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1절과 2절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기에, 어느 한국어 번역본을 보든지 원어로는 1절에 있지만 어쩔 수 없이 2절에 번역해 놓은 단어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완전, 완벽, 성숙, 장성’을 의미하는 ‘teleiotés(텔라이오테이스)’ 와 ‘기초석’을 의미하는 ‘themelion(떼멜리온)’입니다.
1절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복잡하고 또 ‘버리라’고 하니까 갖다 버리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기초 교리를 떠나 이제는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 ‘버리고’로 번역된 ‘aphentes(아펜테스)’는 ‘떠나다, 남겨두다, 버리다, 떠나보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에서 ‘도’로 번역된 단어는 ‘말씀’을 뜻하는 ‘logon(로곤)’입니다. ‘초보’로 번역된 ‘archēs(아르케스)’는 ‘시작, 시초, 처음, 첫째, 으뜸, 대장’을 의미하는데 신약에 27번 나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번역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처음 말씀’입니다.
1절과 2절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기초 말씀이 되는 여섯 가지가 열거됩니다. 첫째는 죽은 행실의 회개.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셋째는 세례들(침례들)의 교리. 넷째는 안수들. 다섯째는 죽은자의 부활.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바로 ‘세례(침례)들의 교리’라고 나오는 부분입니다. 한국어 성경엔 일단 ‘교리’가 ‘교훈’으로 번역되어 있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라고 되어 있어서 앞에 나오는 6가지가 다 교리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에는 ‘교리’라고 붙어 있는 단어는 세례(침례)이지 다른 기초 말씀엔 붙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즉 믿는 자들의 침례는 늘 단수로 쓰이는 데 비해 여기엔 복수로, ‘침례들(세례들)’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저는 ‘침례들(세례들)’이란 복수로 쓰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침례와 유대교 신자들이 이미 받았고, 또 알고 있었던 회개의 침례를 함께 일컬었기에 ‘침례들의 교리’라고 한 것이라는 주석에 동의합니다.
‘침례들(세례들)’이 복수인 것처럼 ‘안수’도 원어는 단수가 아닌 ‘안수들’로 복수입니다. 안수 역시 구약과 신약에 모두 등장합니다. 주로 복을 주거나(창 48:14; 마 19:13), 치유하거나(왕하 5:11; 막 8:23; 16:18), 임직(성직)하거나(민 27:18; 신 34:9; 딤전 4:14), 성령의 은사로 능력을 나눠주거나(행 8:17; 19:6), 하다못해 구약에선 죄를 전가할 때도 쓰였습니다(레 4:15 외). 이처럼 안수하는 행동은 손을 얹는 쪽이 손이 얹힌 쪽으로 복이든, 기적이든, 은사든, 죄든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나오는 ‘죽은자의 부활’ 즉,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기초 신앙으로서 유대교에서도 사두개파들은(막 12:18; 행 23:8)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믿었으며 주님께서도 가르치신 바입니다(요 5:28-29). 다니엘서(단 12:2)와 요한계시록(계20)에도 마지막 때에 있을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활은 6번째의 기초 말씀인 ‘영원한 심판’ 즉 영원한 천국의 삶 또는 영원한 지옥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1절에서 2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음 말씀을 떠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과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 세례(침례)들의 교리, 안수들, 죽은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석을 다시 놓지 말고 완전함(장성함)으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이 구절에서 “빛을 받고”로 번역된 헬라어 ‘phótizó(포티조)‘는 ‘빛나다, 빛을 내다, 빛을 주다’란 의미이지만 어떤 사건이나 미스터리를 ‘밝혀내다(고전 4:5; 엡 3:9; 딤후 1:10)’는 의미로 쓰이며 살아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다, 깨우쳐지다, 조명 받다(요 1:9; 히 6:4, 10:32; 엡 3:9; 시 118:130; 삿 13:8; 왕하 12:2, 17:27; 엡 1:18)”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절의 ‘빛을 받고’란 애매한 해석보다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조명을 받고‘가 더 적합한 번역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로 번역된 헬라어 ‘metochos(메토코스)’는 ‘파트너(동역자)’란 의미인데 성경에 6번 등장하며(6에 대한 의미에 대한 글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 한 번 나오는 걸 빼고는 히브리서에만 5번 나옵니다(눅 5:7; 히 1:9, 3:1, 3:14, 6:4, 12:8). 그런데 ‘성령에 참여한 바’란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독립된 인격체이시며 한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유독 성령님만큼은 인격체가 아닌 ‘연기’와도 같은 취급을 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하나님의 말씀 또한 영이시지만(요 6:63) 그렇다고 우리가 성부와 성자를 인격체가 아닌 어떤 ‘기체’와도 같이 여기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은 바람, 물, 불과 같은 것에 비유되시기도 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성령 또한 성부 성자와 동등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독립된 인격체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에 참여했다’는 본절의 표현에서도 그런 잘못된 생각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were made partaker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partaker’란 ‘같이 동고동락 하는 사람, 참가자, 동역자’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른 번역은 ‘성령의 동역자들이 되었다’입니다. 즉, ‘빛을 받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고’라고 번역을 하면 마치 성령 세례(침례)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할만 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빛을 받고’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참여’는 성령님의 동역자들로 되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발람도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계시를 받았던 선지자입니다. 발람은 좋든 싫든 하나님의 지시를 쫓아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만일 그에게 정말 누구를 저주하고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적극 못하도록 막으셨을까요?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을 ‘주님’으로는 모시지 못하고 맘몬을 ‘주인’ 삼았었기에 이스라엘에게 올무를 놓아 범죄하게 만들고 본인도 패망합니다. 발람에 대한 조명을 적은 두 글의 링크를 걸어놓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발람 1, 발람 2).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번 조명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았으며 그리고 성령의 동역자들로 되었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위의 구절도 괜찮지만 ‘하나님의 선한 말씀’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이 직역입니다. 그리고 ‘내세의 능력’으로 번역된 부분은 영어로는 ‘the power of the coming age(aiōnos)’인데, 어떤 긴 특정 시간대를 의미하는 aión(아히온)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성경에 25번 나오는 이 ‘aiōnos‘란 단어는 신약에서 주로 ‘세상’으로 많이 번역되었고 ‘영원’에 해당하는 긴 시간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과 오고 있는 시대(내세)의 능력 또한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를 원어 중심으로 한 구절 한 구절씩 풀어가기로 한 이후, 가장 큰 반전을 가져다준 구절은 6장 6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 구절은 여러 영어 성경 버전에도 ‘impossible (불가능하다) 혹은 can’t (할 수 없다)’가 들어가 있고 모든 한국어 성경에도(흠정역 포함) ‘불가능하다 혹은 할 수 없다’란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놀랍게도 그런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한 단어 한 단어씩 자세히 살펴보고 주석도 찾아봤는데, ‘불가능하다’란 의미를 넣지 않고는 해석하기 어려워 포함한 것이지 원어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킹제임스 영어 성경 구절만큼은 원어처럼 ‘불가능 혹은 할 수 없다’란 단어를 포함하지 않고 그냥 직역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 또한 가능한 직역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타락’으로 번역된 ‘parapiptó(파라핍토)’란 헬라어 어원은 ‘떨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뒤쳐지다, 실패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떨어져 나간 후에(having fallen away) 다시 새롭게 되려고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드러내놓고 욕되게(모욕) 하는 것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본절에 역시 ‘자주’로 번역된 헬라어 ‘pollakis(폴라키스)’는 ‘자주, 여러 번, 계속해서’란 뜻으로 ‘repeatedly(반복적으로)’란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위에 반복해서 내리는 비를 흡수한 후 그 땅을 가는 자들을 위한 합당한(유용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만“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버림을 당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adokimos(아도키이모스)’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다, 합당치 못하다, 가짜’란 의미여서 주로 ‘쓸모없다, 거절되다, 불합격, 불량품’으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쓸모없는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저주에 가까워서 그 끝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확신하노라’에 쓰인 헬라어 ‘peithó(파이또)’는 ‘설득하다, 자신 있다, 확신하다’란 의미입니다. 개역개정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흠정역 번역이 잘 되어 있어 여기 옮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지만,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시기에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향해 너희가 보여준 사랑, 곧 성도들을 섬겨준 것과 아직도 섬기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부지런함’으로 쓰인 헬라어 ‘spoudé(스푸데이)’는 ‘서둘다, 빨리하다, 부지런하다, 진정성 있다, 성실하다, 적극적이다’란 뜻입니다. ‘나타내어’로 번역된 ‘endeiknumi(엔디케누미)’는 ‘보여주다, 증명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나타내다란 번역 보다는 부지런함을 보여주라고 하는 게 원래 의미에 맞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풍성함’에서 ‘풍성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 ‘plérophoria(플레이로포리아)’는 ‘꽉 찬 보증, 확신, 자신’이란 뜻입니다. 즉 우리는 소망의 꽉 찬 보증을 향해 부지런히, 성실하게, 적극적인 태도로 서둘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어 성경엔 빠져있는 ‘그러나,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제, 지금’으로 쓰이는 ‘de(데)’란 단어를 구절에 넣고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바는 너희 각 사람이 소망의 꽉 찬 보증을 향해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성실함,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위 구절에서 ‘게으르다’라고 쓰인 헬라어 ‘nóthros(노뜨로스)’는 ‘영적으로 둔감하고, 생기 없고, 느리고, 게으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에 ‘본받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mimétés(미메이테쓰)‘는 ‘흉내 내는 사람, 본받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특히 존경하는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에서 따라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흉내 내다 혹은 따라 하다를 뜻하는 ‘mimic’이란 영어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이 단어를 ‘따라 하는 사람, 흉내 내는 사람, 본받는 사람’이란 의미의 ‘imitator’로 번역했고 킹제임스 같은 경우엔 ‘따르는 사람’이란 의미의 ‘follower’로 번역했는데,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따르는 사람보다는 따라 하는 사람이 맞기에 이 경우엔 ‘imitator(본받는 자)’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Biblehub.com이 기본 바탕으로 쓰는 헬라어 성경 원본엔 이 단어가 총 6번 나온다는 것입니다(고전 4:16, 고전 11:1, 엡 5:1, 살전 1:6, 살전 2:14, 히 6:12). 성경 연구를 하다 보면 자연히 숫자의 신비로움까지 함께 발견하게 되고 숫자에도 예민해집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쓰인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가 갖는 의미와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걸 번번이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이 단어가 성경에 6번 나온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었습니다(숫자 6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으시면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완벽한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사람이니까 여섯 번 나올 수도 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가려다가, 이 단어에 대한 여러 자료를 좀 더 찬찬히 살펴보니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바탕으로 쓴 헬라어 원본에는 벧전 3장 13절에도 이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7번(하나님의 완전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이 구절들에 대한 링크를 걸어놓습니다). 이런 순간이, ‘그럼 그렇지!’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잘못 번역하고 이해할 뿐이지 성경은 어떤 면에서도 완벽하며 완전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안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원어와 원본을 쉽게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과 한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몇 번이나 나오는지 쉽게 분석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커다란 은혜의 사건 이후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문명의 이기로 좀 더 쉽고 빠르게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게 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천사가 다니엘에게 했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여기서 ‘지식이 더하리라’고 번역된 부분은 영어 성경이나 원어에 의하면 ‘지식이 매우 증가하리라(rabah, multiply)’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게으르지(둔감하지) 않고 다만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위의 번역도 메시지 전달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어와 단어 구성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그분보다 더 큰 맹세의 대상이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기에”입니다.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위 번역대로 좋습니다.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원어에 좀 더 맞는 번역은 “따라서 그가 오래 인내한 후에 약속을 얻었느니라“입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위의 번역은 메시지 전달이 어색합니다.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더 큰 자를 두고 맹세하며 그들의 모든 분쟁을(다툼을) 맹세의 확증으로(인준으로) 끝내기에“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위의 번역도 괜찮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분의 불변하는 계획(뜻)을 더욱 풍성히 보여주시기를 원하셨기에 맹세로 보증하신 것이라“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18절은 모든 한국어 성경에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번역했고 흠정역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불변하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번역입니다. 분명 ‘이 두 가지 것(사실)’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것만 말한다면 한 가지가 아닌가요? 이런 오류는 원어에 있는 단어들을 제대로 배열해서 번역하지 못했기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원본에는 ‘거짓말하는 게 불가능하시다는 것’과 ‘그로 인해 변할 수 없으시다(불변하신다)는 두 가지 포인트입니다(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안위’로 번역된 헬라어 ‘paraklésis(파라클레이씨스)’는 ‘부르다, 격려하다, 위로하다, 권고하다, 촉구하다’란 의미입니다. 또한 안위 앞에 개역개정은 ‘큰’으로 흠정역은 ‘확고’로 번역한 헬라어 ‘ischuros(이스쿠로스)’는 ‘힘이 강하다, 강력하다, 확고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이는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게 불가능 하시기에 불변하신다는 두 가지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도피한 우리가 강한 위안을(격려를) 얻을 수 있도록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위 구절에 ‘튼튼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asphalés(아스팔레이스)’는 ‘확실한, 믿을 수 있는, 안전한’이란 뜻입니다. ‘견고하여’로 번역된 ‘bebaios(베바요스)’는 ‘단단하다, 튼튼하다, 확실하다’란 뜻인데, 특별히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혼의 닻과 같은 이 소망은 확실하고도 확고부동하여 휘장 안의 그곳으로(지성소)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토록 대제사장이 되신 선구자(forerunner) 예수께서 우릴 위해 들어가신 곳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