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 것들을 나눌 때 한 성령 안에 있고 말씀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서로 얻어지는 유익이 반드시 있습니다. 최근 들어서야 그동안 받았던 깨달음을 본격적으로 글로 남기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덧붙여진 깨달음 몇 개를 적으려고 합니다.
- ‘가룟 유다의 뉘우침과 참된 회개’에 대해 들어온 코멘트입니다.
- 성경이 말씀하시는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메타노이아(μετανοέω [metanoeo])는 양심의 가책에 의한 후회, 심경의 변화로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에피스트레포(epistrepo [ἐπιστρέφω])’는 심경의 변화만이 아닌 행동을 얘기합니다. 악한 길로 가다가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그 가던 길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 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요구하는 구원받을 만한 회개는 [ἐπιστρέφω]에피스트레포입니다.
유다가 마 27:3절에서 한 회개는 헬라어 사본의 단어로는 μεταμεληθεὶς 메타노이아,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단어 입니다. 유다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게 원어의 힘입니다. 저는 킹제임스 영어로 성경을 읽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을 만나면 주석도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원어로도 읽어본 후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뜻을 이해한 구절들이 꽤 많습니다. 그러나 영어로 이해가 돼서 원어까진 찾아보지 않고 그냥 넘어간 구절들이 대부분입니다. 영어로는 마 27:3절이 똑같이 ‘repent (회개)’라고 되어 있어서 그 차이를 이해하려고 깊이 묵상해서 길게 썼던 글이 원어로는 회개가 아닌 뉘우치다는 단어였던 모양입니다.
‘유다가 한 것은 메타노이아이지 에피스트레포가 아니었습니다.’ 한 줄이면 될 내용을 설명하려고 몇 장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헛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그런 묵상을 통해 마태복음 27장 3절의 ‘repented himself’ 즉 ‘자기 스스로 돌이켰다’라는 죽음에 이르는 회개와 주님께로 돌이키는 생명의 회개에 대한 의미를 깊이 묵상하고 그 차이에 대한 깨달음을 적을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꼭 ‘회개, 후회, 그리고 돌아옴의 차이:메타노에오, 메타멜로마이, 에피스트레포‘란 최근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2018년 가을,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계속 새 글을 올리느라 코멘트로 들어온 글까지 일일이 확인하지 못한 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본인도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한다고 하면, 직접 원어를 확인해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갔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예전에 올렸던 글들을 다시 살펴보게 됐고 그 과정에서 위 코멘트를 다시 읽게 되어 원어로 찾아보니 전혀 사실이 아님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아주 잘못된 내용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 반대로 얘기하는 부분까지 있어서 이 글을 교정하는 대신 새 글로 설명하는 게 낫겠다 싶어 썼습니다. 이 코멘트를 제게 보냈던 분은 나중에 이단으로 밝혀졌었고 신천지처럼 교회를 깨뜨리는데 주요 역할을 하며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닌 사람으로 밝혀졌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이런 말씀의 밭에 가라지를 심으며 미혹의 영에 종노릇 하는 사람의 궤변에 속아선 안 되겠다 싶어서 ‘회개 후회 돌아옴의 차이:메타노에오, 메타멜로마이, 에피스트레포’를 썼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무화과 나무의 위선과 예수님의 저주’에 대한 코멘트입니다.
- 무화과 나무가 열매부터 나고 잎이 난다는 것에 대해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순종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늘 이해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라는 마음을 주시거나 음성을 들려주시면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믿음을 주시더라구요. 순종한 다음에 일어나는 결과를 보게 하시면서요.
이 코멘트를 듣는 순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진리가 깨달아져서 나눴었습니다. 아니요. 내가 이해되지 않아도 순종하신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을 나중에 주신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갈 곳을 알지 못한 채 떠나라는 말에 순종해서 떠난 것처럼, 순종은 곧 믿음이고, 열매는 순종 곧 믿음의 행위였네요.
마태복음 21장에 나오는 두 아들의 비유처럼 말입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하자 큰아들은 간다고 하고 안 가고, 작은아들은 안 간다고 했지만 갑니다. 그랬을 때 과연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 거냐고 예수님이 물으시자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은 둘째라고 답합니다. 성경에선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내는 나무로 쓰이는데 왜 그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들처럼 잎이 나고 꽃이 피고 난 자리에 열매가 맺어지는 게 아니라 열매가 나면서 잎이 나는 걸까요? 이제 보니 하나님의 자연 계시였습니다. 열매는 순종(행위)이고 잎은 말(고백)을 뜻한 거였습니다. 큰아들처럼 말만 앞세우고 행위 즉 열매는 없는 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먼저 순종으로 행한 후 오히려 했다고 말하는 존재입니다. 느헤미야처럼 말입니다. 느혜미야는,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달라고’ 여러 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 가운데 거룩히 구별하신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거룩히 구분된 우리 교회가 열매가 먼저여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선물로 받았으니 우리는 이미 성령의 열매가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거 자체가 순종이고 믿음의 행위이고 열매입니다. 그 후에 말로 예수님은 내 구주시라고 고백하는 거지, 믿겠다고 혹은 믿는다고 말만 하고 열매는 없는 게 우리는 아닙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
3. ‘안식일의 거리’에 대한 코멘트들입니다.
- 2000이란 수가 은혜의 수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2000 걸음이 2000 년이라는 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면 우리는 공간에 묶여 있기에 2000 걸음을 걸으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다고 (벧후 3:8) 성경이 말하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히 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day and time은 아무도 모른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년도나 승천하신 년도도 짐작일 뿐이지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