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장 원어/영어 분석 1(계1:1-10)

*들어가는 말*

히브리서의 모든 구절과 모든 단어를 원어와 영어 중심으로 일일이 번역하는 일을 마쳤습니다. 이제는 요한계시록을 분석할 것인데, 요한계시록은 히브리서 때처럼 번역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묵시로 제시된 단어의 의미를 성경 안에서 찾아내어 그 뜻을 알아가는 데 초점을 두려고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성경 자체가 사전이란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어떤 사전이나 서적을 참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나오는 모든 구절을 성경에서 뽑아 읽다 보면 성경이 스스로 정의하는 단어의 의미가 명확히 깨달아진다는 걸 번번이 경험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로 주어진 계시임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한 자의적인 해석으로 수많은 이단의 병폐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계 22:7)”라는 말씀처럼 이 책을 사모하고 가까이해야 하는 주의 성도들에게는 금기의 말씀이 돼 버렸습니다. 성경의 결말이 담긴 요한계시록을 분석하는 이 작업이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주를 믿는 성도들에게 복이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본절에 “계시”로 번역한 헬라어 ‘apokalupsis(아파칼룹시스)’는 신약에 총 18번 나오는데 ‘덮여 있는 것을 벗겨내 보여주다’란 뜻입니다. 이 단어는 주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쓰이기에 누가복음 2장 32절의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에서 ‘비추는’은 ‘계시’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즉, 누가복음 2장 32절은 “이방을 위한(eis) 계시(apokalupsis)의 빛이며(kai) 당신의(sou)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이 단어가 쓰인 18개의 구절을 모두 읽어보기 원하는 분들은 단어를 누르면 됩니다). 이 단어는 ‘벗겨내다, 드러내다, 계시하다’란 뜻의 ‘apokaluptó(아파칼룹토)’란 헬라어 어원에서 나왔으며 이 어원은 신약에 총 26번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The revelaltion of Jesus Christ)”란 표현은 본절을 포함해서 킹제임스 영어성경에 총 3번 나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두 구절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8-13)”

베드로전서 1장 13절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로 번역된 부분이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en apokalypsei Iēsou Christou)”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쓰인 3구절을 살펴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복된 소식’이며 ‘구원’이며 ‘은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증거’로 번역한 ‘marturia(마르투리아)’는 ‘증언, 증거, 증인’의 뜻을 모두 담고 있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testimony(테스티모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testimony of Jesus Christ)’은 본절에 1번 나오고 “예수의 증언/증거(testimony of Jesus)”란 표현이 5번 나옵니다(계1:9, 12:17, 19:10(2), 20:4). 그리고 “그리스도의 증거/증언(testimony of Christ)”이란 표현이 한 번 나와서(고전 1:6), 이 3가지를 모두 합치면 총 7번 나오는 셈이 됩니다. 이 7구절을 모두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는 ‘믿음의 증거’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계 20:4) 성도들 안에 있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언(증거)을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예수의 증언(증거)은 예언의 영이라 하더라(계 19:10)”

예수의 증거는 다름 아닌 예언의 영입니다. “예언의 영(spirit of prophecy)”은 유일하게 요한계시록 19장 10절에서 1번 나옵니다.

본절 번역에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하면 마치 요한이 ‘다 본 것’처럼 느껴집니다. 원어로는 ‘자기가 본만큼(hosa eiden) 증언했다’입니다. 어감이 확실히 다릅니다. 요한조차도 다 보았고 다 아는 게 아니라, 그가 본 것만큼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절의 의미는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의 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증언)를 내가 본 것만큼 다 증언(증거)하였노라“란 것입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이란 번역의 직역은 ‘그 안에 기록된 것’입니다.

‘복이 있나니’에서 ‘복’은 ‘makarios(마카리오스)’인데 신약에 놀랍게도 총 50번 나옵니다(성령과 완전한 속량 및 자유를 뜻하는 5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복되다, 행복하다’란 의미의 ‘makarios(마카리오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걸 의미하기에 ‘복’과 ‘믿음’은 연결선상에 있습니다(롬 4:5-7, 14:22-23; 계 14:12, 13). 글자를 누르면 50개구절을 모두 볼 수 있는데 다 한번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복과 기쁨으로 쓰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본절의 ‘때’는 ‘kairos(카이로스)’, 즉 ‘시간, 계절’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time’입니다. ‘적합한 시기, 적절한 때, 기회, 시간’을 의미하며 신약에 총 86번 등장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미리 정해진 때’를 의미하는데 본절에 ‘때가 가까움이라’는 표현이 ‘마지막 때, 말세, 주님의 재림’을 말할 거라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이 아닌 성경의 정의를 알기 위해 성경에서 ‘때가(kairos) 가깝다(engys)’란 표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신약에 총 5번(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왔습니다. 이 5개의 구절을 읽다 보면, 내 말이 아닌 성경이 말씀하시는 ‘때가 가깝다’를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첫 구절은 마태복음 21장 34절입니다. “열매 거둘 때가 가까우매 그 열매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이 구절은 예수님이 드신 비유에 나오는 구절인데, 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가 열매 거둘 때가 가까워서 그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는 장면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때가 가깝다는 것은 결실 즉, 열매를 하나님께 보여줘야 할 때를 말합니다.

두 번째 구절은 누가복음 21장 8절입니다.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이 구절로 우리는 미혹하는 자들이 많을 때,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그리할 때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처럼 “내가 예수다” “내가 하나님이다”라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던 때가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세 번째 구절은 로마서 13장 11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때가 가깝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가깝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러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음란하거나 호색하거나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고 촉구합니다. 왜요? 구원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나를 영원히 속량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토록 함께 거할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넷째 구절은 본절이고 다섯째 구절은 요한계시록 22:10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은 ‘때가 가깝다’는 말로 1장을 열고 ‘때가 가깝다’는 말로 22장을 닫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1-13)”

즉 성경이 정의하는 “때가 가깝다”는 것은 ‘결산과 구원과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받을 때가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미혹하는 무리가 많을 때이며 불의하고 더러운 자들과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들이 극명하게 나뉘는 때입니다.

따라서 본절의 의미를 풀어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은 영원한 속량과 자유의 행복을 누리리니 결산과 구원과 자신이 행한 대로 보상받을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아시아’란 단어는 성경에 총 18번 나옵니다. 1절의 ‘apokalupsis(아파칼룹시스)’도 18번 나온 것을 볼 때 숫자 18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곧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곱 교회’에서 ‘일곱’은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숫자 중 하나입니다. 이런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집회, 회중’을 뜻하는 헬라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의미는 ‘called out from’ 즉, 어떤 것이나 어떤 곳에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내다란 뜻입니다. 또 ‘called out to’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것을 하도록, 혹은 어떤 곳으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냈다란 뜻입니다. 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란 단어를 영어는 ‘church’라고 번역하는데, ‘church’는 ‘주께 속한’이란 의미의 헬라어 ‘kyriakos(큐리아코스)’에서 온 것입니다.

단어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에서 그 단어를 찾아보는 작업을 자주 하기에 예전에 ‘church’를 영어킹제임스에서 찾아봤을 때 총 111구절 나온다는 걸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church’는 신약에서만 나오는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신약 성도들만 ‘교회’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집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을 나누기만 하고, 그 나눠진 것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뿌리는 보지 못한다면 온전한 하나님의 증거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기에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아벨의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다가 11장을 다음 40절의 내용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니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되지(완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라(직역)” 그러니까 창세 이후 하나님을 향한 찬란한 믿음으로 살다 간 성도들을 신약의 성도들이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될 신약의 교회에 대해 로마서 11장 11절에서 31절까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절들을 모두 가져오면 너무 길어서 개역개정으로 요약하지만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구원이 이방인에게 흐르게 함이라. 참감람나무 가지 얼마가 꺾여서 돌감람나무인 너희들이 접붙여져서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은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너희가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스라엘도 믿지 아니하는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며 돌감람나무인 너희들도 접붙임을 받았는데 하물며 원가지인 사람들이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구약과 신약이 분리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분리되어,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나뉜 후에 다시 각 나라 족속 방언으로 번역되어 구약의 ‘회중’은 신약의 ‘교회(church)’가 아니라고 주장할 사람들이 있을 것도 미리 아셨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겨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 7:37-38)”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시킨 이스라엘 회중을 헬라어로 쓰면 도로 ‘ekklésia(에클레이시아)’입니다. 따라서 영어로 번역하면 ‘church’ 즉 교회가 됩니다.

본절에서 요한은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 중에서 특별히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데, “일곱 교회”란 표현은 3구절에 걸쳐 4번 나옵니다(계 1:4, 11, 20(2)).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란 표현도 계시록에서만 나오는데 딱 3번 등장합니다(계 1:4, 8, 4:8). 본절외 두 개의 관련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Lord God Almighty)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따라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Lord God Almighty’ 즉, 전능하신 주 하나님(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절에 나오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아마도 성령이지 않을까 유추할 수 있지만, 이번엔 성경이 정의하는 ‘일곱 영’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일단 “일곱 영”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에서만 본절을 포함해 4번 나옵니다(4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 4:5)”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요한계시록 말씀을 통해 보면 첫째,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계1:4). 둘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3:1). 셋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일곱 등불”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일곱 눈”입니다(계5:6). 특히 이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일곱 영’이란 표현이 왜 세상 및 창조물을 뜻하는 4번 성경에 등장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적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떠한 정교한 프로그램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숫자나 단어나 그 뜻에서 정확하게 떨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번역의 오류에서 오는 것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얻은 정보를 갖고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요한계시록 4장 5절에서 ‘일곱 영’을 뜻하는 ‘일곱 등불’은 또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총 44구절에 걸쳐 50번 나옵니다(창 15:17; 출 25:37(2), 27:20, 30:7, 30:8, 35:14, 37:23, 39:37(2), 40:4, 40:25; 레 24:2; 24:4; 민 4:9; 8:2(2); 8:3; 삿 7:16; 7:20; 삼상 3:3; 삼후 22:29; 왕상 7:49; 왕상 15:4; 대상 28:15(3); 대하 4:20; 대하 4:21; 대하 13:11; 대하 29:7; 욥 12:5, 41:19; 시 119:105, 132:17; 잠 6:23; 13:9; 20:20; 사 62:1; 겔 1:13; 단 10:6; 슥4:2; 마 25:1, 3, 4, 7, 8; 계 4:5; 8:10). 이 또한 놀라운 것이 50은 은혜와 온전한 속량 및 자유의 완전 수이며 성령의 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숫자 5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에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44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계명 및 언약 즉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몇 구절을 예로 든다면 등불은 창 15:17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시 119:105절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며 잠언 6:23절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이 발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란 표현입니다. 즉, 켜진 등불이란 빛을 발하고 있는 등불이란 의미이기에 잠언 6장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와 함께 보아야 하며 50이란 수와 곁들여 구약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즉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5장 6절에서 나오는 “일곱 눈”은 무엇인가입니다. “일곱 눈”이란 표현은 신약에 한 번, 구약에 한 번, 딱 두 번 등장합니다(증언, 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따라서 이 “일곱 눈”은 어린 양에게 있으며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에 있는 것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할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로 신약의 헬라어로 표기된 “예수”와 같습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 및 완성을 의미합니다(숫자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관련 구절들이 갖는 2와 7과 50의 특성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의 의미를 풀어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성령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완전한 속량의 보증이십니다.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전능의 주 하나님(Lord God Almighty)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실 완전한 속량의 보혜사

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4절에 대한 분석을 부지런히 마친 후 5절을 읽다가 4절에서 분석했던 ‘일곱 영’에 대한 내용이 5절에 단편적으로 담겨 있음을 발견할 때(증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격려를 얻습니다. 본절의 ‘해방’은 영어로는 ‘풀려나다’를 뜻하는 ‘release’인데 같은 단어가 희년에(50년) 종들이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고향에 돌아갈 때도 쓰입니다.

본절에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란 표현의 ‘먼저 나시고’는 ‘prototokos(프로토토코스)’입니다. 히브리서 원어 연구에서도 몇 번 다뤘었는데 영어로는 ‘first-born’인 이 단어는 ‘처음 난 것’ 즉 ‘장자, 맏이 또는 맏배’인 ‘첫째’를 뜻합니다. 이 ‘prototokos(프로토토코스)’는 성경에 총 8번 나오는데 8은 새로운 시작, 거듭남, 새 창조, 재생 및 부활을 의미하는 숫자입니다(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본절을 원어 중심으로 직역하면 “죽은 자들의 첫째이자(장자, 맏이) 충성된 증인이시며 땅의 왕들의 으뜸(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입니다. 본절에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란 부분은 원어에는 없습니다.

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본절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된 부분엔 접속사가 없습니다. 그냥 ‘제사장 나라’ 또는 ‘제사장의 나라’란 의미로 직역하면 ‘제사장(hiereis) 왕국(basileian)으로 삼으셨다’입니다(a kingdom priests). 즉, 제사장들로 이루어진 왕국이란 말입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본절을 포함해서 총 3번 나옵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머지 두 구절은 다음과 같은데 개역개정 구절에서 해당 부분의 직역을 괄호처리합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제사장 왕국:kingdom of priests)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6)”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제사장 왕국:kingdom priests)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10)”

그렇기 때문에 4절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성경은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시켰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하신 것입니다(행 7:37-38). 또한 성경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 2:9)”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들(basileion hierateuma)’은 ‘제사장 신분의 왕족’이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인물을 들자면 모세와 다윗일 것입니다. 성경이 “여수룬의 왕(신 33:5)”으로 표현하고 있는 모세는 제사장 직분을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는 헌물 중에서도 특별히 ‘가슴살’을 취했습니다(출 29:22-25; 레 7:29-34; 8:29; 9:21; 10:14-15). 다윗도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베로 만든 에봇을 입고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올 때 언약궤를 맨 레위인들 사이에서 노래하며 춤 췄습니다(대상 15:27).

따라서 본절을 직역한 후 의미를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곧 그의 아버지에게 제사장 왕국으로 만드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대대로 있을지어다 아멘

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는 표현은 직역하면 ‘구름과 함께(meta) 오시나니’라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 주님이 구름을 타고(구름과 함께) 오실 것이란 약속은 성경 전체에 총 7번 나옵니다. ‘인자’라는 표현까지 들어가 있는 구절은 5번이고 본절과 살전 4:17절 처럼 ‘인자’라는 표현은 없지만 주님이 구름과 함께 오시는 것에 대한 내용까지 합치면 7번이 됩니다(단 7:13; 마 24:30, 26:64; 막 13:26, 14:62; 살전 4:17; 계1:7). 구약인 다니엘서 7장 13절에 나오는 ‘구름을 타고’란 표현 역시 히브리어로 ‘구름과 함께(עִם:with)’입니다.

‘구름’이란 표현은 성경에 많이 나올 것 같지만 49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신 4:11; 삿 5:4; 삼하 22:12, 23:4; 왕상 18:45; 욥 20:6, 22:14, 26:8, 35:5, 36:28, 36:29, 36:32; 37:16, 37:21, 38:34, 38:37; 시 18:11, 18:12, 36:5, 57:10, 68:34, 77:17, 78:23, 97:2, 104:3, 108:4, 147:8; 잠 3:20, 8:28, 25:14; 전 11:3, 11:4, 12:2; 사 5:6, 14:14; 렘 4:13; 단 7:13; 욜 2:2; 나 1:3; 습 1:15; 슥 10:1; 마 24:30, 26:64; 막 13:26, 14:62; 살전 4:17; 벧후 2:17; 유 1:12; 계 1:7). 그리고 ‘7×7=49’란 숫자가 나타내듯이 거의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증거하는 주요 역할을 합니다.

구절 몇 개만 들어서 구름의 역할을 설명하면 첫째, 하나님의 힘은 구름 안에 있습니다(시 68:34 Ascribe ye strength unto God: his excellency is over Israel, and his strength is in the clouds). 둘째, 하나님은 구름을 명하셔서 하늘의 문들을 여십니다(시 78:23 Though he had commanded the clouds from above, and opened the doors of heaven). 셋째, 하나님은 구름으로 병거(전차) 삼으시고 바람의 날개 위로 다니시는(걸으시는) 분입니다(시 104:3 Who layeth the beams of his chambers in the waters: who maketh the clouds his chariot: who walketh upon the wings of the wind). 다섯째, 하나님은 회오리바람으로 올라오시며 구름을 병거(전차) 삼으십니다(렘 4:13 구절의 영어 번역은 마치 회오리바람이 전차인 거처럼 오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 원어를 살펴 보고 또 시편 104편 3절을 보면 바람을 통해 이동하시며 구름을 전차로[병거로] 삼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역시 회오리바람과 함께 병거를(전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점을 기억하면 될 것 같습니다(왕하 2:1, 11). 나훔의 구절을 보더라도 하나님은 바람으로 길을 내시고 구름을 발밑에 두십니다(나 1:3 The Lord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and will not at all acquit the wicked: the Lord hath his way in the whirlwind and in the storm, and the clouds are the dust of his feet).

본절에서 ‘찌른’으로 번역된 ‘ekkenteó(에켄테오)’는 두 번 등장하는데 본절과 요한복음 19장 37절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인용한 구절에 쓰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 19:36-37).” 이 예언은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그렇기 때문에 본절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이를 각 사람의 눈이 보게 될 것인데, 십자가에서 예수를 옆구리에 찔림 당하게 했던 자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보고 독자를 위해 애통하듯, 장자를 위해 통곡하듯 할 것이며 땅에 있는 모든 족속도 심판의 증인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애곡하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알파와 오메가’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만 총 4번 나옵니다(계1:8; 1:11, 21:6, 22:13). 그리고 원어에는 ‘시작과 끝(archē kai telos)’이란 표현도 있는데 개역개정엔 빠져 있습니다. 이 “시작과 끝(계1:8, 21:6, 22:13)” 그리고 “전에도 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 올”이란 표현도 요한계시록에서만 각각 3번 나옵니다(계 1:4, 8, 4:8).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란 표현도 계시록에서만 나오는데 딱 3번 등장합니다(계 1:4, 8, 4:8). 본절외 두 개의 관련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Lord God Almighty)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따라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는 ‘Lord God Almighty’ 즉, 전능하신 주 하나님(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전능한 자’란 표현은 히브리어로는 ‘שַׁדַּי(샤다이)’이고 헬라어로는 ‘pantokratór(판토크레토어)’입니다. 영어로는 주로 ‘Almighty’로 번역했는데 구약에 48번 신약에 10번 쓰여서 총 58번 나옵니다(해당 구절들을 모두 읽기 원하시는 분들은 글자를 누르면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Almighty”는 창세기 17장 1절에 처음 등장하는데 99세의 노인인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약속하시며 할례의 언약을 주셨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나 주십니다. ‘Almighty’가 등장하는 구절들을 살펴보면 축복과 번성의 약속으로 만나주실 때도 있고 심판과 진멸의 권능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습니다. 욥기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데 31번이나 나옵니다.

따라서 본절은 “주 하나님이(여호와 하나님)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시작과 끝)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요) 전능한 자라”란 의미입니다. 즉, 구절에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란 의미가 증인을 의마하는 두 번 겹쳐 나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은 ‘예수 안에서(en Iēsou) 환난과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말씀의 단수형은 성경에 총 49번 나옵니다. 늘 경험하지만 늘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입니다. 이 글을 쓰며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을 영어 킹제임스성경에서 찾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처럼 49(7×7)번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으니 말입니다. 두 번의 7이 상징하듯이, 성령의 완전함을 뜻하는 7의 증인, 7의 증거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 쓰인 곳은 삼상 9장 27절로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너에게 보여주겠다고 하는 부분입니다. 구약에 4번 나오는데 주로 예언의 말씀이 선지자들에게 임했을 때 쓰였습니다(삼상 9:27; 왕상 12:22; 대상 17:3; 잠 30:5). 이에 비해 신약에 45번 나오는 “word of God”은 하나님의 예언 및 구약의 말씀으로도 쓰이지만 대부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쓰입니다(막 7:13; 눅 3:2, 4:4, 5:1, 8:11, 21, 11:28; 요 10:35; 행 4:31; 6:2, 7, 8:14, 11:1, 12:24, 13:5, 7, 44, 46; 17:13; 18:11; 19:20; 롬 9:6; 10:17; 고전 14:36; 고후 2:17, 4:2; 엡 6:17; 골 1:25; 살전 2:13(2); 딤전 4:5; 딤후 2:9; 딛 2:5; 히 4:12, 6:5, 11:3, 13:7; 벧전 1:23; 벧후 3:5; 요일 2:14; 계 1:2, 9; 6:9; 19:13; 20:4).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는 직역하면 “예수의 증언”입니다. 이 표현에 대해서는 2절에 자세히 설명했으니 넘어갑니다.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고 의미에 맞게 해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형제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환난과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복음과 예수의 증거인 예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주의 날’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 29구절에 걸쳐 총 31번 나옵니다. 나오는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26번 나오는 구약에는 모두 엄중한 심판의 날이며 원수들에게 복수하시는 진노의 날입니다(사 2:12, 13:6, 9, 34:8; 렘 46:10; 애 2:22; 겔 13:5, 30:3; 욜1:15, 2:1, 11, 31, 3:14; 암 5:18(2), 20; 옵 1:15; 습 1:7, 8, 14(2), 18, 2:2, 3, 14:1, 말 4:5). 그런데 5번 나오는 신약은 도리어 주를 믿는 성도들의 구원의 날이니 은혜의 숫자 5에 걸맞은 소식입니다(행 2:20; 고전 5:5; 고후 1:14; 살전 5:2; 벧후 3:10).

또한 ‘원수들에게 보복하시는 진노의 날’을 뜻하는 ‘주의 날’이 성경에 총 31번 나온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 12장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성해서 쳐죽인 왕들의 이름이 일일이 열거되는데 그 숫자가 정확히 31명이기 때문입니다(수 12:24). 이런 그치지 않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제겐 성경 연구를 지속하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미리 알아서 적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배워서도 아니고 성경 안에서 단어들을 찾고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기에 더욱 생생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 숫자 31의 의미는 ‘원수 갚음’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는 의역이고 직역은 ‘영 안에 있었다(egenomēn en Pneumati)’입니다.

‘나팔’은 히브리어로 ‘שׁוֹפָר(쇼파)’ 또는 ‘יוֹבֵל(요벨)’인데 숫양의 뿔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3절에 처음 쓰이며 성경 전체에 103구절에 걸쳐 총 115번(구약에 104, 신약에 11) 나옵니다.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말고 민수기 10장 8절에 처음 등장하는 제사장들만 불 수 있는 은으로 된 나팔은 히브리어로 ‘חֲצֹצְרָה(캇소쳐로)’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이 두 종류의 나팔이 구별되지만 영어든 한국어든 번역본엔 모두 구분 없이 ‘나팔(trumpet)’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차이와 조명에 대해 적겠습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은 헬라어로 ‘salpizó(샐피드조)’이며 11번 나옵니다(나눔과 심판을 의미하는 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의 용도는 구약과는 조금 다릅니다. 나중에 ‘양각 나팔’과 ‘은 나팔’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적을 때 이 부분도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신약에 나온 나팔의 용도만 적겠습니다. 신약에서 나팔은 속된 사람들에 의해 공지사항이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마 6:2). 그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과 심판의 신호로 나옵니다(마 24:31; 고전 14:8, 15:52; 살전 4:16; 히 12:19; 계 1:10, 4:1, 8:2, 6, 13; 9:14)

따라서 10절의 의미는 “주의 날에 나는 영안에 있었는데 내 뒤에서 나는 나팔처럼 큰 심판의 소리,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음성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11절에 나오는데, 11절부터 20절까지는 다음 편에 적겠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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