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와 입다의 서원

‘하나님의 콜링 없이 자기가 서원해서 목사님이 되었는데 은사가 없을 경우 끝까지 그 길을 가는 것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엄마가 아들을 서원한 경우 아들이 커서 의견이 다를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지난번에 쓴 ‘맹세와 서원의 차이’란 글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서원’이란 단어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으로 오용되기에 혼란이 야기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서원은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시면 제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다’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만약 불치병에 걸린 제 아들을 낫게 해주신다면, 제가 목사로 헌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란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정말 낫게 해주셨다면 사인으로 받고, 목사로 헌신하란 콜링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서원 기도를 통해 누군가 목사가 됐다면 콜링이 있었던 것입니다. 콜링 없이 목사가 된 경우는 ‘서원’이 아닌 ‘맹세’로 간주해야 합니다. 즉 본인이 원해서, 혹은 마음에 오는 어떤 감동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목사로 헌신한 후 그 길을 갔다면 하나님께 ‘맹세’한 경우입니다. 하나님께 한 맹세를 지킨 것은 잘한 일입니다(성경은 그보다 맹세하지 않는 게 더 좋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콜링이 있었던 것까진 아니기에, 질문처럼 ‘은사’가 없다면 하나님께 회개부터 하고 이 길을 계속 가길 원하시는지 여쭤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역으로 부르셨다면 하나님이 감당할 은사도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코멘트에 나오는 엄마가 아들을 서원한 경우란 한나 같은 경우일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한나는 만약 아들을 낳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평생 드리겠으며 아이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나실인의 서원) 서원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아들을 허락하셨고 한나는 사무엘을 여호와 앞에 영원히 있게(삼상 1:22)하고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므로(삼상 1:28) 서원 맹세를 갚습니다. 이런 한나의 헌신을 돌아보신 하나님은 그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삼상 2:21) 더 허락하십니다. 이처럼 부모가 아이를 하나님께 서원하는 경우란, 무작정 ‘우리 아이를 목사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는 차원이 아닌, 하나님 아니면 해결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간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기도의 앞부분을 들어주셨다면 아이를 받기로 하신 것이고 그렇다면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길을 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아니라 부모가 아이를 목사로 만들겠다고 일방적으로 기도한 경우는 서원이 아닌 맹세입니다. 그렇기에 아이가 커서 부모의 뜻을 저버리지 않고 목사의 길을 간다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신 것이고, 아이의 뜻이 달라 다른 길을 갔다면 부모의 기도를 받지 않으신 것이니 이 또한 기도 응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서원 기도의 예는 한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훈훈한 예가 있는가 하면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서원처럼 선뜻 소화하기 힘든 예도 있습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는 첩의 아들로 본처의 자식들에 의해 고향인 길르앗에서 쫓겨나 타향살이를 합니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에 암몬이 쳐들어오자 길르앗 장로들로부터 다시 고향에 와서 우리의 장관이 되어 싸워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입다가 탐탁치 않아 하자 그들은 ‘여호와를 증인 삼아 말하건대 만일 당신이 암몬 자손과 싸워 이긴다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게 해주겠다’고 합니다(삿 11:10). 입다는 싸움을 시작하기 전 암몬에게 사자를 보내 설득해보려고 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if)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 11:29-31)’라는 무시무시한 서원을 합니다. 특히 ‘나를 영접하는 그’라고 인격화된 번역이어서 더욱 섬뜩하게 들리지만, 영어로는 ‘whatsoever cometh forth of the doors of my house to meet me(히브리 원어로는 ‘퀴라’로 마주치다, 만나다, 찾다란 의미)…I will offer it up for a burnt offering.’ 직역하면, 무엇이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랑 마주치는 번제물로 드리겠다. 즉, 내게 속한 모든 소유물은 하나님 것이니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최상급 헌물인 번제물로 온전히 주께 드리겠다는 나름 숭고한 고백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전쟁에 임한 입다의 손에 암몬을 넘겨주시고, 그들을 크게 무찌른 입다는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데, 뜻 밖에도 집 문밖으로 나와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소고를 잡고 춤추며 그를 맞이하러 나온 딸을 본 입다는 자기 옷을 찟으며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삿 11:35)’고 절규합니다. 그러자 딸은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삿 11:36)’란 장엄하고도 숭고한 고백으로 아버지가 하나님께 내뱉은 서원을 존중합니다. 입다와 딸의 대화에서도, ‘서원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고 반드시 갚으라(전 5:4-6, 신 23:21-22)’, ‘네 입술로 어떤 발언을 했든지 너는 반드시 확실히 이행토록 하라(신 23:23)’는 성경 말씀이 묻어져 나옵니다. 또한 ‘어떤 것을 바치기로 경솔히 서원하고 난 후에 그것들을  숙고하는 것은 올무가(덫) 된다(잠 20:24)’는 잠언 말씀은 사사기 때 입다의 서원을 염두에 두신 하나님이 지혜의 책에 적으신 거겠구나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처녀로 죽게 되는 것을 산에 가서 여자 친구들과 함께 애곡할 수 있게 두 달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애곡의 기간이 끝난 후 돌아온 딸에게 입다는 서원한 대로 행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은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곡했다고 나옵니다(삿 11:37-40). 이렇듯 입다와 그 외동딸에 대한 가슴 아프고도 어이없는 이야기는 장엄하고도 숭고한 믿음의 결단과 죽음을 담고 있지만 그 내용 자체는 꽤 단순합니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워서인지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입다의 딸은 액면 그대로의 번제물이 아닌, 시집이 금해진 처녀로 하나님 앞에 평생 살다가 죽었다는 의미의 ‘번제물’로 바쳐진 것이라며 아예 죽음 자체를 부정하는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녀들을 몰렉에게 바치는 것을 가장 혐오하시고 금하셨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 리 없고 그런 번제물을 받으셨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서원을 한 것은 입다이고-물론 어떤 가축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또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서원을 이행한 건 입다와 딸의 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과 결과가 마치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주장하시고 받으신 것밖에 안되는 걸로 생각해서 성경을 채색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입다가 이런 서원을 했을 때는 ‘여호와의 영’이 임한 상태였었다는(삿 11:29) 겁니다. 그렇기에 정말 딸이 번제물로 바쳐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서원을 하도록 감동을 주셨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임한 사람들도 잘못 판단하고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이 임한 후에도 구원은 오직 유대인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다메섹 선상에서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를 이방인의 빛으로(행 13:47) 삼으셨을까요? 베도로는 사도행전 10장에 가서야 이방인 고넬료 일행에게 성령이 직접 임하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같은 선물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방인과 유대인 앞에서 이중적인 행동을 해서 바울에게 질책받는 부분이 나옵니다(갈 2:11-14). 바울 역시도 동역자였던 바나바와 마가를 놓고 크게 싸워 헤어지는 내용이 나오기도 합니다(행 15:36-41).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 혹은 여호와의 영이 사람들에게 임했을 때의 기록을 살펴보면, 어떤 특정 사역을 감당케 하시려는 일시적이고 한정된 기름 부음의 ‘능력’으로서의 임함입니다. 그것은 신약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 안에 영원히 내주하사 그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이끄시는 성령과 구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때 성막 짓는 일을 위해 지명하여 부르신 브살레와 오홀리압에겐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모든 조각하는 일과 세공하는 일’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출 35:30-35). 사사기의 사사들은 ‘적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는 일’을 위해 택하신 후 주의 영으로 충만케 하사 ‘용맹함과 강한 힘’을 부어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사는 동안 백성들도 하나님께 범죄치 않았고 민족도 평안을 누렸습니다(삿 5:31; 8:28, 33). 하지만 주의 영(여호와의 영)은 입다가 그런 서원을 하게끔 도모하시거나 또는 금하시는 인격체로서의 성령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입다가 감정이 격양되고 고무해진 상태에서 즉흥적으로 한 서원이 불러오게 된 의도치 않은 결과까지 하나님과 연관 지어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서원의 후반부가 되는 입다의 책임 부분을 입다가 어떻게 가장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이행했는지에 초점을 둬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배경엔 그 엄중한 책임에 대해 잘 아는 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죽기까지 순종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십자가상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성경은 ‘제 눈에 보기에 선한 대로’ 각자 행하는 ‘왕’도 없고 ‘법’도 없던 암흑시기였던 사사기의 기록 가운데, 만물의 창조주 되시고 만물의 법칙이 되는 하나님께 인간이 자유의지로 이행할 수 있는 최대의 믿음과 순종을 보여준 입다와 그 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사사기 11장에 적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믿음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다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사 믿음의 사람 가운데 기록해 놓으십니다.

다음 글엔 성경에 나오는 맹세의 예를 요나단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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