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아브라함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삼상 18:3)라는 말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눅 17:33을 보십시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보존하리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 성도인 우리는 자기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롬6:6 갈5:24). 성경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의 몸이 죄로 인해 죽었다고 증언합니다(롬8:10, 6:11)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19:19 눅10:27 약2:8)”와 짝이 되는 말씀은 잠19:8 “지혜를 얻는 자는 자기 혼을 사랑하나니 명철을 지키는 자는 좋은 것을 얻으리라.”입니다. 따라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네 이웃을 네 혼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요나단을 향한 다윗, 사울, 백성의 맹세’란 제 글에서 인용됐던 삼상 18:3절(개역개정) 구절이 잘못 번역됐다는 코멘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란 부분을 영어 성경으로 보니 NIV 성경엔 ‘…because he loved him as himself(자기 자신처럼 그를 사랑하여)’이고 킹제임스성경엔 ‘…because he loved him as his own soul(자기 혼같이 그를 사랑하여)’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요나단이 다윗 사랑하기를 자기 생명처럼”이 아닌, 자기 ‘자신’ 혹은 자기 ‘혼’처럼 사랑했다고 바로 번역했다면 요나단의 사랑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but thou shalt love thy neighbour as thyself(레 19:18)” 말씀에 근거한, 계명대로의 사랑임이 드러났을 텐데 싶었습니다.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뜨거운 사랑’ ‘참 벗의 우정’ ‘진정한 전우애’ 등등의 미사여구가 붙여지며 회자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표현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영적인 하늘에 속한 사랑’이었다고 느낄 때 참된 형제 사랑, 더 나아가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오며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깁니다. 내게 유익이 돼서, 내가 끌려서, 나한테 호의적이라서, 날 알아줘서가 아닌, 함께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고 바라는 형제이기에… 하나님께서 너 자신처럼 그를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나의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고 세워주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그런 사랑. 우리 안에 계신 그런 예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를, 그분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기를 소망합니다.

계명대로의 진실하고 참된 요나단의 사랑, 그리고 다윗과 맺게 된 맹세의 언약을 상고하며, 아브라함의 말씀에 근거한 진실한 믿음과 전적인 신뢰도 생각해 봅니다. ‘맹세와 서원의 차이’에서 썼듯이 성경에서 ‘맹세’가 제일 처음 나오는 부분은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혹시라도 네가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고 할까 봐 네 것은 실오라기 하나도 안 갖기로 여호와께 맹세했다는 장면입니다(창 14:22).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첫 맹세는 사람과 사람이 아닌, 사람이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 했던 것입니다. 그가 이런 맹세를 한 이유는 이미 12-13장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축복의 말씀을 신뢰한 탓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친족의 땅인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 인도하신 하나님 축복의 은혜를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아가게 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 후  22장에서 아들 이삭의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14장부터 모든 소유물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그분만이 주인이시란 철저한 믿음의 고백이 밑거름되어 점진적으로 쌓이고 깊어진 탓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에 대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8장 19절에, ‘For I know him, that he will command his children and his household after him, and they shall keep the way of the Lord, to do justice and judgment; that the Lord may bring upon Abraham that which he hath spoken of him’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내가 그를(아브라함) 알기 때문이라. 그가 그 자녀들과 권속(집안)에게 명하여 그를 따르게 할 것이며, 그들이 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여호와의 길을 지켜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 12장에서 아브람을 지목하여 부르셨던 이유는 그가 그 자녀들과 권속에게 명하여 자신을 뒤따르게 하고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앞부분에 나오는 ‘내가 그를 아노라’의 ‘안다’란 단어를 ‘선택’했다로 번역한 번역본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를 알기에 선택하신 것이니 아주 틀린 번역까진 아니겠지만 어원은 ‘안다’는 뜻의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히브리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알기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모든 권속에게 명하여 자신을 따르게 할 것임을 아신다고 하셨는데, 이처럼 나를 따르라고 명령했던 또 한 사람을 신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바울은 ‘Be ye followers of me, even as I also am of Christ:너희는 나를 따르는 자들이 되라,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인 것처럼’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다메섹 선상에서 바울을 직접 만나고 택하사(행 9:15) 부르신(행 9:4)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권속이 된(엡 2:19)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내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여 십자가의 도를 지켜 의와 공의를 행하도록 할 것임을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철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내려놓음은 이스마엘을 내보내는 21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21장을 읽었을 때는 아브라함처럼 야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21장에 펼쳐지는 이삭의 탄생 이후의 내용을 인본주의나 도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상당히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왜냐면 ‘웃음’이란 약속의 아이가 드디어 태어났다는 기대와 흥분도 잠시, 이스마엘이 귀한 이삭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고 엄포놓는 장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종의 아들이래도 이스마엘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 아브라함의 유일한 아들이자 장자로 13살 때 아버지와 함께 언약의 표징인 할례까지 받습니다(창 17). 그런데 어린 이삭을 학대도 아니고 희롱했다고 내쫓으라는 건 사라의 너무한 처사로 여겨집니다. 이 일로 아브라함은 당연히 근심하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2-13)’는 말씀을 듣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창21장 14절)’합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헤매는 가운데 얼마 못 가 물은 떨어지고 아이와 함께 죽을 위기에 처해 우는 하갈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는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8)”는 약속을 직접 주신 후 하갈의 눈을 열어 우물을 보게 하사 살려내십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며 겨우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주었다는 그 말할 수 없는 야박함과 몰인정에 혀를 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늘어나는 재물로 롯과 도저히 같이 있을 수 없어 갈라서야 했을 정도로 갑부였던 그가 지난 17(이삭의 나이가 3-4살이었던 것으로 추정하면)년간 함께 했던 아들을 생모와 함께 정처 없이 보내면서 고작 빵과 물 한 부대 달랑 지워 내몰았다는 사실이 놀라웠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본문을 읽는데, 아브라함의 지독하리만큼 청렴하고 올곧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에 도리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부자이기에 재산 얼마를 때여, 그도 아님 나귀에 식량과 옷가지, 물이라도 잔뜩 실어 내보내는 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니 근심치 말고 사라의 말을 듣고 내보내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신뢰하며 그들에게 달랑 빵과 물 한 부대만을 지워 맨몸으로 내보냅니다. 예전엔 패륜처럼 느껴졌었던 그의 행동이 언제부턴가 ‘내 아들 이스마엘이 앞으로 누리게 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나 아브라함이 실오라기 하나라도 주어 아버지 덕에 부자가 됐다는 말을 듣지 않겠다’라는 지독한 결의로 느껴졌습니다. 내가 아버지기에, 부자이기에,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혹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그것이 내 의가 될까 자제하는 건 더 힘든 일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절제의 열매로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스마엘을 구하시고 지키시고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동안 저는 남을 돕거나 희생할 때 내 공, 내 의, 내 선함을 나타내려고 애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남의 공만 거절하는 게 아니라 자기 공도 세우길 거절하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기 위해 철저히 자기 부인하며 나아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에 깊은 울림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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