하를 범하고 나서야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던 헤브론에 와서 머물게 됩니다.
그 후로도 야곱은 부인들을 편애했듯이 자식들조차 철저히 편애하며 이기적인 모습을 고수하다가 늘그막에 요셉을 다시 만나며 바로를 축복하는데, 비록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오는 영적 신분으로 바로에게 축복할지언정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왕에게 해줄 간증이라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에 보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의 고백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생전에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수천 년 후에는 대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렇기에 야곱의 경우엔 이스라엘이 영적인 이름이고 야곱은 육신적인 이름이란 해석에 더는 동의가 안 됐습니다. 성경엔 사람이 부친 하나님의 이름 외에(여호와 라파, 여호와 이레 등등),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컫는 이름이 몇 나옵니다. 그중 하나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 3:6, 4:5; 마 22:32)’ 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엔 한번 이름이 바뀐 후로는 어디서든 아브라함으로 쓰이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은 창세기에서도 같은 사람을 두고 왔다 갔다 쓰이지만, 성경 전체에서도 두 이름은 꾸준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성경을 읽어보면 ‘야곱’이란 이름에 오히려 언약이나 하나님의 몫이라는 정체성이 따라붙는 걸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왕하 13:23)’처럼 오히려 야곱이란 원래 이름이 영적인 축복이나 영적 유산, 하다못해 영적 환란-야곱의 환란(렘 30:7), 야곱의 남은 자들(사 10:21)-에도 쓰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으로 야곱이 불릴 때는 오히려 한 민족을 일컫거나 공식적인 느낌이라면 야곱이란 예전 이름으로 불릴 때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영적 계보와 연관 있는 하나님과 좀 더 사적이고 친밀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46:2-3).’ 이 구절에서도 보이듯이 성경은 야곱을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직접 부르실 때는 ‘야곱아, 야곱아’로 부르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오히려 야곱의 육신적 혈통을 잇는 민족과 나라를 예표하거나 일컬을 때 쓰이고 야곱이란 이름은 영적 계보를 이을 때 쓰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과 맞물려 ‘야곱’이란 이름에 얽힌 또 하나의 미스테리한 부분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창세기에는 10개의 세대가(generations) 나옵니다(숫자 1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하늘과 땅의 세대들 (창 2:4)
- 아담의 세대들 (창 5:1)
- 노아의 세대들 (창 6:9)
-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대들 (창 10:1)
- 셈의 세대들 (창 11:10)
- 데라의 세대들 (창 11:27)
- 이스마엘의 세대들 (창 25:12-13)
- 이삭의 세대들 (창 25:19)
- 에서의 세대들 (창 36:9)
- 야곱의 세대들 (창 37:2)
창세기에 나오는 ‘세대들’은 말 그대로 족보인 만큼 그것에 맞게 첫 시조가 되는 조상의 이름과 그 후손들의 이름이 쭉 열거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맨 처음 나오는 하늘과 땅의 세대들(창 2:4)과 맨 마지막 나오는 야곱의 세대들(창 37:2)은 예외입니다. 하늘과 땅의 세대들이야 사람이 아니니 열거될 이름이 없다손 쳐도 ‘야곱의 세대들’은 다른 족보들처럼 야곱 자손들의 이름이 열거돼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족보는(세대들: generations) 이러하니라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창 37:2)”며 놀랍게도 ‘세대들’이란 복수임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름 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이 부분을 위 2번부터 8번에 나오는 다른 족보들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치 ‘야곱의 세대들’은 요셉 한 명으로 끝나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이런 성경의 뉘앙스를 뒷받침해주듯이 야곱은 요셉에게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창 48:5)’라고 하며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자기 자식으로 창세기 말미에 취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본격적인 민족과 나라를 일컫는 이름이 되는 출애굽기에선 요셉은 이스라엘 지파를 일컬을 때는 아예 빠져버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로 대치됩니다. 이렇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 그도 아님 ‘요셉의 아들들의 지파’라고 불릴지언정 그냥 ‘요셉 지파’로 기록된 부분은 구약엔 없습니다. 더구나 49장으로 넘어가 축복하는 부분에서 야곱은 요셉에게 ‘…him that was separate from his brethren(창 49:26)’이란 표현을 쓰는데 직역하면 ‘그의 형제들에게서 분리된(나뉜, 별개인) 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던 계보는 요셉에서 끝나고 나머지 자식들이 야곱의 혈통인 이스라엘로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또 다른 부분입니다.
이랬던 요셉이란 이름이 12 지파 중 한 ‘지파’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마지막 때에 인침 받는 144,000명의 기록이 있는 요한계시록 7장 8절뿐입니다.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여기서 하나 흥미로운 것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다른 족보처럼 후손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지 않은 첫 번째 족보인 ‘하늘과 땅의 세대들(창 2:4)’과 마지막 10번째 족보인 ‘야곱의 세대들’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와서야 그다음 세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창세기에 ‘하늘과 땅의 계보’라고 분명히 나오지만, 그다음 세대에 대한 예언만 잠깐 이사야서와(사 65:17, 사 66:22) 베드로서(벧후 3:13)에 등장하다가 비로소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의 탄생을 봅니다. 이처럼 창세기에서 요셉 이름 하나만 나오고 끝나버린 야곱의 족보는 나머지 성경이 육의 혈통으로 한 민족과 나라가 된 이스라엘의 긴 땅에서의 여정을 서술하는 동안 침묵합니다. 그러다가 신약에 와서 참 유대인은 혈통이 아닌 영으로 된다는 개념이(롬 2:28-29) 소개되고 요한계시록에 비로소 요셉이란 이름이 포함된 12 지파가 열거되며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영적 계보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숫자 12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