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구름 같이’에서 ‘같이’는 번역자들이 비유라고 생각해서 덧붙진 단어입니다. 직역하면 ‘수많은 증인들의 구름이 우릴 둘러싸고 있다’입니다. 성경은 어떤 내용이 만일 비유라면 비유에 맞는 ‘~같이, ~처럼’이란 부사를 넣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비유도 은유도 아닙니다.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cloud’를 찾으면 147번 나오는데 대부분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이 있고 구약에서도 광야 기간 동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이들을 인도했던 기록이 나옵니다. 변화산에서도 빛난 구름이 3명의 제자를 덮었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7:50; 막 9:7; 눅 9:34-35). 주님이 재림하실 때도 하늘의 구름들과 오십니다(마 24:30, 26:64; 막 13:26, 14:62; 눅 21:27).

‘얽매이기 쉬운’으로 번역한 ‘euperistaton(유페리스타톤)은 ‘쉽게 에워싸는’이란 뜻으로 ‘앞으로 나갈 수 없게끔 주위로 빼곡히 둘러싸인 상태’를 의미하는 ‘euperistatos(유페리스타토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벗어 버리고’로 번역한 ‘apotithémi(애파티때이미)’는 ‘벗다, 옆으로 치워놓다, 내려놓다’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경주를 하며’로 번역한 헬라어 ‘trechōmen(트레코멘) agōna(아고나)’는 ‘경주를 달려야 하리라(should run a race)’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우릴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증인의 구름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우리를 쉽게 얽어매는(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앞에 놓인 경주를 달려야 하리라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본절은 흠정역이 원어와 문법에 맞게 잘 번역했기에 가져옵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보좌) 오른편에(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본절에 빠진 단어가 있는데 원어에는 그냥 ‘너희가’가 아니라 ‘너희의 혼들이(psychais hymōn)’입니다. ‘피곤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kamēte(카메이테)’는 ‘지치다’란 의미이고 ‘낙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ekluó(에클류)’는 ‘기절하다’란 뜻으로 ‘기진하다’를 의미합니다.

‘거역’으로 번역된 헬라어 ‘antilogia(안틸로기아)’는 ‘거부하다, 반박하다, 반대하다, 반역하다’란 의미입니다. ‘생각하라’로 번역한 헬라어 ‘analogizomai(애날로기드조마이)’는 ‘분석하다, 계산하다, 고려하다’란 뜻으로 본절에 딱 한 번 등장합니다. ‘분석’을 의미하는 영어 ‘analyze(에널라이즈)’가 여기서 파생한 단어이기에 그냥 생각하라는 정도는 아닙니다.

본절은 단어 번역뿐만 아니라 특히 문법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너무 길어질 것 같고 따로 설명하지 않은 단어들은 번역한 단어 옆에 가로 처리로 넣겠습니다.

그분이(ton:the One) 자기를 향한(hypo) 죄인들의 거역을 어떻게(toiautēn) 견디어 내셨는지를(인내하셨는지를) 분석하라 이는(hina) 너희 혼들이 지치고 기진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gar)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위 번역 그대로 괜찮습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권하는 것 같이’로 번역한 헬라어 ‘dialegomai(다이얼레고마이)’는 ‘논의하다, 연설하다, 설교하다’란 뜻으로 특히 특정 종교 및 생활 방식을 남이 받아들이도록 전하는 것, 즉, 설파 또는 역설을 의미합니다. ‘권면’으로 번역한 헬라어 ‘paraklésis(파라클레이시스)’는 ‘격려, 위로’를 뜻하며 ‘훈계 및 권고’로 쓰입니다.

여기서 ‘징계’로 번역한 헬라어 ‘paideia(파이다이아)’는 ‘훈육 또는 징계’란 뜻인데, ‘아이를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며 키워내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기에 훈육이 적합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훈육’하면 딱히 ‘징계’의 의미까지 포함한 느낌은 아닙니다. 하지만, 영어만 해도 ‘discipline’이란 단어엔 헬라어처럼, ‘훈육 안에 징계’의 의미가 있습니다.

‘경히 여기다’로 번역한 헬라어 ‘oligoreo(올리고레오)’는 ‘멸시하다, 가벼이 여기다’란 의미입니다. 본절에 ‘낙심’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3절의 ‘eklyou(에클류)’와 같은 단어로 ‘faint’ 즉, ‘기절하다, 기진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들들에게 하듯 너희에게 설파한 훈계(권고) 또한 너희가 잊었도다, 이르시되, 내 아들아, 너는 주의 훈육(징계)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분께 책망 받을 때에 기진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본절에 ‘징계’로 쓰인 단어 역시 5절의 ‘훈육 또는 징계’를 뜻하는 ‘paideia(파이다이아)’입니다. 번역에 빠진 접속사를 넣고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훈육(징계)하실 뿐만 아니라(de)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는 번역이 어떻게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훈육(징계)을 인내하라(참으라)’입니다. 본절은 문법도 잘못되어 있습니다. ‘훈육’을 ‘징계’로 번역해도 상관없지만, 다른 부분이 잘못 번역이 되어 있어 원어대로 고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아들들처럼 대우하시니 훈육을(징계를) 인내하라(참으라) 아버지가 훈육하지(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징계는 다 받는 것이다’라고만 하면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본절에 빠져 있는 단어가 있는데 ‘동역자, 동참하는 사람, 참여하는 사람, 나누는 사람, 참가자’ 등을 뜻하는 ‘metochos(메토코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6번 나오는데 히브리서에서만 5번 쓰입니다(원어를 누르면 나오는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들을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de) 모두가(pantes) 참여하는 훈육이(징계가) 만일 너희에게 없다면 너희는 사생아들이요 아들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징계하여도’로 번역한 헬라어 ‘paideutas(파이듀타스)’는 ‘선생님, 트레이너(훈련시키는 사람), 훈육 또는 징계하는 사람’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영어로는 ‘trainer, discipliner’ 하면 그만일 텐데 한국어에는 적합한 단어가 없습니다. 아쉬우나마 ‘훈계자’로 쓰려고 합니다. ‘모든 영’에서 ‘모든’은 삽입이 된 단어이고 대신 ‘영’이 복수인 ‘영들’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더 나아가(eita)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들을 훈계자로(징계자로) 뒀었어도(eichomen) 그들을 공경했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잠시’는 ‘oligas(올리가스) hēmeras(헤이메라스)’인데 직역하면 ‘며칠간’입니다. ‘뜻대로’라고 번역한 헬라어 ‘dokoun(도쿤)’은 ‘의견대로, 보이는 대로, 생각대로’란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들을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men) 그들은 며칠간 자기 의견대로(보이는 대로) 우리를 훈계하였지만(징계하였지만) 그분은 우리 유익을 위해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시키고자 하심이라(eis)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무릇’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모든’을 의미하는 ‘pasa(파사)’입니다. ‘즐거워 보이다’로 번역한 헬라어 ‘dokei(도케이) charas(카라스)’는 ‘기쁘게 보이다(seems of joy)’란 뜻입니다. ‘연단 받은’으로 번역한 헬라어 ‘gegymnasmenois(게짐내스메노이스)’는 헬라어 어원 ‘gumnazó(굼내드조)’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운동하다, 연마하다, 단련하다’란 의미인데 특히 벌거벗거나 최소부위만 가린 채 트레이닝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인들은 주로 이런 극심한 방식으로 힘써 트레이닝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gymnasium(Gym:체육관)이 여기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보다는 ‘의의 화평한 열매(peaceable fruit of righteouness)’가 더 문법에 맞습니다. 그리고 ‘맺느니라’로 번역한 헬라어 ‘apodidōsin(아포디오신)’은 ‘~내다, 생산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자들은’이 아니라 주어는 ‘징계(훈육)’이기에 ‘자들에게(tois:to those)’가 문법상 맞습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들을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de) 모든 징계는(훈육은) 그 당시에는 기쁘게 보이지 않고 슬프게 보이지만 이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단련된) 자들에게는 의의 화평한 열매를 내느니라(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본절은 흠정역 번역이 더 맞기에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늘어진(pareimenas)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본절에 ‘길’은 ‘trochias(트로키아스)’ 즉, 복수형입니다. ‘어그러지다’로 번역한 ‘ektrepó(엑트레포)’로 ‘길에서 벗어나다, 돌아서다, 어그러지다, 뼈가 어긋나다, 피하다’란 의미입니다. ‘저는 다리로’라고 번역한 헬라어 ‘to(토) chōlon(콜론)’은 ‘절름발이(the lame)’란 명사입니다. 또한 본절에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단어 중엔 ‘그뿐만 아니라(de:however)’와 ‘도리어(mallon:rather)’란 단어가 있습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들을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의 발을 위해 곧은 길들을 만들지니 이는(hina) 절름발이가 어그러지지(어긋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고침을 받게(낫게) 하려 함이라

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본절에서 ‘사람’은 삽입된 단어입니다. 또한 ‘따르라’로 번역한 ‘diōkete(디오케테)’는 ‘쫓다, 추격하다, 박해하다, 핍박하다’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단어이지 그냥 ‘따라가는(follow)’ 정도가 아닙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와 더불어 화평과 거룩을 추구하라(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본절 번역에 빠져있는 헬라어 ‘episkopountes(에피코폰테스)’는 ‘관찰하다, 주의 깊게 살피다, 감독하다, 보살피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를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서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한 그릇 음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brōseōs(브로세오스) mias(미아스)’는 ‘한 끼(one meal)’를 의미합니다. ‘망령된’으로 번역한 헬라어 ‘bebélos(베베일로스)’는 ‘부적절하고 불온한 태도’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세속적인(worldly)’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음행하는 자나 한 끼를 위해 자기의 장자권을 판 에서처럼 세속적인 사람이 없도록 하라

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어받으려고’로 번역한 헬라어 ‘klēronomēsai(클레이로노메이세이)’는 ‘상속받다’이며, 이 단어 앞에 ‘원하다’란 의미의 ‘thelōn(뗄론)’이 있는데 본절에는 빠져있습니다.

‘버린 바가 되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거절당하다’란 뜻의 ‘apedokimasthē(아페도키마스떼)’입니다. ‘회개할 기회’로 번역한 헬라어 ‘metanoias(메타노이아스) topon(토폰)’은 ‘회개의 기회’입니다. ‘metanoias(메타노이아스)’는 신약에 총 22번 나오는데 모두 ‘회개’로 번역됐고, ‘topon(토폰)’은 대부분 ‘장소, 곳, 자리’를 의미하지만 ‘기회’를 의미하기도 해서 그렇게 번역한 구절들도 여럿입니다. ‘얻지 못했다’로 번역한 헬라어 ‘ouch(우크) heuren(헤우렌)’은 ‘못 찾았다’입니다.

따라서 본절을 빠진 단어를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후에 그가 복을 상속받기 원하였지만 거절당했으며 그것을 눈물로 구했지만 회개의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gar)”

18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본절에 ‘산’은 원어엔 없지만 삽입된 것입니다. ‘침침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zophō(조포)’는 ‘어둡다, 암울하다’란 의미인데, 특별히 느낄 수 있는 종말론적인(apoclyptic) 어둠, 즉 지옥의 암울함을 뜻합니다. 성경에 총 5번 나오는데 단어를 눌러 모든 구절을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 판단됩니다. 이 단어는 열 가지 재앙 중 9번째 재앙인 ‘어둠의 재앙’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출애굽기 10장 21절에 애굽 땅에 임했던 흑암은 ‘느껴질 수 있는’ 혹은 ‘만져질 수 있는’ 어둠이었다고(darknesss which may be felt) 성경은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어로는 본절에 있지만 한국어 문법상 다음 구절로 갈 수밖에 없었던 단어는 ‘다다르다, 이르렀다’를 의미하는 ‘proselēlythate(프로셀레이라이따테)’와 ‘아니다’를 의미하는 ‘Ou(우)’입니다.

본절을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은 어둠과 흑암과(캄캄함과) 폭풍과

19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구하였으니’로 번역한 헬라어 ‘parētēsanto(파레이테이산토)’는 ‘피하다, 간곡히 거절또는 거부하다, 핑계 대다, 변명하다, 양해를 구하다’를 뜻하는 ‘paraiteomai(파라이테오마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팔의 소리와 말씀하시는 음성에 이른 것이 아니니라 그것들을 들은 자들은 자기들에게 더는 말씀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거부했으니

20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들어가면’으로 번역한 헬라어 ‘thigē(띠게이)’는 ‘만지다, 닿다, 손을 대다’를 의미입니다.

문장에 빠진 단어들을 모두 넣고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짐승이라도 그 산에 닿게 되면 돌로 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라(gar)

21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본절 그대로 좋습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본절에 ‘이른 곳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18절의 ‘다다르다, 이르렀다’를 의미하는 ‘proselēlythate(프로셀레이라이따테)’입니다. 이 단어 역시 원어로는 본절에 있지만 한국어 문법상 다다음 구절로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이처럼 있지도 않은 단어를 넣어야 합니다.

따라서 한국어 문법에 맞게 다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들과

23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기록된’으로 번역한 헬라어 ‘apogegrammenōn(아포게그램메논)’은 ‘등록되다, 기재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라고 번역했는데 그렇게 하면 교회와 장자들의 모임이 별개인 것 같습니다. 문법상 바로 된 번역은 ‘장자들의 교회 모임’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영어로는 ‘firstborn’인 헬라어 ‘prototokos(프로토토코스)’를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이 단어는 ‘맏이, 맏배’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인데, 한국어에는 사람과 동물의 ‘처음 난 것’을 모두 포함해서 일컬을 수 있는 한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쉬우나마 ‘첫째들’이라고 하는 게 제일 나을 것 같다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모임’으로 번역한 헬라어 ‘panēgyrei(파네이가이레이)’는 성경에 딱 한 번 등장하는 단어로 ‘축제 또는 집회’를 의미합니다. 특히 종교적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광장 같은 곳에 모여 축하하는 집회(assembly)를 말합니다. ‘만민’으로 번역된 헬라어 ‘pantōn(팬톤)’은 ‘모든, 모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 기재된(등록된) 첫째들(맏이들)의 교회 집회(축제)와 모두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위 번역 그대로도 괜찮지만 문법에 좀 더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뿌린 피에 이르렀느니라

25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본절에 ‘경고’로 번역된 헬라어 chrématizó(크레이마티드조)’는 특별히 신적 경고를 뜻하며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나 주의를 받았다’로 쓰입니다. 영어로는 ‘warned(경고하다/받다)’ 혹은 ‘admonished(충고하다/받다, 주의를 주다/받다, 훈계하다/받다)’로 번역됐습니다. 본절에 이 단어가 두 번 등장하는 것처럼 번역됐지만(땅에서 경고하고 하늘에서 경고한 것처럼) 이해를 돕기 위해 넣은 것이지 원어엔 한 번만 나옵니다.

‘거역’으로 번역한 헬라어 ‘paraitēsēsthe(파레이테이세이스떼)’는 1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두렵다며 더는 자기들에게 말씀하시지 말라고 간곡히 거부했다(거절했다)로 쓰인 ‘paraiteomai(파라이테오마이)’란 원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19절의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말씀 듣기를 거부하지 말라는 것과 연결선상에 있는 구절입니다.

‘피하지 못하였다’로 번역된 헬라어 ‘ouk(우크) exephygon(엑세파이곤)’은 ‘도망치지 못했다’입니다. ‘배반’으로 번역한 헬라어 ‘apostrephomenoi(아포스트레포메노이)’는 ‘돌아서다’란 의미입니다. 또한 본절 번역에 빠져 있는 ‘poly(폴리) mallon(말론)’은 영어로는 ‘much more’ 즉, ‘훨씬 더, 더욱더’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시는 분을 거부하지 말라 훈계하신(경고하신) 이를 거절했던 그들이 땅에서 도망치지 못하였다면 하늘로부터 그분에게서 돌아서는 우리는 훨씬 더하니라

26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진동’으로 번역한 헬라어 ‘saleuó(살레우오)’는 ‘뒤흔들다, 흔들다, 무너트리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본절에 빠진 단어를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에는 그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이르시되, 아직(Eti) 한 번 더 내가 땅뿐만 아니라 하늘도 뒤흔들리라 하셨느니라

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본절에 빠져 있는 헬라어 ‘dēloi(데일로이)’는 ‘보여주다, 나타내다, 드러내다, 선포하다’란 의미입니다. ‘영존’으로 번역된 헬라어 ‘meinē(메이네이)’는 ‘남다, 머물다’란 의미입니다. ‘만드신 것들이’로 잘못 번역된 헬라어 ‘hōs(호스) pepoiēmenōn(포포이에이메논)’은 ‘~처럼(as), ~같이(like), 마치 ~처럼(as if)’를 의미하는 ‘hōs(호스)’와 ‘만들어진’을 의미하는 ‘pepoiēmenōn(포포이에이메논)’입니다. 원어대로 직역하면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입니다.

‘변동’으로 번역한 헬라어 ‘metathesis(메타띠이씨쓰)’로 성경에 딱 3번밖에 나오지 않는데(단어를 누르면 3구절 모두 볼 수 있습니다) ‘metatithemi(메타티떼미)’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옮기다, 바꾸다, 떠나다’로 번역되며 에녹이 옮겨진 히브리서 11장 5절에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옮기다, 이동하다’로 번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아직 한 번 더’가 나타내는 바는 흔들리는 것들을 이동시켜 마치 만들어진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게 하려 함이라

28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경건함’으로 번역한 헬라어 ‘eulabeia(율라베이아)’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기쁘시게’로 번역한 ‘euarestós(유아레스토스)’는 ‘받으실만한, 흡족한’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받을 우리에겐 은혜가 있으니 이것으로 우리가 경외심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하게(흡족하게) 섬길지니

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본절을 빠진 단어들을 넣고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또한(kai)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라(gar)”

히브리서 11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2)

다음 내용은 히브리서 11장 21절에서 40절까지입니다.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죽을 때에’로 번역한 헬라어 ‘apothnēskōn(아포뜨네이스콘)’은 정확하게는 ‘죽음이 임박한 상태, 죽어가는 중’이란 뜻입니다. ‘지팡이’로 번역한 헬라어 ‘rhabdos(라브도스)’는 ‘지팡이, 막대기, 권위의 막대, 홀(scepter:왕권을 상징하는 막대)’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놀랍게도 신약에 총 12번 나옵니다(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뜻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단어는 그 단어의 뜻과 어울리는 숫자만큼 등장한다는 걸 수없이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할 때마다 여전히 놀랍고, 성경은 사람의 머리로는 쓸 수 없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책이란 생각을 합니다.

또한 본절에 ‘그 지팡이’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지팡이 앞에 정관사 ‘the’가 붙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헬라어 ‘autou(오토)’는 본절에선 ‘그의(of him)’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의지하여’란 단어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된 것입니다. 그래서 직역은 ‘그의 지팡이 머리맡에서(epi:on to:the akron:uppermost) 경배하였으며’입니다. 이번에 원어로 번역하다가 늘, ‘야곱이 자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해서 요셉에게 경배했다’고 생각했던 문장이, 어쩌면 ‘야곱이 요셉의 지팡이 머리맡에서 요셉에게 경배했다’란 의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지팡이로 쓰인 ‘라브도스’가 왕의 홀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단어가 요한계시록에서 재림의 주님과 주님의 성도들이 철장으로 다스린다고 할 때 쓰입니다(계 2:27, 11:1, 12:5, 19:15).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들을 축복하고 그의 지팡이 머리맡에서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21절에서 ‘죽을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와 본절의 ‘임종시에’로 번역된 헬라어는 다른 단어입니다. 본절의 ‘teleutōn(텔레우톤)’은 ‘완성하다, 끝마치다, 죽다’란 뜻의 ‘teleutaó(텔레우타오)’란 어원에서 파생했습니다. 신약에 총 13번 나오는데 모두 ‘죽었다’로 번역되며 본절에선 ‘죽었을 때에(when he died)’란 뜻이기에 ‘임종시에’로 번역한 것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떠날 것을 말하고’에서 ‘말하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기억나게 하다, 상기시키다, 기억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mnémoneuó(네이모뉴오)’에서 파생한 ‘emnēmoneusen(엠네이모뉴센)입니다. 또한 ‘명하였으며’로 번역된 헬라어 ‘entellomai(엔텔로마이)’는 ‘명령하다, 지시를 내리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나감에 대해 상기시켰고 자기 뼈들에 대해 명령했느니라(지시를 내렸느니라)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숨겨’로 번역된 헬라어 ‘ekrybē(에크리베이)’는 피동사로 ‘숨겨졌다’입니다. ‘명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diatagma(디에태그마)’는 ‘법령, 칙령, 포고령’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태어났을 때 그의 부모에 의해(hypo) 석 달 동안 숨겨졌으니 그들이 그 아이가 아름다운 것을 보았으며 왕의 칙령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dioti)”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장성하여’는 ‘장성하게 되어(megas genomenos)’라고 하는 게 문법에 맞습니다. 또한 ‘공주’로 번역된 단어는 ‘딸’을 의미하는 ‘thygatros(띠가트로스)’ 입니다. ‘칭함 받기를’이라고 해도 되는데 ‘legesthai(레게스따이)’는 ‘불려지다, 불리게 되다(to be called)’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게 되어 바로의 딸의 아들로 불려지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위 구절은 흠정역에 이미 원어와 문법에 맞게 번역이 되었기에 그대로 가져옵니다.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본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로 되어 있는 부분은 그냥 ‘그리스도의’입니다. ‘수모’로 번역된 헬라어 ‘oneidismos(오나이디스모스)’는 ‘비난, 비방, 욕을 먹다, 매도당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욕’이란 표현이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상 주심을’로 번역된 헬라어 ‘misthapodosia(미스때포도시아)’는 어떤 일, 혹은 행동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기에 ‘상과 벌’ 모두에 쓰이는 단어로 ‘보상’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약에 3번 나오는데 모두 히브리서에서 등장합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바라봄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apoblepó(아포블레포)’는 ‘오직 하나를 집중해서 바라보려고 다른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기에 ‘주시하다’가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이집트의 보화들보다 그리스도의 모욕을 더 큰 재물로 여기며 그 보상에 주시했기 때문이라

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노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thumos(뚜모스)’는 ‘격노, 격정, 분노’를 뜻합니다. ‘참았으며’로 번역된 헬라어 ‘kartereó(카르테레오)’는 ‘인내하다, 견디다, 참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에굽을 떠났으니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이를 보는 것처럼 인내했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예식을 정하였으니’란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원어로는 ‘pepoiēken(페포이에이켄)’으로 ‘지켰으니’입니다. ‘장자’로 번역된 헬라어 ‘ta(타) prōtotoka(프로토토카)’는 ‘the firstborn’인데, 한국어로 표현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이 단어는 ‘맏이, 맏배’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인데, 한국어에는 사람과 동물의 처음 난 것을 모두 포함해서 부를 수 있는 한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장자’로 번역해도 되지만, 출애굽 사건에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가축의 첫배도 죽임을 당했었기에 그냥 ‘첫째’로 표현하는 게 제일 무난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유월절과 피의 뿌림을 지켰으니 이는 그 첫째들을 멸하는 자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육지 같이’라고 해도 되지만 헬라어 ‘xēras(제이라스) gēs(게이스)’는 ‘마른 땅’이란 표현입니다. ‘시험하다가’로 번역된 헬라어 ‘peira(페이라)’는 ‘시험하다, 시도하다’란 뜻으로 쓰이는데 신약에서 본절과 36절에, 딱 두 번 등장합니다(나눔과 증인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에서는 에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다 죽었고 36절에서는 믿음의 사람들이 조롱당하고 옥에 갇히는 시험을 당했으니 이 단어도 2가 갖는 이중적 의미에 맞게 등장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을 건너듯 건넜으나 에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본절에서 특이한 점은 주어가 사람이 아닌 여리고 성벽이란 것입니다. ‘도니’로 번역된 헬라어 ‘kyklōthenta(키클로뗀타)’는 ‘둘러싸여진 후(having been encircled)’란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의 성벽은 칠 일 동안 둘러싸여진 후에(포위당한 후에) 무너졌느니라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평안히’로 번역된 헬라어 ‘eiréné(아이레이네이)’는 ‘평화, 화평’이란 의미입니다. 원어에는 ‘meta(메타) eiréné(아이레이네이)’로 되어 있는데 ‘with peace’, 즉 ‘화평으로’란 의미입니다. ‘영접하였으므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dexamenē(덱사메네이)’는 ‘받아들이다’란 의미입니다. 또한 ‘순종하지 아니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apeithēsasin(애페이떼이사신)’은 신약에 14번 등장하는 ‘불순종하다’란 뜻의 ‘apeitheó(애피떼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화평으로 받아들인 창녀 라합은 불순종한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본절 그대로도 괜찮지만 ‘및’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te(테)’는 ‘both(둘 다)’란 뜻으로 ‘A뿐만 아니라 B’를 의미합니다. 그 부분만 고치고 빠진 접속사를 더하고 또 없는 단어를 빼서 다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뿐만 아니라 사무엘 그리고 선지자들에 대해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나라들을 이기기도’로 번역된 ‘katēgōnisanto(카테이고니산토) basileias(바실레이아스)’는 ‘왕국들을 정복했다’입니다. ‘행하기도 하며’로 번역된 ‘ergazomai(에르가드토마히)’는 ‘일하다, 거래하다, 행하다’는 뜻으로 특별히 어떤 수고를 동반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받기도 하며’란 표현은 수동적이지만 헬라어 ‘epitugchanó(에피이퉁카노)’는 ‘어떤 목표를 달성하다, 어떤 목적을 이루다, 취득하다, 얻다’란 의미기에 상당히 능동적입니다. 또한 본절에 쓰인 동사들은 모두 단순 과거형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왕국들을 정복했으며 의를 행했고 약속들을 이뤘으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고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세력’으로 번역된 헬라어 ‘dunamis(두나미스)’는 ‘능력, 힘, 권력’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신약에 총 120번 등장합니다. ‘멸하기도 하며’로 번역한 헬라어 ‘sbennumi(스벤누미)’는 ‘끄다, 억누르다, 좌절시키다, 꺾다, 깨트리다’란 의미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문장은 ‘parembolas(파렘볼라스) eklinan(에클리난) allotriōn(알로트리온)’인데 직역하면 ‘외국군대들을 도망치게 했다’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불의 능력을 꺾기도 하며 칼날들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서 용맹하게 되어 외국군대들을 도망치게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받아들이기도 하며’라고 번역한 헬라어 ‘Elabon(엘라본)은 ‘갖다 혹은 받다’란 뜻의 ‘lambanó(람바노)’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얻고자’로 번역한 ‘tugchanó(퉁카노)’는 ‘맞히다, 특히 과녁을 맞히다’란 뜻으로 ‘어떤 것에 도달하다, 얻다’란 의미로 쓰이며 신약에 총 12번 나옵니다.

‘어떤 이들’로 번역된 헬라어 ‘allos(앨로스)’는 ‘다른, 또 다른, 또 하나, 더’란 의미로 특별히 ‘같은 종류의 하나 더’를 의미합니다.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않았다’에서 ‘구차히’란 표현은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된 단어입니다. 헬라어 ‘apolutrósis(아폴루트로시스)’는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성경에서 ‘구원, 구출, 속량’으로 번역하는데 총 10번 나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원하다’로 번역된 ‘prosdechomai(프로스데코마이)’는 ‘기대하다, 바라다, 기다리다, 받아들이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인들은 자기들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았을 뿐만 아니라(de) 또 다른 이들은 더 좋은 부활에 도달하기 위해 풀려나기를 바라지 않고 고문당했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또’라고 번역한 ‘de(데)’는 ‘그리고, 이제, 또한, 뿐만 아니라, 그밖에’란 여러 의미로 쓰입니다. 본절엔 ‘그밖에’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다른 접속사로 쓴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시련’으로 번역된 헬라어 ‘peira(페이라)’는 ‘시험하다, 시도하다’란 뜻으로 앞선 29절과 본절에 딱 두 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밖에 또 다른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과 더불어(eti)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위 구절 그대로도 좋습니다. ‘환난’으로 번역한 헬라어 ‘thlibó(뜰리보)’는 ‘억압당하다, 억눌리다, 환난당하다’란 뜻이기에 ‘환난’으로 써도 되고 ‘억압’으로 써도 됩니다.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감당하지 못했다’로 번역한 ‘ouk(욱) axios(엑시오스)’는 ‘아무 가치가 없다’란 의미입니다. ‘광야’로 번역한 헬라어 ‘erémia(에레미아)’는 ‘외딴곳, 광야’란 뜻으로 ‘사막 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버려진 땅’으로 쓰이며 신약에 총 4번 나옵니다(세상을 의미하는 숫자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 광야와(사막과)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고(떠돌았고)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본절에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는 ‘증언하다, 증명하다’란 뜻의 ‘martureó(마르투레오)’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martyrēthentes(마르티레이뗀테스)’로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영어로는 ‘obtained a good report(좋은 평가를 얻다), commended(칭찬받다), gained approval(승인/인정받다)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다 믿음을 통해(dia) 인증을 얻었으나 그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아니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chōris(코리스) hēmōn(히몬)’은 ‘우리가 없이는(without us, apart from us)’입니다. ‘온전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teleiōthōsin(텔레이오또신)’은 ‘완성하다, 끝내다, 완벽하다, 완전하다’란 의미의 ‘teleioó(텔라이우)’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못하게’로 번역한 것은 너무 적극적으로 막는 느낌인데, ‘(메이)’는 ‘않게, 않도록’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문법과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니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되지(완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1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1)

다음 내용은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hupostasis(후포스타시스)’는 히브리서 3장 1절에 ‘본체’로 번역됐고 3장 14절에서는 ‘확신’으로 번역됐던 단어입니다(이 구절들의 바른 의미는 히브리서 1장 연구히브리서 3장 연구의 링크를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의 뜻은 ‘보증, 실체, 본질’입니다.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 ‘elegchos(엘렝코스)’는 ‘증거, 증명, 시험해보다’란 의미인데 특히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확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에서 ‘보이지’로 번역된 헬라어 ‘blepomenōn(블레포메논)’은 ‘보다, 쳐다보다’란 의미의 헬라어 어원 ‘blepó(블레포)’에서 나왔는데 피동사입니다. 따라서 ‘보여지다(being seen)’로 번역해야 합니다.

따라서 빠진 단어를 넣고 문법에 맞춰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de)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여지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진들’로 번역된 헬라어 ‘presbuteros(프레즈부테로스)’는 ‘장로’를 의미합니다. 산하드린 공회나 교회의 장로들을 일컫는 단어로 ‘장로교’를 의미하는 ‘presbyterian(프레즈비테리안)’이 이 단어에서 파생됐습니다. 본절에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는 ‘증언하다, 증명하다’란 뜻의 ‘martureó(마르투레오)’에서 파생한 ‘emartyrēthēsan(이마르터리티산)’입니다. 영어로는 ‘obtained a good report(좋은 평가를 얻다), commended(칭찬을 받다), gained approval(승인/인정을 받다)로 번역됐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던 것처럼 장로들도 믿음으로 승인(증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빠진 단어들을 넣고 원어와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안에서(en tautē) 장로들이 승인(증명을)받았기 때문이라(gar).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모든 세계’로 번역된 헬라어는 ‘tous(투스) aiōnas(아히오나스)’인데, 영어로는 ‘the world, the universe’로 번역했습니다. 물론 세계나 우주로 번역해도 되겠지만 히브리서 1장 2절에서 설명했듯이 헬라어 어원 ‘aión(아히온)’은 시공간을 나타내며 복수형인 aiōnas(아히오나스)’는 ‘시간대(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연대, 순환들’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복수형은 신약에 총 32번 등장하는데, 주로 ‘영원(ever, forever)’, ‘때(ages)’로 번역됐고 ‘세상’으로 번역된 것은 유일하게 히브리서 1장 2절과 본절 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번역을 처음 시작할 때 aiōnas(아히오나스)’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고민했었습니다.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었는데 다시 한번 같은 단어를 놓고 고민해보니 어떤 시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안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마디가 있는 시간의 순환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한국어로는 ‘세세대대(世世代代)’란 표현이 가장 가까울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문/영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세세대대’를 ‘age after age’로 정의해 놓았기에 이 의미가 aiōnas(아히오나스)’와 제일 근접하다고 판단이 됩니다. 따라서 약 5개월 전에 썼던 히브리서 1장 원어 분석의 1장 2절을 지금의 깨달음에 맞춰 그 부분만 교정합니다.

또한 그 당시에 히브리서 1장을 쓰면서 깨달았던 것을 여기에도 덧붙이자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공간과 시간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계신 분이지만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 시공간은 아들을 통해 만드신 겁니다. 이 부분이 깨달아지자 계시록에서 ‘더 이상 시간이 없게 될 것이다(there should be time no longer:)’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었습니다(계10:6). 언젠가는 계시록 마지막 장처럼, 특정 기간을 위해 형성된 지금의 시공간은 사라질 것이며 시간이 없는 영원 세계가 펼쳐질 것입니다.

‘지어진’으로 번역한 헬라어 ‘katērtisthai(카테이르티스따이)’는 ‘완성하기 위해(to complete), 준비하다(prepare)’란 뜻의 ‘katartizó(카타르티조)’란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우리가 아나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noeó(노에오)’인데 ‘인지하다, 인식하다, 감지하다, 깨닫다’를 뜻하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blepomenon(블레포메논)’은 1절처럼 ‘보다, 쳐다보다’란 의미의 헬라어 어원 ‘blepó(블레포)’에서 나왔는데 피동사입니다. 따라서 ‘보여지는 것(being seen)’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타난 것’으로 번역한 헬라어 ‘phainomenōn(파이노메논)’은 ‘드러내다, 나타나다’란 의미의 어원 ‘phainó(파이노)’에서 파생한 단어로 역시 피동사입니다.

‘된 것이 아니라’에서 ‘된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존재하게 되다, 출생하다, ~이 일어나다, ~이 되다’란 의미의 ‘ginomai(기노마이)’에서 파생한 ‘gegonenai(게고네나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세세대대가(이 시공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된(완성된) 것임을 인식하나니(깨닫나니), 보여지는 것들은 나타내진(가시적인) 것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본절에서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희생 제물’을 뜻하는 ‘Thysian(띠씨안)’이며 단수형입니다. 신약에 총 11번 나오는데 11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증거’로 번역된 헬라어는 ‘증언하다, 증명하다’란 뜻의 ‘martureó(마르투레오)’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emartyrēth(이마르티레이뜨)’입니다. 영어로는 ‘obtained a good report(좋은 평가를 얻다), commended(칭찬받다), gained approval(승인/인정받다)로 번역합니다.

‘그 믿음으로써’에서 ‘믿음’은 덧붙여진 단어이고 원어엔 ‘그것(autēs)을 통해(di’)’, 혹은 ‘그것으로써(그것으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으나 아직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히 믿음을 통해 그렇다는 건지 더 나은 희생 제물을 통해 그렇다는 건지, 그도 아니면 승인받은 것을 통해 그렇다는 건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하지만 문맥 상 ‘희생 제물/예물’을 통해 지금도 말하고 있다가 맞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도’로 번역한 ‘eti(에티)’는 ‘아직도, 계속해서, 지금도’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희생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통해(di’) 의로운 자라는 승인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dōrois)에 대하여 증언하시며 그가 죽었으나 그것을 통해(di’) 아직도(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로 번역한 헬라어 ‘ouch(우흐) hēurisketo(히우리스케토)’는 ‘그를 찾지 못하다(he was not found)’ 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증거’는 2절과 4절처럼 ‘증언하다, 증명하다’란 뜻의 ‘martureó(마르투레오)’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memartyrētai(메마르티리타이)’이며 영어로는 ‘obtained a good report(좋은 평가를 얻다), commended(칭찬받다), gained approval(승인/인정받다)로 번역됐습니다.

‘기쁘시게 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euarestēkenai(유아뤠스티케나이)’는 ‘매우 기쁘게 하다, 큰 즐거움이다’는 의미의 ‘euaresteó(유아뤠스테오)에서 파생한 단어인데 과거형이지 현재진행형이 아닙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고 그를 찾지 못하였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셨기 때문이라(dioti). 옮겨지기 전에 그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흡족하게) 했다는 승인을 받았기 때문이니(gar)”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 주시는 이심을’로 번역한 헬라어 ‘misthapodotēs(미스따포도티스) ginetai(기네타이)’는 ‘he becomes a rewarder’ 즉, ‘보상자가 되신다’입니다. 한국말로는 ‘보상자’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보상하는 분이 되신다’라고 해도 되지만 그냥 ‘보상자’로 쓰려고 합니다.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de)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흡족하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분이 계시다는(존재하신다는) 것과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는 보상자가(a rewarder) 되심을 믿어야 하느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본절도 1절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으로 번역된 부분이 피동사인 헬라어 ‘blepomenōn(블레포메논)’이기에, ‘보여지다(being seen)’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고하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chrēmatistheis(케리마티스떼이스)’는 특별히 신적 경고를 뜻하는 단어로 신약에 총 9번 나오는 chrématizó(크레이마티드조)’라는 원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나 주의를 받았다’로 번역되었고 영어로는 ‘warned(경고하다/받다)’ 혹은 ‘admonished(충고하다/받다, 주의를 주다/받다, 훈계하다/받다)’로 번역됐습니다.

‘경외함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eulabeomai(율라베호마히)’는 ‘eulabés(율라바스)’에서 파생한 단어로 ‘하나님을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따른다’는 의미지만 일반적으로는 ‘조심하다, 신중하다’를 뜻하며 성경에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경건하다’로 쓰입니다.

‘준비하여’로 번역한 헬라어 ‘kataskeuazó(카타스테우아조)’는 ‘준비하다(예비하다)’란 뜻인데 ‘짓다, 건축하다, 만들다, 준비하다(예비하다)’란 의미로 쓰이며 성경에 총 11번 나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여지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를(주의를)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에 의한(믿음에 따른)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장래의’란 단어는 삽입한 단어입니다. 본절에 ‘유업’으로 번역된 헬라어 ‘kléronomia(클레이로노미이아)’는 ‘유산 혹은 상속’을 의미하는 ‘inheritance’이기에 ‘유업’으로 잘 번역한 것입니다. 유업이란 의미가 조상이나 누군가가 남겨준 것을 물려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단어가 나오는 히브리서 1장 4절과 9장 15절에는 모두 ‘기업’으로 번역했더니 이번엔 그래도 ‘유업’으로 번역했습니다. 이런 일관성 없는 번역은 일반 성도들이 성경 공부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그렇기에 영어를 볼 수 있는 분들은 그나마 제일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한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참고하길 바라고 혹시 원어도 볼 수 있다면 힘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원어로 보는 게 제일 좋습니다.

‘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장소, 곳’을 뜻하는 ‘topon‘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다’로 번역한 것은 약간 뉘앙스가 이상합니다. 마치 본인이 갈 바를 몰라 헤매는 느낌이지만 원어는 ‘(not) epistamenos(knowing) pou(where) erchetai(he is going)’으로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입니다.

따라서 빠진 단어를 넣고 원어와 문법에 충실히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자 순종하여 유업으로 받게 될 곳으로 나아갈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나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방의 땅’으로 번역된 헬라어 ‘allotrian(알로트리안)’은 ‘다른 이에게 속한’이란 뜻으로 ‘이방(foriegn:타국, 외국), 낯선(strange, stranger)’이란 의미로 주로 쓰입니다. 이 단어에 ‘땅’이나 ‘나라’의 개념이 확실히 포함된 건 아니지만 ‘안에’란 단어와 함께 쓰였기에 ‘땅이나 나라’라는 개념이 삽입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땅이라고 번역하면 원어의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아브라함이 이주한 곳은 어차피 이방인의 땅이었는데,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머물렀다’는 표현이 과연 맞나? 싶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약속의 땅이기에 자기 땅인 것처럼 살 수도 있었지만, 남에게 속한 것처럼, 외국인으로 거류했다는 의미입니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문장은 ‘synklēronomōn(싱클레로노몬) tēs(티스) epangelias(에판겔리아스) tēs(티스) autēs(오티스)’로 ‘동일한 약속의 공동 상속자(joint-heirs of the same promise)’입니다.

‘장막’으로 번역된 ‘skéné(스케네)’는 문맥에 따라 성막 또는 장막으로 번역됩니다. 히브리어에는 모세의 성막(mishkan:미쉬칸)과 사람들이 집으로 사용하던 장막(ohel:오헬)을 일컫는 뚜렷한 단어가 있지만 헬라어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의 땅에서 타국(외국)에 있는 것처럼 거류했으며 동일한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계획하시고’로 번역한 헬라어 ‘technités(테크니테이스)’는 ‘공예자, 장인, 설계자, 건축자’를 의미하는 명사입니다. ‘지으실’로 번역한 헬라어 ‘démiourgos(데이메우르고스)’ 역시 ‘건축자, 제작자, 창조자’란 의미로 역시 ‘장인’을 의미하는 명사입니다.

또한 ‘터’로 번역된 헬라어 ‘themelious(떼멜리우스)’는 신약에 16번 나오는 ‘기초에 속한, 기초석’을 의미하는 ‘themelios(떼멜리오스)’의 파생어입니다. 본절에 쓰인 형태는 복수형으로 신약에 딱 2번 나오는데 본절과 요한계시록 21장 14절인데 다음과 같습니다.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계 21:14)”

즉, 히브리서의 이 구절은 요한계시록 21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의 12 기초석이 있는 도시(예루살렘 성)을 그가 바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나타내는 12에 대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그가 기초석들이 있는 도시(성)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 설계자와 건축자는 하나님이시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의역을 한 것이고 헬라어로는 ‘para(파라) kairon(카이론) hēlikias(헤일리키아스)’인데, 직역하면 ‘적정 나이가 지나’입니다. 또한 본절에 사라가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로 번역했는데, 그렇게 번역하면 마치 하나님을 믿은 사라가 “나도 잉태할 수 있어!”라며 스스로 힘을 얻은 것처럼 읽힙니다. 그렇지만 원어로는 ‘씨를(spermatos:seed) 잉태하는(katabolēn:conception) 능력(힘)을(dynamin:power) 붙잡았다(elaben:took)’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잉태하는 능력을 믿음으로 잡았다(가져갔다, 취했다)는 것입니다.

‘미쁘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pistos(피스토스)’는 ‘신실하다, 신뢰할만하다, 믿을만하다’란 의미입니다. ‘알았음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hēgēsato(히기사토)’는 ‘이끌다, 생각하다, 고려하다, 여기다’란 의미의 ‘hégeomai(헤이게오마이)’란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약속하신 이를 신실한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적정 나이가 지났어도 씨를 잉태하는(수정하는) 능력을 붙잡았고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러므로’로 번역된 헬라어 ‘dio(디오)’는 ‘그렇기에, 그러므로’란 의미입니다.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에서 ‘후손’은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된 단어이지 원어에는 없습니다. ‘생육’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태어났다(egennēthēsan)’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허다하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태어났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위 번역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환영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aspasamenoi(아스파사메노이)’는 ‘환영하다, 맞이하다, 인사하다’란 의미의 ‘aspazomai(아스파조마이)’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즉, 손님 같은 사람들을 반가이 맞아들이며 인사하는 것 같은 개념입니다. 또한 외국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xenos(제노스)’로 ‘foriegn(외국, 낯선), foreigner(외국인, 타국인), guest(손님)’이란 의미입니다. 나그네로 번역된 헬라어 ‘parepidémos(파레피데이모스)’는 ‘낯선 곳(타국)에 잠시 머무는 사람’이란 의미이기에 그냥 나그네보다는 ‘거류민’으로 번역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증언’으로 번역한 헬라어 ‘homologeó(호몰로게오)’는 ‘같은 말을 하다, 동의하다’란 뜻으로 ‘고백하다, 선포하다’란 의미로 쓰이는데 특별히 히브리인들은 ‘찬양하다, 기념하다, 축하하다’란 의미로 썼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좀 더 맞춰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다 믿음을 따라(Kata)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맞이하며) 이 땅에서 자신들은 외국인(타국인)과 거류민임을 선포하였으니(고백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위 구절 그대로도 괜찮습니다. ‘본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patrida(파트리다)’는 ‘조국, 본국, 고국’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본절을 복수형 처리하고 문법에 좀 더 맞게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이같은 것들을 말하는 것은 본향(본국)을 찾고 있음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본절에 ‘나온 바 본향’으로 번역된 헬라어 ‘aph’(애프) hēs(헤이스) exebēsan(엑세베이산)’은 ‘어디에서 그들이 나왔었는지(from where they came out)’입니다. ‘생각하였더라면’으로 번역한 헬라어 ‘ei(에이) mnémoneuó(네이모뉴오)’는 ‘기억하고 있었더라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진실로(men) 그들이 어디에서 나왔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그들에게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더 나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kreittón(크레이톤)’은 ‘더 낫다, 더 좋다, 더 훌륭하다, 더 강하다’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절에 ‘본향’은 15절처럼 삽입된 단어입니다. 원어엔 ‘epouraniou(에푸라니우)’ 즉, ‘하늘의 것(heavely one)’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직역은 ‘dio(그렇기에) ouk(않는) epaischynetai(부끄러워하지) autous(그들을) Theos(하나님), Theos(하나님) epikaleisthai(불리시려고:to be called) autōn(그들의)’입니다. 즉, 한국어 문법에 맞게 정리하면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시려고”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de)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하늘의 것을 사모하니 그렇기에 그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시려고 그들을 위해 한 도시(성)를 준비(예비)하셨느니라.

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특별히 어떤 단어가 잘못 번역된 건 아니지만 어순에 따라 어감이 좀 다릅니다. 또한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에서 ‘자로되’는 말이 되게 하기 위해 삽입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문법에 따른 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고(올려 드렸고) 그 약속들을 받았기에 독생자를 드렸으니(올려 드렸으니)”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이미 말씀하시기를’로 번역된 헬라어 ‘elalēthē(엘라레이떼이)’는 ‘말하여졌다’는 피동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들었다”로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손’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씨, 자손’을 의미하는 ‘sperma(스퍼마)’입니다. ‘칭할 자’로 번역한 헬라어는 ‘klēthēsetai(클레이떼이세타이)’로 ‘부름받게 될 것(will be called)’이란 미래형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씨는 이삭 안에서 부름을 받게 될 것이란 말씀을 들었던 자라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본절은 직역하면 문장이 부드럽지 못하고 부연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그렇지만 원래 목적이 ‘직역하겠다’였기에 이해를 돕는 설명은 가로처리하겠습니다.

일단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란 번역은 의역이고 직역은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실 수 있는’입니다. 또한 ‘생각한지라’로 번역한 헬라어는 ‘logisamenos(로지사메노스)’인데 그냥 생각 정도가 아니라 ‘논리적인 근거에 따라 추론하는 것’으로 논리적인 사고로 분석한 후에 이른 생각을 말합니다. ‘비유컨대’로 번역한 헬라어는 ‘parabolē(파라볼레이)’로 ‘비유’라는 명사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자로부터 능히 일으키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추론(분석)을 했던 그가(아브라함) 거기에서(hothen) 또한 그를(이삭) 비유로 받았고.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장차 있을 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어나려고 하는, 일어날’이란 뜻의 ‘mellontōn(멜론톤)’입니다.

믿음으로 이삭은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으며

God of Numbers:2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나눔(분리), 또는 증인(증언, 확증)’을 의미하는 숫자 2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서 2를 만든 경우엔 ‘나눔, 분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에 같은 하나가 덧붙여진 경우엔 오히려 ‘확증, 증인(증언)’을 의미하기에 숫자 2는 그 뜻조차도 이중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 1:6-8). 같은 물이었지만 하늘 위, 하늘 아래 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물이 창조 때 나뉘었다면 땅이 나뉜 시기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הָאָ֔רֶץ(하아레스)’로 ‘땅, 지구’란 의미이며 창세기 1장부터 구약에 총 93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10장에서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던 시기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던 일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뉘었지만 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2가 갖는 ‘나뉨과 증언’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떤 일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을 악용한 악인들은 두 가짜 증인들을 내세워 의인이었던 나봇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신 17:6, 19:15; 왕상 21:10, 13; 마 18:16, 26:60;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계 11:3).

성경은 두 인물이나 사건을 대조해서 선과 악,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룻과 오르바, 한나와 브닌나,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유다와 북이스라엘, 나봇과 아합,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두 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굽을 심판하실 때 에굽 땅과 고센 땅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분리)하셨습니다(출 8:23). 롯 역시 두 천사에 의해 소돔에서 분리됩니다(창 19장).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을 입습니다(엡 4:22-25).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2가 갖는 나뉨의 의미를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마 7:13-14).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7:17-18).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의 집과 어리석은 자가 지은 모래 위의 집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마 7:24-27). 또한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안가고, 안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는 두 아들(마 21:28-31).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집 밖에 있는 맏이에 대한 비유도 그러합니다(눅 15:11). 예수님은 또한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한쪽을 미워하고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한쪽을 경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4:40-41).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은 육체를 따라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약속을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로 나뉩니다(갈 4:22-26).

성경엔 두 종류의 부활도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어떤 부활에 속하냐에 따라 두 개의 다른 심판석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은 상급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지만(고전 3:10-15; 고후 5:10), 나머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석 앞에 나타납니다(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두 번의 죽음을 겪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히 9:27)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수치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단 12:2)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20:14-15). 그러나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을(단 12:2)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계 20:6).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6).

요셉의 때에 바로가 꿨던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나타내는 두 번의 꿈도 이런 2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꿈의 내용은 7년 흉년과 7년 풍년으로 나뉘어 있는 동시에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꾼 것은 그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창 41:32)”이란 의미로 겹쳐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명의 인물이나 사건을 덧붙이는 것을 통해 성경은 악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증인을 세웁니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완연했던 악을 증거합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경배하러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단과 벧엘에 세운 두 마리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우상숭배를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의 증인은 나답과 아비후, 발락과 발람, 아합과 이세벨, 빌라도와 헤롯,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 증인들은, 엘닷과 메닷(민 11:26),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두 번 정탐꾼을 보냅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기에 12명을 보내지만 이들 중 2명만(갈렙과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게 되는 말기에는 아예 2명만(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은 비느하스와 갈렙이었습니다) 보내는데 이들은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과 크신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 안나와 시몬, 바울과 바나바,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증인들로 짝을 지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에 패역한 세대였던 바리세인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부터 왔던 남방의 여왕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입니다(마12:41-42).

예수님의 12제자 중 선두그룹에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형제로 짝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선포하려고 내보내셨을 때에도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누가복음 10장).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보냈던 동물들이 둘씩 짝지어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악한 세대의 멸망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리란 약속도 주십니다(마 18:19).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었습니다(눅 9:30-31).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도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란 증언을 줍니다(행 1:10-11).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2 증인이 나옵니다(계 11장).

성막을 제조할 때 주요 성분이었던 금과 조각목은(출 25-27) 예수님의 신성(금)과 인성(조각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도 증언을 뜻하는 두 개의 돌판에 주셨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긍휼의 자리)와 순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양쪽 끝에 있던 두 그룹도 언약의 증인입니다(출 25:18-20). 레위기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하나는 속죄헌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레 5:7).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몸에 일곱 번 뿌린 후 들에 놓아줍니다(14:4-7). 또한 속죄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해 제비를 뽑습니다(레위기 16장). 여호와를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의 것으로 뽑힌 염소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전가한 후 아사셀의 것으로 광야에 놓아줍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날인 오순절에 올리는 ‘고운 밀가루에 누룩 넣은 빵 두 덩이(레 23:17)’도 2가 갖는 이중적인 의미에 충실합니다. 유일하게 누룩 넣은 빵을 올릴 수 있는 풍요와 감사를 상징하는 오순절의 빵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지만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합작이며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동역으로 지어집니다(왕상 5:18). 솔로몬이 성전 입구에 세웠던 두 놋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란 뜻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인데, 이 두 기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예표합니다.

4 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마태복음엔 이런 두 증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명의 귀신 들린 자들(마 8:28)과 두 명의 장님들(마 9:27, 20:30)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불신에 눈 멀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2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또한 성경은 구약을 ‘율법자와 선지자’ 둘로 함축해 일컫기도 합니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행 13:15, 24:14, 28:23; 롬 3:21). 성경엔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을 약 7년 전쯤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받은 조명과 깨달음은 ‘이름을 두 번 부르심’이란 글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이신 ‘성자’ 예수님은 특별히 숫자 2의 특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두 가지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증언 및 증인에 대한 특징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땅에서 난 첫째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시며(고전 15:4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계 3:14). 예수님이 두 번 반복해서 쓰셨던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을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찾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자신이 은혜의 법, 즉 성령의 법(5*5)의 증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증오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선상에서 쏟아내신 ‘물과 피’로 ‘속죄와 정결’의 온전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분하셨습니다(겔 16:4; 엡 5:26; 히10:22).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던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 중엔 ‘paroxusmos(파록수스모스)’와 ‘hekousiós(헤쿠시오스)’가 있는데 ‘분리와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맞게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등장합니다. 이런 걸 발견할 때마다 성경의 위대함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원어 연구 2탄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2)

다음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21절에서 39절까지입니다.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위 구절 그대로 괜찮습니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맑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katharos(카따로스)’는 ‘깨끗하다’는 뜻으로 ‘깨끗하다, 순수하다, 때 묻지 않았다, 순결하다, 바르다’는 의미입니다. ‘참 마음’에서 ‘참’으로 번역된 헬라어 ‘aléthinos(알레이띠노스)’는 ‘참, 진실, 진짜, 진심’이란 의미입니다. ‘완전한 믿음’에서 ‘완전’으로 번역된 헬라어 ‘plérophoria(플레이로포리아)’는 ‘꽉 찬 보증, 확신, 자신’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에서 벗어났고 몸은 순수한(깨끗한) 물로 씻겼으니 믿음의 꽉 찬 보증 안에서(충만한 확신 안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23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미쁘시니’로 번역된 헬라어 ‘pistos(피스토스)’는 ‘신실하다, 신뢰할 수 있다, 믿을 만하다’는 의미입니다. ‘도리’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homologia(호모로기아)’입니다. 앞선 히브리서 3장 1절에 쓰인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에서 ‘믿는 도리’로 쓰인 단어입니다. 동의하다, 고백하다, 자백하다’는 의미로 특히 신앙고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움직이지 말며’로 번역된 헬라어 ‘aklinés(아크리네스)’는 ‘굽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결단을 못 내리고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림 없이 소망의 고백을 굳게 잡고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본절에 ‘돌아보아’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katanoeó(카타노에오)’입니다. ‘숙지하다, 고려하다, 분별하다’는 의미인데, ‘생각을 집중해서 고정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 ‘…대제사장이시며 사도이신 예수를 깊이(주의 깊게) 생각하라’에서도 쓰인 단어입니다. 본절에 ‘선행’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름답다, 선하다, 고귀하다’란 뜻의 ‘kalos(칼로스)’와 ‘일, 행위’를 뜻하는 ‘ergon(에르곤)’입니다. ‘ergon(에르곤)’은 단수이지만, 문맥에 따라 영어로는 복수로도 자주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본절에 ‘격려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paroxusmos(파록수스모스)’는 일반적인 격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자극하다, 분발시키다, 흥미나 관심을 불러일으키다’란 의미며 ‘도발하다, (화나 짜증을) 유발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신약에 딱 두 번 나오는데, 본절과 사도행전 15장 39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다툰 후 갈라섰을 때 쓰인 단어입니다. 한번은 좋은 의미로 한번은 나쁜 의미로 쓰였으니 이 단어야 말로 숫자 2가 갖는 ‘나눔’의 의미를 잘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숫자 2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본절은 그냥 성도가 서로를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고, 성도가 서로 주의 깊게 관찰하여 사랑과 선한 일에 이르도록 다투듯이 격렬하게 자극하란 의미입니다. 마치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뒤쳐지는 사람들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급박하고 강렬하게 다그치며 따라오게 하거나 안되면 부축해서라도 뛰는 그림을 그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은 그냥 느긋하게 ‘좋은 게 좋은 거지’하는 구절이 아닌 단어의 특성상 긴장감과 급박함이 도는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로 숙지하여 사랑과 선한 일에 이르도록(eis) 자극하되(분발시키되)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 ‘episunagógé(에피순네고게이)’는 ‘함께 모이는 것, 집회, 집합, 모임’이란 뜻입니다. ‘폐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egkataleipó(에그카탈리포)’는 ‘(좋은 의미에서) 남겨두다, 혹은 (나쁜 의미에서) 저버리다’란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로 번역된 헬라어는 ‘tisin(티신)’은 ‘일부(some)’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습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ethos(에또스)’는 ‘관례, 관습, 풍습, 습관’이란 뜻인데 주로 율법에 따른 관례를 뜻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몇몇의(일부의) 관례(습관)처럼 우리의 집회(함께 모이는 일)를 저버리지 말고 서로 권면하여 그날이 다가옴을 볼수록 더욱더 그리하자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 오늘 오신다고 해도 전혀 뜻밖이지 않을 시기이기에 주님의 군사로 모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훈련장으로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본절에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되어 있는데 원어로 직역하면 그냥 ‘진리의 지식’입니다. ‘짐짓’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hekousiós(헤쿠시오스)’인데, ‘자발적으로, 기꺼이,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짐짓’이란 단어로는 뜻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습니다. 영어로는 ‘willingly’라고 하고 신약에 두 번 쓰였는데, 본절과 배드로전서 5장 2절입니다. 역시 악한 일을 할 때와 선한 일을 할 때 쓰였기에 ‘나눔, 분리’라는 의미를 갖는 2의 특성에 맞습니다. 그 해당 부분을 1절부터 6절까지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밷전 5장 1-6절)”

즉 교회의 장로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마지 못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적극적으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또 더러운 이득을 위해서도 아니요,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하는) 자세도 아니요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면 목자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영광의 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즘 이단 교주들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팔아 이적을 행하며 성도들을 착취하고 군림했던 것을 볼 때,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입장이기에 말씀을 쫓아 다시 허리띠를 동여매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듭니다.

또한 젊은이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질서에 따라 장로들에게 순종하며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면 때가 될 때 높여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본절에 ‘속죄하는 제사’로 번역된 부분은 원어로는 ‘peri(페리) hamartiōn(하마르션) thysia(띠씨아)’ 즉, ‘죄들을 위한 희생 제물’입니다. 즉, 그런 고의적인 죄를 속죄할 수 있는 희생제물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후에 우리가 자발적으로 기꺼이 죄를 지으면 이상 죄들을 위한 희생 제물이 남아 있지 않으니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오직’으로 번역된 헬라어 ‘de(데)’는 ‘그러나, 이제, 그리고, 하지만’이란 의미입니다. ‘무서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phoberos(포베로스)’는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ekdoché(엑도케이)’는 판사로부터 내려질 심판이 피고인에게 선고되기까지의 기다림, 즉 대기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맹렬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zelos(제일로스)’는 ‘열심, 뜨거움, 열정, 질투’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신약에 16번 나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그런 자들이(tis)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하게 두려운 심판과 대적들을 삼키게 될 맹렬한 불이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모세의 법을 폐한 자’에서 ‘폐한’으로 번역한 헬라어 원어는 ‘atheteó(애떼테오)’입니다. ‘파기하다, 무시하다, 무효화시키다, 멸시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는데, 본절은 법적인 계약 관계를 얘기하고 있기에 ‘파기하다’로 표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자든지(tis) 모세의 법을 파기하면 두세 증인으로 인해 긍휼 없이(chōris) 죽었거늘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로 번역된 헬라어 ‘koinos(코이노스)’는 원래 ‘평범하다, 보통이다’를 뜻하는 단어지만, 히브리인들은 ‘불경스럽다, 부정하다, 모독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마치 프랑스어의 ‘마담’이란 단어가 결혼한 여성을 높여 부르는 ‘부인’이란 단어지만 한국에 들어와서는 다방 주인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되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koinos(코이노스)’란 단어는 신약에 14번 나오는데, 대부분 부정하다, 불경하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을 평범한 것으로,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것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고 부정하게 대하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욕되게’로 번역된 헬라어 ‘enubrizó(에누브리조)’는 ‘모독하다, 모욕하다’는 의미입니다. ‘무겁겠느냐’로 번역된 헬라어 ‘cheirón(카이론)’은 ‘더 형편없는, 더 나쁜, 더 심한’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히 구별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평범하게) 여기며 은혜의 (성령) 모독한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심할지 너희는 생각해 보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본절에서 고칠 부분은 딱 한 자입니다. ‘말씀하신 것을’로 번역된 부분은 ‘말씀하신 분을(ton eiponta)’로 번역하는 게 맞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분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빠져 들어가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empiptó(엠핍토)’는 ‘던져지다, 빠지다, 떨어지다’란 의미입니다. ‘무서울진저’는 27절에도 쓰인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하는 ‘phoberos(포베로스)’입니다. 본절 번역은 흠정역이 더 나아서 가져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 안으로 떨어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로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본절에 ‘전날에’로 번역된 헬라어는 ‘proteron(포로테론) hēmeras(히메라스)’는 ‘지나간 날들’ 혹은 ‘지난 날들’이란 의미입니다.

‘빛을 받은 후에’에서 ‘빛’으로 번역된 헬라어 phótizó(포티조)는 ‘빛나다, 빛을 내다, 빛을 주다’란 의미이지만 어떤 사건이나 미스터리를 ‘밝혀내다(고전 4:5; 엡 3:9; 딤후 1:10)’는 의미로 쓰이며 살아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다, 깨우쳐지다, 조명 받다(요 1:9; 히 6:4, 10:32; 엡 3:9; 시 118:130; 삿 13:8; 왕하 12:2, 17:27; 엡 1:18)”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번에 10장을 번역하며 보니 적어도 흠정역은 같은 단어가 쓰였던 히 6장 4절은 그냥 ‘빛을 받고’로 번역했었지만 본절만큼은 ‘조명을 받은 뒤에’로 번역했음을 알게 됐습니다.

‘고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고난, 고통‘을 뜻하는 pathéma(패띠마)입니다. ‘싸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athlésis(애뜰리시스)’는 ‘대회, 시합, 경쟁’을 의미하는 ‘contest’란 뜻입니다. 특히 고난과 시험으로 씨름하며 싸우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운동 경기(영국에서는 육상 경기)를 뜻하는 영어 ‘athletics’와 운동선수를 뜻하는 ‘athlete’이 여기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생각하라’로 번역된 헬라어 ‘anamimnéskó(아나밈네스코)’는 ‘상기시키다, 기억나게 하다’란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call to remembrance(KJV)’인데 ‘기억을 불러일으키다’는 의미는 그냥 기억이 나는 정도가 아닌 의지적인 노력을 포함하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de) 너희가 조명을 받은 뒤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냈던 지난 날들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라(상기시키라, 기억해내라)

33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혹은’으로 번역된 헬라어 ‘touto(투토)’는 ‘this’ 즉, ‘이것, 이렇게’란 의미입니다.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thlipsis(뜨립시스)’는 ‘고난, 어려움, 환난’을 뜻하는 단어인데 영어로는 ‘tribulation’이며 ‘persecution, affliction, distress’로도 쓰입니다. 앞선 32절에 ‘고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고난, 고통‘을 뜻하는 pathéma(패띠마)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이런 형편에 있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houtōs(후토스) anastrephomenōn(아나스트레포메논)’은 직역하면 ‘이와 같은 것을 지나가고 있는’이란 의미입니다. ‘사귀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koinónos(코이노노스)’는 영어로는 ‘sharer, partner, companion’인데, 즉 ‘함께 나누는 사람, 공유자, 동반자’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렇게 진정코(men) 비방뿐만 아니라(te:both) 환난에 의해서도 구경거리가 되고 이렇게 지금은(de) 이와 같은 일을 겪고 있는 자들의 동역자가(동반자가)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갇힌 자’로 번역된 헬라어 ‘desmios(데스미이오스)’는 ‘묶인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이란 의미로 영어로는 ‘prisoner’입니다. ‘빼앗기는’으로 번역한 헬라어 ‘harpagé(하르파게이)’는 ‘약탈, 강탈, 노략’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뿐만 아니라(te:both) 너희 소유를 약탈당하는 것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prosedexasthe) 너희 스스로가(heautous) 더 낫고 영구한 소유를 가진 줄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위 번역 그대로도 좋습니다. 본절에 ‘담대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parrésia(파레이시아)’는 ‘언어의 자유, 자신감, 담대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담대함을(확신) 버리지 말라 이것이 상을 얻게 하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위 번역 그대로도 괜찮고 흠정역 번역도 괜찮습니다. 흠정역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뒤에 그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하니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위 번역 그대로도 괜찮지만, ‘아주, 매우’라는 의미의 ‘hoson(호손)’이 빠져 있습니다. 그 단어까지 넣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뒤로 물러가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hupostolé(후포스톨레이)’는 ‘실망시키다, 뒷걸음치다, 움츠려들다’란 의미입니다. ‘내 마음’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숨 또는 혼’을 의미하는 ‘psuché(프수케이)입니다. 빠져 있는 단어까지 넣어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de)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본절에 ‘영혼’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숨 또는 혼’을 의미하는 ‘psuché(프수케이)입니다. ‘구원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peripoiésis(페리이포이에이시스)’는 ‘보존하다, 지키다, 획득하다, 소유하다’란 의미입니다.

그러나(de)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아닌 믿음으로 혼을 보존하는(지키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10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1)

다음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1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 번역에 빠져있는 단어가 있는데, ‘갖고 있다, 잡고 있다’란 뜻의 헬라어 ‘echó(에코)’입니다. 특히 ‘손에 쥐고 있다, 옷처럼 입고 있다, 지키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본절에 ‘그림자’로 번역된 헬라어 ‘skia(스키아)’는 히브리서 8장 5절에도 나오는 단어인데 바로 번역한 것입니다. ‘skia(스키아)’는 신약에 총 7번 나오는 단어인데(숫자 7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개정개역은 히브리서 9장 24절에 나오는 ‘antitupos(안티투포스)’란 단어도 ‘그림자’로 오역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늘’로 번역된 헬라어 ‘diénekés(디에이네케스)’는 ‘지속해서, 끝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서’란 의미입니다.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 ‘thysiais(띠씨애이스)’는 ‘희생 제물’을 뜻하는 ‘thusia(뚜시아)’의 복수형입니다. ‘언제나’로 번역된 헬라어 ‘oudepote(우데포테)’는 영어로는 ‘never’, 즉, ‘결코/절대로~아니다/안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을 가진(echōn) 것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일들의 형상 자체는(autēn) 아니기에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드린 것과 같은 희생제물들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완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단번에’로 번역된 헬라어 ‘hapax(하팍스)’는 ‘한 번, 한번은, 한 번에 다, 한 번 더’ 등을 의미합니다. ‘죄를 깨닫는 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자의식, 양심’ 등을 뜻하는 ‘syneidēsin(씨나이데이신)’과 ‘죄’의 복수인 ‘hamartiōn(하마르션)’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죄의식’이란 생각이 들어 그렇게 번역합니다.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prospheró(프로스퍼로)’에서 파생된 ‘prospheromenai(프로스퍼로메나이)’인데 ‘가져오다, 드리다’를 의미하며 ‘예물(헌물)이나 희생물’을 드리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섬기는 자들이 한 번에 깨끗하게(정결하게) 되어 더 이상(eti) 죄의식을 갖지(echein) 않으므로 그것들 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본절에 ‘이 제사들’이라고 되어 있지만 헬라어로는 ‘이와 같은’을 의미하는 ‘autais(오타이스)’입니다. ‘기억하게 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anamnésis(아남네이시스)’는 ‘상기하다, 기억하다’란 뜻인데, ‘의지적으로 어떤 것이나 어떤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추모나 기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상기시키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본절에 ‘없이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aphaireó(아파이레오)’는 ‘잘라내다, 끊어내다, 없애다, 제거하다’란 뜻으로 신약에 총 10번 나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랐을 때도 쓰인 단어이고 죄나 수치를 없애거나 제거했을 때도 쓰였는데, 해당 단어를 누르면 쓰인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 못한다’로 번역된 ‘adunatos(아두나토스)’는 ‘할 수 없다, 능력이 없다, 불가능하다’는 의미인데 역시 신약에 총 10번 나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라(gar)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본절은 이해를 돕기 위해 ‘주께서’ 혹은 ‘하나님이’란 주어를 넣은 것이지 원어에는 없습니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원어에 없는 주어는 가로 처리로 번역합니다. 여기서도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희생 제물’을 뜻하는 ‘Thysian(띠씨안)’인데 1절과 달리 단수형이며 신약에 총 11번 나옵니다(11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예물’로 번역된 헬라어는 ‘prosphoran(프로포란)’으로 ‘예물 혹은 헌물’을 뜻하는 단수형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 제물과 헌물은 원하지 아니하셨으나 (당신은) 나를 위해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본절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희생제물과 헌물을 원치 않으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예비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속죄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 관한, ~에워싼, ~대한 모든 것’을 뜻하는 ‘peri(페리)’와 ‘죄들’을 뜻하는 ‘hamartias(하마티아스)’입니다.

‘번제’로 쓰인 헬라어 ‘Holokautōmata(홀로코우토마타)’는 ‘번제물’을 뜻하는 ‘holokautóma(홀로코토마)’의 복수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세계 2차대전 때 6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대학살을 영어로 ‘The Holocaust(더 홀로코스트)’라고 하는데 바로 번제물을 뜻하는 이 헬라어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 대학살이 이 단어로 불리게 된 이유는 나치의 ‘extermination camp(직역하면 몰살, 전멸, 박멸 캠프: 의역하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통채로 무더기로 불에 태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번제물’을 뜻하는 히브리어 ‘olah(올라)’에서 온 홀로코스트란 단어보다는 종교적 색채가 없는 ‘참사, 재앙’을 뜻하는 ‘Shoʾah(쇼아)’로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번제물들과 죄들에 관한 것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에’로 번역된 ‘tote(토테)’는 ‘그래서(then), 그때(at that time)’란 의미입니다. ‘말하기를’로 번역된 헬라어 ‘eipon(아이폰)’은 과거형이기에 ‘말하였기를(I said)’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서 ‘하나님’은 삽입된 것이고 원어는 ‘sou(소우)’, 즉 ‘당신의’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내가 말하였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에 대해 기록된 대로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위에’로 번역된 헬라어 ‘anóteros(아노테로스)’는 ‘더 높은’이란 뜻이며 ‘더 높은 곳, 더 존귀한 곳’이란 의미입니다. 신약에 두 번 쓰였는데, 본절과 누가복음 14장 10절에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는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면서, 맨 끝자리에 앉으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올라앉으라(더 윗자리로, 더 높은 자리로)’고 해서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을 거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주께서는’이란 주어는 삽입된 단어입니다. 본절에서 ‘제사’로 번역된 단어는 1절처럼 ‘희생 제물’의 복수형인 ‘Thysias(띠시아스)입니다. 본절에 ‘예물’로 번역된 헬라어도 복수형인 ‘prosphoras(프로스포라스)’ 입니다. ‘속죄제’로 번역된 헬라어도 6절처럼 ‘~에 관한, ~에워싼, ~대한 모든 것’을 뜻하는 ‘peri(페리)’와 ‘죄들’을 뜻하는 ‘hamartias(하마티아스)’ 두 단어입니다.

본절엔 ‘이는 다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이라’가 가로 처리되어 있는데 원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뻐하지 않으셨다’가 수식하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더 높은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희생 제물들과 헌물들과 번제물들과 죄들에 관한 것들은 당신이 원하지 않으셨고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 것도 당신은 기뻐하지 않으셨나이다”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본절에 ‘그 후에’로 번역된 헬라어는 7절에 나오는 ‘tote(토테)’인데, ‘그래서(then), 그때(at that time)’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로 번역된 헬라어는 ‘eirēken(아이레이켄)’으로 ‘그가 말하였다’입니다.

‘폐하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anaireó(아나이레오)’는 ‘없애다, 치우다, 제거하다’란 뜻인데 특히 ‘죽인다, 생명을 거둬가다, 끝내다, 폐지하다’란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그분께서 이르셨기를, 오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 왔나이다(hēkō:have come), 하셨으니 그분께서 첫째 것을 없애심은(폐지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본절에 쓰인 ‘단번에’는 헬라어 ‘ephapax(에파팩스)’인데 영어로는 ‘once for all’이란 의미입니다. 신약에 딱 5번 나오는데(은혜를 뜻하는 숫자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모든 해당 구절을 읽어보시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됩니다(단어를 누르면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는 없는 표현이라서 ‘단번에, 단 한 번에’라는 반쪽짜리 번역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once for all’이란 표현은 글자 그대로, ‘단 한 번에 다(모두)’란 뜻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란 의미입니다.

‘거룩함을 얻었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hagiazó(하기아드조)’는 ‘거룩히 구별되다’란 뜻으로 영어로는 ‘to make holy, set apart as holy, santifly’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뜻 안에서(en)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드려지시는 것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원어에는 ‘진실로, 정말로(truly, indeed)’란 의미의 ‘men(멘)’이 있습니다. ‘본절에 ‘없게 한다’로 번역된 ‘periaireó(페리아히레오)’는 ‘벗겨내다, 제거하다, 잘라내다’란 의미인데 특별히 사방으로 에워싼 어떤 것을 완전히 분리해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도 신약에 딱 5번 나옵니다. ‘자주’로 번역된 헬라어 ‘pollakis(폴라키스)’는 ‘자주, 여러 번, 계속해서’란 뜻으로 ‘repeatedly(반복적으로)’란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제사’로 번역된 단어도 1절처럼 ‘희생 제물’의 복수형인 ‘Thysias(띠시아스)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pas) 제사장이 날마다 서서 섬기며 반복해서 같은 희생 제물들을 드리되 그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분리 제거하지) 못했으나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본절에 ‘위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huper(후퍼)’는 ‘~위에, ~너머’란 뜻으로 ‘~을 대신해, ~를 위해서, ~에 관한’이란 의미입니다.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는 ‘희생 제물’을 뜻하는 ‘Thysian(띠씨안)’인데 5절처럼 단수형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직 이분은 죄들을 대신한 희생 제물을 영원히 드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 후에’로 번역된 헬라어 ‘loipon(로이폰)’은 ‘뭔가 남겨진 것들’을 뜻하며, ‘마침내, 지금부터 계속, 그 이후로’란 의미로 쓰입니다. ‘발등상이 되게 하신다’에서 ‘되게 한다’로 번역된 헬라어 ‘tithémi(타이테이미)’는 ‘~을 놓다, 고정하다, 세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의 발받침으로 놓이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니라.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본절에 ‘거룩하게 된’으로 번역된 헬라어 ‘hagiazomenous(하기에조메노스)’는 과거진행형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는’으로 번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번의 제사’에서 ‘한 번은 오역입니다. 여기에 쓰인 ‘mia(미아)’는 ‘하나’란 의미이지 ‘한 번’이 아닙니다. 신약에 총 35번 나오니 단어를 눌러 이 단어가 쓰인 구절들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 하나의 헌물로 그분은 거룩히 구별되는 자들을 영원토록 완전하게 하셨기 때문이라(gar)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원어에는 개역개정의 16절 앞부분이 15절 뒷부분에 나옵니다. 아마도 번역상의 편리 때문에 15절에 나오는 뒷부분을 16절 앞쪽으로 붙인 것 같습니다. 좀 어색하더라도 그냥 원어에 있는 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언하시니, 이후에(meta) 말씀하시기를,”

*본절에 나오는 ‘meta‘는 ‘~과 함께, ~와 같이, ~과 더불어, ~뒤따라’를 뜻하는데 특히 그 일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주로 ‘with’란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시간의 경과를 나타낼 때는 ‘after’란 의미로 쓰입니다. 14절까지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성육신하셨는가를 기록하고 있고 15절부터는 부활 사건 이후로 오신 성령께서 어떻게 증언하시는가를 다루고 있기에 본절의 ‘meta‘는 ‘이후에’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본절에도 15절의 ‘meta(메타)’가 나옵니다.

“그날들 이후에(meta) 내가 그들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넣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내가 기록하리라”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다시’로 번역된 ‘eti(에티)’는 ‘더(more, further), 아직도(still, yet), 더 이상(any longer, anymore)’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들을 내가 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사하였은즉’으로 번역된 헬라어 ‘aphesis(아페시스)’는 ‘기각, 석방, 사면’을 의미하는 법정 용어입니다. 본절에 ‘다시’로 번역된 헬라어는 ‘ouketi(우케티)’는 ‘더는 없다, 더 이상 없다(no longer, no more)’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de) 이것들의 사면이 있는 곳엔(Hopou) 더 이상 죄들에 관한(peri) 헌물은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피를 힘입어’에서 ‘힘입어’로 번역된 헬라어 ‘en(엔)’은 ‘~안에, ~위에, ~에, ~로 인해, ~과 함께’ 등을 의미하는 접속사입니다. ‘담력’으로 번역된 헬라어 ‘parrésia(파레이시아)’는 특별히 ‘언어(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 자신감(confidence)’을 뜻하며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하며, 담대하고(boldness) 확신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얻었나니’로 번역된 헬라어 ‘Echontes(에콘테스)’는 1절의 ‘갖고 있다, 잡고 있다, 소유하다’는 뜻의 ‘echó(에코)’의 파생어입니다. 특히 ‘손에 쥐고 있거나, 옷처럼 입고 있다’는 의미이기에 ‘지녔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와 함께(피로 인해)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지녔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열어놓으신’으로 번역된 헬라어 ‘egkainizo(엥카히니드조)’는 ‘consecrate(거룩히 구분하다), dedicate(봉헌하다)’를 뜻합니다. ‘새로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prosphatos(프로스파토스)’는 ‘새로 막 죽인 희생물, 최근, 신선한, 새것’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을 곧 자기의 육체를 통과해(dia:through) 봉헌한(거룩히 드린) 새롭고(신선하고) 살아 있는(zōsan) 길이라

*이번에 원어분석을 하면서 prosphatos(프로스파토스)’가 ‘새로 막 죽인 희생물’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 단어가 ‘살아 있다, 생명이 있다’는 의미의 ‘zōsan(조산)’과 함께 쓰였다는 점을 주목하게 됐었습니다. 아, 이 구절은 십자가상에서의 어린양의 희생과 영원한 부활의 생명으로 인해 휘장, 즉 그리스도의 몸을 통과해서 난 길이란 의미구나 싶었습니다. 그 참된 의미가 번역으로는 전달이 되기 어렵다는 게 아쉽습니다. 이렇게 일일이 구절을 번역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숨겨진 것들을 알아가는 걸 기쁨으로 여깁니다.

10장이 39절까지 있어서 1-20절까지 이번에 올리고 후편으로 21-39절을 올리겠습니다.

God of Numbers:7(70)이란 숫자의 의미

“3이란 숫자를 생각하니 베드로의 3번의 부인과 3번의 고백 사이에 예수님의 3개의 못자국도 떠오르게 하시네요. 다시 만났을 때 사랑하느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손과 발에  못자국을 베드로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올린 “3이란 숫자의 의미”에 대해 받은 코멘트입니다. 그러고 보니 골고다 언덕엔 3개의 십자가만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주님의 몸에도 3개의 못이 박혔습니다. 양손(혹은 손목)과 두발목을 관통한 3개의 못은 4개의 상처를 남기고 옆구리의 찔린 상처까지 더하면 5가 됩니다. 하나님이(3) 세상을(4) 사랑하신 은혜의 죽음이(5) 십자가였음을 다시 묵상하자니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 나오는 7개의 간구도 3개는 하나님에 관한 것, 4개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었음이 상기되었습니다(마 6장 9-13).

그래서 오늘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과 완성을 뜻하는 7에 대해 적으려 합니다. 7은 성경에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중요한 숫자이기에 3처럼 일일이 다 적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주요 포인트만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6일간의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창세기 1장 1절은 7단어의 히브리어(바라싯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워에트 하아레스)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총 28개(7×4)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되어 있습니다(בְּרֵאשִׁ֖ית בָּרָ֣א אֱלֹהִ֑ים 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 하나님의 수 7과 세상과 창조물의 수인 4의 곱셈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성경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숫자 7은 지난 글에 적었던 것처럼 숫자 3과 같이 일하는 경우를 꽤 발견하는데(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숫자 10과도 그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7단어의 히브리어로 구성된 창세기 1장 1절은 10단어의 영어(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로 번역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은 아담의 7대손이었고 심판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은 노아는 10대손이었습니다(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는 정결한 동물은 암수 일곱씩 방주에 들였으며(창 7:2), 방주에 들어간 7일 후에 홍수가 지면을 덮었습니다(창 7:10). 노아라는 이름이 성경에서 7번째로 등장하는 부분은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입니다. 이런 7과 10을 더한 17은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숫자입니다(1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직접 이름을 지어주시거나 바꿔주신 이름이 몇 번인지 궁금해서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적어도 제가 찾은 것으로는 모두 17번이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7과 10을 곱한 숫자인 70도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의 가뭄과 7년의 흉년을 맡아 관장하던 요셉의 초청으로 에굽으로 야곱과 함께 내려간 가족의 수는 모두 70명이었습니다(출1:5). 야곱이 죽자 요셉은 그 몸을 40일간 향으로 처리하게 했고 에굽인들은 70일간 애곡했습니다(4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사역을 도울 70장로를 세우는데(출24:1), 에스겔서에도 70장로가 나오고(겔8:11) 예수님도 생명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70인을 세워 둘씩 짝지어 내보내십니다(눅10:1-17). 그런 반면에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아비멜렉은 아버지에게서 난 70명의 형제를 한칼에 죽입니다(삿 9:56). 40이란 수가 주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개인의 시험 및 연단의 기간을 뜻하는 수라면, 70이란 기간은 한 나라의 시험 및 연단의 어떤 기간을 뜻합니다. 이스라엘만 우상숭배로 바벨론에 멸망당했다가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난 후 돌아와 다시 나라를 재건한 게 아닙니다. 이사야서에는 두로에 대한 70년 예언도 나옵니다. 두로는 70년간 잊혀질 것이나 70년 후에는 창녀처럼 노래하고 그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찾아오시리니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모든 나라와 음란을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사 23:15-17). 개역개정은 이 부분을 ‘하나님이 돌보신다’로 번역했지만 이것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성경에서 쓰이는 ‘하나님이 방문하신다(visit), 찾아오신다’는 표현은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려고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방문하는 것을 뜻하며 그것은 복된 약속의 성취일 수도 있고(약속의 자녀인 이삭이나 에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경우), 은혜와 구원(룻 1:6), 죽음(민 16:29), 혹은 심판의 때가 임한 것일 수도(출 20:5, 32:34) 있습니다(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visit’을 찾게 되면 모두 80번 나오는데 구절들을 일일이 읽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에 죄와 허물이 그치고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 환상과 예언이 응하여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시기까지의 70주, 혹은 70개의 7일이 정해져 있습니다(단 9:24).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기간 가운데 받은 이 예언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님은 내게 죄를 범한 형제를 7번은 용서해야 하는 거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70의 7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십니다(마18:22).

7은 또한 은혜의 수인 5와도(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함께 일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를(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루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담은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란 단어가 5구절에 걸쳐 7번 나옵니다(창1:1, 21, 27(3번), 2:3, 2:4).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 “사랑하는 아들(beloved son)”을 찾게 되면 11번 나오고(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이란 복수형까지 포함하면 12번 나온다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향한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이란 표현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 5경에도 7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첫째로는 여호와의 7절기가 있습니다(여호와의 7절기에 대한 글은 절기마다 시리즈로 올렸는데 서론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7절기 중 무교절은 7일간 무교병을 먹으며(레23:6) 오순절은 초실절부터 7번의 안식일을 센 다음 날, 즉 50일이(5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성령이 강림하신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에녹이 태어나고 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가신 날 또한 오순절이라고 하는데 전승이니 권위 있는 내용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팔절은 7번째 달의 첫날이며 장막절은 7번째 달 15일부터 7일을 셉니다(레 23장). 레위기에는 7이 들어간 구절이 57번 나오는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 직분으로 섬기기 전에 7일간 거룩히 구별해야 했습니다(레8:31-36). 속죄절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긍휼의 자리) 7번 피를 뿌려 속죄해야 했는데(레16:14) 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피의 속량을 나타냅니다(히 9:12). 성소에 있던 금으로 된 등잔대의 7줄기의 빛도 사람의 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완전한 빛을 상징합니다.

또한 7일마다 7번째 날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던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7년마다 땅에 안식년을 주어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레25:4). 그리고 7번의 안식년, 즉 7년마다 오는 안식년을 7번 계수해서 49년이 된 다음 해인 50년은 희년으로 거룩하게 하여 자유를 공포해야 했고 각자 자기 소유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레25:8-10).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귀한 법은 모두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것들이기에 지켜졌어야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0년 바벨론의 포로기를 통해 땅이 그동안 도둑맞았었던 안식년을(7년마다 취해야 하는 안식년 70번은 490년의 불법의 세월에 해당합니다) 누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대하 36:21).

7과 6의 관계도 하나님의 수와 인간의 수의(6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합계에서 오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의 첫 전투였던 여리고성을 하나님은 매일 한 번씩 6일을 돌되 7일째 날에는 7번을 돌고 함성을 지르라고 하십니다(수 6:3-4). 즉, 여리고 성은 7 제사장들이 7 나팔을 메고 총 ’13번’을 돌고 무너져내린 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아브라함부터 시작하는 예수님의 계보는 14세대씩 3그룹으로 묶인 42대인데, 7과 6의 곱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2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과 온전한 인성을 잘 나타내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12 제자를 두셨는데, 주님까지 합치면 13이 되며 그중 한 제자가 배반합니다. 이처럼 13은 타락과 배반의 숫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13이란 숫자가 처음 나오는 구절은 창세기 14장 4절인데, 12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던 5 나라가 13년째가 되었을 때 배반해서 4 나라와 전쟁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도시의 상징인 바벨론의 시조는 니므롯인데, 함의 13대손입니다(창 10:9-10). 에스더가 여왕으로 있을 때 하만은 왕을 속여 첫째 달 13일에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라는 왕명에 서명하도록 했고 이를 시행할 날짜는 열두째 달 13일이었습니다(에3:12-13). 마가복음 7장 21-22절에 주님은 부패한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13가지의 죄악들을(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질투, 비방, 교만, 우매함) 열거하십니다.

솔로몬은 7년간(왕상 6:38) 성전을 지었고 일곱째 달 절기에 궤를 메어 선전의 내소인 지성소로 들였는데, 7일과 7일 도합 14일을 절기로 지켰습니다(왕상 8장). 성경엔 7과 2를 곱한 14란 수도 자주 발견되는데, 14는 구원과 속량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총 3번의 14대가 나옵니다(마1:17). 마태복음의 기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및 속량을 나타내는 14대로 3번 나눠 적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7년 전에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신 기록이 성경 전체에 정확히 7번 나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2번씩 7번 부르셨기에 이름의 수로는 14번이 됩니다. 그때 받았던 조명을 2018년에 적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7은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 중 성령의 일하심이 두드러지는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7영, 하나님의 7눈 등을 떠나서 특별히 성령의 기름 부음이 두드러지는 책은 7이란 숫자로 엮어져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개인적으로 에스겔,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4 복음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기적을 담고 있지만, 특별히 요한복음은 7개의 기적을 다루고 있고 7에 대한 숨은 진리가 곳곳에 박혀 있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책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조명은 2018년에 올린 ‘7 I Am, 7 기적, 7 증인’이란 글에 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에는 7이란 숫자가 36구절에 걸쳐(킹제임스 영어성경) 54번 나오는데, 등장하는 순서대로 적자면, ‘7교회, 7금촛대, 7별, 하나님의 7영, 7등불, 7봉인, 7뿔과 7눈(하나님의 7영)을 가진 죽임당한 양, 7천사, 7나팔, 7천둥, 7머리에 10뿔이 달렸는데 머리마다 7왕관을 쓴 용, 7머리에(그 여자가 앉은 7산과 7왕) 10뿔이(10왕) 달렸는데 뿔마다 10개의 왕관을 쓴 짐승, 7재앙, 하나님의 진노를 담은 7금대접입니다. 에스겔 같은 경우는 여호와의 말씀과 환상이 임한 후 7일간 충격 가운데 놀라 있었다고 나오고(겔3:15-16), 7년째 되던 해 다섯 번째 달 10일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하나님께 물으려고 에스겔에게로 나아왔다는 기록이 있으며(겔20:1), 천년왕국이 임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7년간 전쟁 무기들을 태우고 7개월 동안 전쟁으로 죽은 시체들을 묻어 땅을 정결케(깨끗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겔39:9, 12). 천년왕국의 기간에 세워질 에스겔의 성전엔 7계단, 7규빗과 70규빗의 측량이 나오고, 7일동안 매일 염소, 수소, 그리고 숫양의 피를 올려 7일 동안 제단을 정결케 하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분하라고 합니다(겔 43:25-25). 스가랴에도 7눈을 가진 한 돌(슥 3:9)과 7등잔과 7 관(슥 4:2), 그리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7눈(슥4:10)이 나옵니다.

욥에게는 7아들이 있었고, 고난을 받고 있던 그를 3친구가 방문했을 때 7낮과 7밤을 침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은 속죄로 7숫양과 7수소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나만 장군은 요단강에 7번 몸을 담은 후 나병이 나았는데 레위기 14장에 나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에 대한 규례를 보면, 새 2마리를 가져다가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나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7번 뿌린 후 놓아줍니다(레 14:2-7). 그 후 정결함을 받은 자는 자기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와 자기 장막 밖에 7일을 머문 후 7일째 되는 날에 온몸의 모든 털(머리털, 수염, 눈썹)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은 후 정결하게 됩니다(레14:8-9). 그리고 8일째 날에는(새로운 시작, 거듭남,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흠 없는 어린 숫양 2마리와 1년 된 암양 1마리, 고운 가루 3/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속건제와 속죄제로 드리는데, 제사장은 그 기름을 왼쪽 손바닥에 따른 후 오른쪽 손가락으로 찍어 여호와 앞에 7번 뿌립니다(레14:10-16). 이 외에도 집에 생기는 나병에 대한 규례와(레 14:34-57) 몸에 유출병이 생길 때의 규례도 숫자 7과 연관해서 비슷한 과정들을 거칩니다(레 15:13-28).

마태복음 13장에서 7개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설명하셨던 주님이 십자가 선상에서 말씀하신 횟수는 총 7번인데, 가상칠언으로 불립니다. 주님은 또한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7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막16:9). 이런 주님의 족보는 누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는데, 정확히 77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2사도를 뒀던 신약의 초대교회에는 7집사가 선출됩니다(행6:3).

이상이 7에 대한 상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