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를 물에서 건진 바로의 딸 1

주일 설교를 듣다가 그 내용과 결부된 어떤 깨달음이 갑자기 임했던 또 한 경우는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강에서 건짐 받는 내용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출 2:5-6).’ 이 부분에서 “나도 아이들을 키워봐서 알지만, 상자에 갇혀 있다가 땀에 절어 악쓰며 우는 아기의 시뻘겋게 일그러졌을 얼굴이 뭐 그리 예쁘고 불쌍히 보였겠나요. 내 아이라도 울 땐 밉고 짜증 나서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게 사람인데, 그렇게 악을 쓰고 우는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아기를 불쌍한 눈으로 보게 해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때 모세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은혜를 입도록 한 공주의 눈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눈이었던 것입니다”란 말을 듣는데 갑자기 ‘아! 그때 강에서 건짐 받은 것은 모세 하나가 아니었구나! 바로의 딸을 통해 모세를 건지신 성령께서 그 이후 강에 던져질 수많은 이스라엘의 남아들도 함께 건지셨던 거구나!’란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전에 성경을 읽다가 모세와 형 아론의 나이 차가 3살임을 알게 됐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그들이 바로에게 말할 때에 모세는 팔십 세였고 아론은 팔십삼 세였더라 (출 7:6-7).’ 그래서 모세에게 형이 있다는 건, 히브리 남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태어난 거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악행이 언제쯤 끝나게 됐는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었고 막연히 바로의 딸이 강에서 모세를 건져냈을 때 아버지 몰래 유모를 두고 키웠으려니 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중 갑자기 그때 끝난 거라는 깨달음이 오자 오히려 그게 더 말이 됐습니다. 아무리 바로의 딸이라도 그런 명령이 버젓이 시행되는 가운데 히브리 아기를 유모에게 보내 키우고 왕궁에까지 데려와 아들로 삼을 방법은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불쌍히 여겨 살려낸 바로의 딸이 아버지를 설득해 그런 악행을 중단토록 했기에 유모를 통해 키울 수 있었고 젖을 뗀 후에 양자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좀 더 연구해보니 이런 깨달음을 뒷받침이라도 해주듯이 그 당시 역사기록에 의하면 바로의 딸이 외동딸이었고 실세였다는 내용이 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했었습니다. 그 후 읽는 출애굽기 7장 10절은 제 마음에 오는 의미와 무게가 달랐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출 7:10).’ 왜냐면 이 말을 하는 주체가 바로의 딸이 아닌 하나님의 음성-정확히 말하자면 성령의 음성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의 역사로는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불쌍히 여김을 얻고 은혜를 입어 건짐 받아 아들이 된 거겠지만,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인 이스라엘(출 4:22-23)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어 강에서 건짐 받는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남아들이 강에 던져져 죽게 되는 악한 일이 과연 얼마동안 지속된 걸까란 의문이 해결되게 됐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아론과 모세는 3살 차이고 또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3달간 숨기다가(출 2:2) 마지 못해 강에 띄워 보낸 걸 바로의 딸이 건져냄으로 그런 악행이 결국 멈췄다면 대충 3년 반 정도의 시간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한번 놀라웠습니다. 왜냐면 마귀인 용에게 비유되는 바로(겔 29:3)에게 3년 반 동안 나일강에서 죽임당하는 출애굽의 사건이 다니엘서(단 7:25; 9:27; 12:11-12)와 요한계시록(계 11:23; 13:5)에 예언된 마지막 때 이스라엘이 겪을 3년 반 대환란의 예표였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의 역사뿐만 아니라 근대 역사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하다가 알게 됐었던 또 다른 근대사의 3년 반 환란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세계 2차 대전의 기록인데, 세계 2차 대전의 기간은 공식적으로 1939년 9월 1일에서 1945년 9월 2일에 끝나 햇수로는 7년이 되고 꽉 찬 날수로는 6년 하루가 됩니다. 근데 희한하게도 이중 ‘Final Solution’으로 불리는 유대인의 대학살이(홀로코스트) 히틀러에 의해 포로수용소에서 집중적으로 자행된 기간은 전쟁 기간 7년 중 후반부인 1941년 9월에서 1945년 1월까지로 정확히 3년 반의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유대인의 수는 6백만 명으로 그 당시 유대인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합니다. 스가랴 13장 8-9절 말씀이 저절로 떠오르는 부분입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온 땅에서 삼분의 이는 멸망하고 삼분의 일은 거기 남으리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8-9).’ 이 예언의 말씀이 증거하듯이 AD 70년에 나라를 잃고 온 땅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 중 3분의 2가 죽임을 당했고 3분의 1이 살아남았는데, 그런 학살에 대한 보상과 오래도록 이어져 온 시오니즘 운동의 열매로 종전하고도 3년이 더 지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다시 건국됐습니다. 성경의 인간 창조 역사 6000년을 통틀어 1, 2년도 아닌 2000년 동안 없어졌던 나라가 다시 그 땅에 터전을 잡고 생기는 일은 하나님이나 하실 수 있는 역대미문의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렇게 마지막 때에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약속의 땅으로 다시 모여들게 됐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마지막 날들’에 대한 예언은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시간입니다. 9절로 이뤄진 짧은 스가랴 13장 전체를 예수님 초림 이후 2000년의 근대 역사에 비춰 읽어보면 그저 놀랍고도 놀라운 예언의 성취 장이라고밖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3분의 2가 죽게 되는 예언이 나오는 8-9절 전에 나오는 13장 6절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네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는 어찌 됨이냐 하면 대답하기를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 하리라’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로는 밑줄 친 부분이 ‘두 손에 있는 상처(wounds in thine hands)’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그 손에 난 상처가 절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요 20:25-27). 이처럼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후 로마에게 멸망해 온 땅에 흩어지게 된 유대인 3분이 2가 죽고 3분의 1은 정결케 되는 1900년간의 역사가 스가랴 13장 6-9절, 이 네 구절에 간략하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3천 500년 전에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3년 반 동안 학살당하던 이스라엘의 아이들을 모세란 한 아이를 강에서 건져냄으로 살상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80년이 지난 후에는 에굽에서 억압받고 학대당하는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그들이 거부했던 모세를 그들의 왕이요(신 33:5) 하나님으로(출 4:16; 7:1) 다시 보내어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한 후 이스라엘을 세상의 예표인 에굽에서 구출하십니다. 근대사로 와서 1941년에서 1945년까지 3년 반 동안 자행되던 유대인의 학살을 하나님은 멈추게 하셨고 산통과 같은 진통 끝에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1948년 이 땅 가운데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로부터 억압을 받아 신음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거부했던 예수님을 그들의 왕이요 하나님으로 다시 보내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가지 재앙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구출해내실 것입니다.

모세는 시편 90편 10절에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징조를 말씀하시며 무화과나무(이스라엘 나라)를 비유해서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가을은 수확의 시기이기에 ‘여름‘은 농작물의 끝물이기도 하고 히브리어에서 ‘여름’은 ‘끝’이란 단어와 동음의이어입니다. 아모스 8장1-3절에 나오는 여름 과일 한 바구니의 환상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름이 가까운 줄 알라는 것은 ‘끝’이 가까운 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즉, 그 비유에 해당하는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것들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2-34). 모세가 80이 됐을 때 에굽에서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낸 것과 시편에 비춰보면 한 세대는 80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비춰 보면 한 세대는 100년이고(창 15:13, 16) 그도 아님 120년일 수도 있습니다(창 6:3절과 모세가 120세가 된 후에야 이스라엘이 비로소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에 비춘다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아무도 그날과 시각(때)은 모르지만(마24:36) 성경에 비추어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은(마 24:33) 압니다. 그때가 차면 아직 이뤄지지 않았던 성경의 모든 예언이 글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려고 그들의 주요 그리스도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처럼 예수님을 찌른 그들은 그를 보고 애통하기를 마치 외아들을 위해, 장자를 위해 통곡하듯 회개하며 비로소 그들의 왕과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맞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Published by tnb4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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