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저자는 성령이기에 어느 한 구절, 한 단어도 그냥 적혀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 반면에 광대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쓰임 받은 인물 혹은 주요 사건만 적혀있기에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며 깨닫는 것은 성경의 어떤 내용이나, 구절, 혹은 단어의 뜻을 알고 싶다면 성경 밖에서 찾기 전에 성경 안에서 꼼꼼히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당시의 역사 자료나 문헌이 도움 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가 사전이자 보충자료임을 번번이 경험합니다. 그 중 한 예를 오늘 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는 열두 제자가 있었지만 비교적 자세히 기록된 제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제자가 대부분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도 이런 경우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이 아니라면 나다나엘에 대해 특별히 알 수 있는 대목이 다른 복음서엔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적혀있는 예수님과 그의 대화가 짧은 몇 줄로 이해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이 찾아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고 전해주었을 때만 해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게 나오겠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께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하시자 당신이 나를 어찌 아느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날 어찌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는 건데,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노라(요 1:48)’라고 하시자 즉각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는 다소 과잉반응처럼 보이는 파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도,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50-51)’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보았다’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고 까지 즉각 얘기하는지 선뜻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석도 찾아보고 인터넷도 검색해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무화과나무는 공공연한 곳이 아닌 나다나엘 집 정원에 있던 나무였기에 그런 그를 보았다고 하시니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나다나엘은 아마도 거기서 명상이나 기도를 했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은밀한 모습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나다나엘이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혹은 ‘나다나엘이 어떤 성품인지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흥분이나 감동을 잘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런 미성숙한 사람도 예수님이 쓰시고 또 예수님 안에서 성화 되었다.’ 그도 아니면, ‘그는 서둘러 판단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나사렛이라고 하니 거기서 무슨 선한 게 나겠냐며 쉽게 판단하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까지 바로 판단하는 사람’이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공감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맘에 와닿지도 않아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봤다’는 게 뭐 그리 놀라워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라고 까지 화답한 걸까 싶어 ‘무화과나무’를 성경 전체에서 찾은 후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으로 “fig tree”를 찾아보니 성경 전체에 모두 38 구절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상징하는 ‘무화과나무’ 구절이 성경에 38번 나온다니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38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뜻 없이 헤맨 연수였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명기 2:14)”
이스라엘은 총 40년 광야 생활을 했는데 그중 2년은 그나마 목적 있는 행보라면 38년은 범죄 후 오도 가도 못하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첫 세대가 모두 죽을 때까지 정지된 상태로 기다려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40이 일정한 어떤 시험의 기간 또는 그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정해진 특정 기간의 수가 찼음을 뜻하는 일반적 의미라면 38은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특별한 숫자입니다. (40에 대한 좀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 적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8에 대한 또다른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어찌 됐거나 성경에서 찾아낸 38개의 ‘fig tree’ 구절들을 하나씩 읽다가, ‘Whoso keepeth the fig tree shall eat the fruit thereof: so he that waiteth on his master shall be honoured.(잠 27:18)’란 구절을 발견했을 때 바로 이 구절이란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직역하면, ‘누구든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 이처럼 자신의 주를(혹은 주인을) 기다리는 자는 영광을 얻으리라’입니다. 나다나엘은 이 잠언 구절을 묵상하며 자기 뜰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가꾸고 지키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했던 거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도 전,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을 때에 보았었다’란 말씀에 놀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며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을 만났다는 깨달음에 감격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성경을 좀 안다는 크리스천들은 기도할 때 성경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나다나엘은 정통 유대인으로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알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란 말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란 빌립의 말에 혹시 싶어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더구나 잠언은 그들이 늘 즐겨 읽고 외우는 책이기에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가 그 열매를 먹듯이 주를 기다리는 자는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묵상하며 이제나저제나 오실 주님을 기다렸던 듯합니다.
여기서 잠언 27장 18절의 ‘주인’으로 번역된 ‘master’는 히브리 원어로는 ‘아돈’으로 ‘lord’란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 325번 나오는데 대부분 ‘주 lord’로 번역됩니다. ‘주’를 뜻하는 소문자 ‘lord’로는 183번 번역되었고 하나님을 뜻하는 ‘주님’인 대문자 ‘Lord’로는 5번, ‘주인’을 뜻하는 ‘master나 owner’로는 121번 번역됐습니다. 주님과 주인이란 이중 의미가 있는 단어이기에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주님) 이스라엘의 왕(주인)이시나이다!’라고 고백한 부분도 명확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또한 ‘…he that waiteth on his master…’란 표현이 한국 성경에는 ‘자기 주인에게 시종 드는 자’, 즉 주인이 식사한다거나 어떤 사무를 볼 때 옆에 서서 대기하며 시중드는 모습으로 번역된 것을 보고 좀 안타까웠습니다. 아주 잘못된 번역도 아니지만, 그보다는 ‘주를 기다리는 자’가 훨씬 바로 된 번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Wait on’이란 표현이 눈앞에 있는 주인에게 ‘시종 든다’도 될 수 있지만, 눈앞에 없는 주인을 ‘기다린다’라는 표현임을 증명하기 위해, “wait on the lord”란 표현을 성경에서 찾아보니 성경 전체에 딱 3번 나왔습니다. 시편 27편 14절, 시편 37편 34절, 잠언 20장 22절에 나오는데 ‘주님을(여호와를) 기다리라 혹은 바라라’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시 37:34)’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잠 20:22)’
이처럼 잠언 27장 18절을 붙잡고 구약의 말씀에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기다렸던 나다나엘이 때가 차매 비로소 주님을 만났듯이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되어 있는 신약의 말씀을 붙잡고 주님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도 말씀의 약속이 성취되어 다시 오신 주님을 친히 뵙고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날이 언젠간 올 것이며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아는(고전 13:12)’ 날이 곧 올 것을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