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8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1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요점’으로 번역된 ‘kephalaion(케팔라욘)’은 ‘요점, 주요 포인트, 합계’란 의미입니다. ‘지극히 크신 이’로 번역된 ‘megalósuné(메갈로쑤네이)’는 ‘위대한 혹은 폐하’란 호칭인데 특히 신적 왕권을 칭할 때만 사용된 단어로 신약에 딱 3번 나옵니다(히 1:3, 8:1; 유 1:25). 영어로는 ‘the Majesty’로 번역하는데 왕정 통치를 하는 곳에서는 왕, 여왕, 황제 등을 ‘your Majesty!’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때문에 의미 전달이 잘 되지만, 한국어로는 이런 왕권에 대한 의미 전달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하게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지금껏 말한 것들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니 하늘들에서 왕이신 분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으며

2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헬라어와 영어는 문법이 비슷한 편이라 괜찮지만 한국말로 번역하려면 뒤에 있는 문장을 앞으로 가져와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번역하면 본절처럼, 있지도 않은 단어를 넣어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본절에 ‘장막’이 두 번 나오는데 원어나 영어엔 한 번밖에 없습니다. 말이 되게 하려고 구절 뒷부분에 ‘장막’을 한 번 더 넣었지만 그냥 구절의 뒷부분을 앞으로 가져와서 번역했다면 그럴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최대한 원어와 문법에 가깝게 번역하자는 의도였기에 저는 넣지 않고 번역하겠습니다.

그리고 본절에 ‘장막’으로 번역된 ‘skéné(스케네)’는 ‘장막, 성막, 거주지, 집’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인데 신약에 총 20번 나옵니다. 유감스럽게도 장막(tent)과 성막(tabernacle)을 의미하는 뚜렷하고도 독특한 단어들이 히브리어에 있는 반면, 헬라어는 아닙니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스케네’는 18번은 ‘성막’으로 번역됐고 2번은 ‘장막 혹은 거주지’로 번역됐습니다(스케네가 나오는 모든 구절은 단어를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본절은 분명하게도 ‘성막(tabernacle)’을 의미하고 있기에 ‘성막’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로 장막은 ‘오헬(אֹהֶל)‘이고 성막은 ‘미쉬칸(מִשְׁכָּן)‘입니다. 구약에서 ‘회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장막을 뜻하는 ‘오헬(אֹהֶל)‘과 ‘절기, 집회, 장소’ 등을 의미하는 ‘모에드(מוֹעֵד)‘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아닌 주께서 세우신 참 성막 안과 성소 안에서 섬기시는 분이시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대제사장마다’로 번역해도 괜찮지만 ‘모든, 다, 전체, 각종’ 등을 의미하는 ‘pas(파스)’가 있기에, ‘모든 대제사장은’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사’로 번역된 헬라어 ‘thusia(뚜씨이아)’는 희생제물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수식하는 ‘그리고(kai) 와 둘 다((te)란 단어가 있습니다. 즉, 직역하면 ‘예물 그리고 희생제물 둘 다’가 됩니다(예물과 희생제물의 차이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운’으로 번역된 헬라어 ‘kathistémi(케띠스테이미)’는 ‘세우다, 임명하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대제사장은 예물 그리고 희생제물도 드리려고 세우는 것이기에 따라서 그도 역시 드릴만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느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번역에는 빠져 있는 단어들을 모두 넣고 원어와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ei) 그분께서 정말(men)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 역시(oude)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율법에 따라 예물들을 드리는 자들이 이미 있기(ontōn) 때문이라

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본절은 특히나 번역이 어색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흠정역도 찾아봤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본절에 쓰인 ‘장막’은 ‘성막’으로 번역했어야 합니다.

‘지으려 할 때에’로 번역된 문구는 ‘mellōn epitelein‘인데 ‘완성하려 할 때에’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왜냐면 ‘epitelein(에피텔레인)’은 ‘완성하다, 끝마치다, 완벽하게 하다’를 의미하는 ‘epiteleó(에피텔레오)’란 원어에서 파생됐고 ‘mellōn(멜론)’은 ‘~을 하려던 참(to be about to)’을 뜻하는 ‘melló(멜로)’에서 파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시하심’으로 번역된 헬라어 ‘kechrēmatistai(케크리마티스타이)’는 특별히 신적 경고를 뜻하는 단어로 chrématizó(크레이마티드조)’라는 원어에서 파생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9번 나오는데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나 주의를 받았다’로 번역되었고 영어로는 ‘warned(경고하다/받다)’ 혹은 ‘admonished(충고하다/받다, 주의를 주다/받다, 훈계하다/받다)’로 쓰입니다. 이 구절도 영어 성경에는 모두 ‘warned’ 혹은 ‘admonished’로 번역됩니다.

‘본을 따라’에서 ‘본’으로 번역된 헬라어 ‘typon(타이폰)’은 ‘패턴, 모양, 모델, 자국’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삼가’로 번역된 헬라어는 ‘Hora(호라)’로 ‘주의하라,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성막을 완성하려 할 때에 모세가 주의를 받았던 것처럼(kathōs)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를 섬기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삼가 너는 산에서 네게 보여 줬던 본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셨으나

6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본절의 ‘그러나’는 매끄러운 번역을 위해 5절 끝부분을 ‘하셨느니라’가 아닌 ‘하셨으나’로 처리하는 것으로 미리 포함했습니다.

‘더 아름다운’으로 번역된 ‘diaphoros(디아포로스)’는 ‘서로 다른, 다양한, 색다른, 뛰어난’ 등을 의미합니다. ‘직분’으로 번역된 헬라어 ‘leitourgias(리투르지아스)’는 ‘서비스, 공무직, 특히 제사장 직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번역에는 빠져있는 ‘~만큼’을 의미하는 헬라어 ‘hosō(호쏘)’와 ‘그리고, 또한, 더구나, 더불어’을 의미하는 ‘kai(카이)’를 넣었고 ‘그것 위에, 혹은 그것을 근간으로’를 의미하는 ‘hētis epi(헤이티스 에피)’를 넣었습니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에서 ‘세우신’으로 번역된 ‘nenomothetētai(네노모떼테이타이)는 ‘(법을) 제정하다, (법이) 제정되다’는 의미로 본절과 히브리서 7장 11절 두 군데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그는 더욱 뛰어난 직무를 얻으신 것만큼 더불어 더 나은 언약의 중보자이시니 그것을 근간으로 더 나은 약속들이 제정됐느니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본절에서 ‘언약’은 원본에는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넣은 것입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과 NASB도 ‘언약’이란 단어가 원래는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이탤릭체로 썼거나 부호 안에 넣었습니다.

‘무흠’으로 번역된 ‘amemptos(아멤프토스)’는 ‘흠이나 잘못, 혹은 하자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신약에 5번 나옵니다(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요구’로 번역된 헬라어 ‘zéteó(제이테오)’는 ‘찾다, 구하다, 원하다, 필요하다, 요구하다’란 의미입니다. 또한 본절에는 빠져 있는 헬라어 ‘topos(토포쓰)’는 ‘장소, 지역, 자리, 방, 기회’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처음 것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구할(찾을) 기회가(여지가) 없었으려니와

8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본절에 ‘잘못을 지적하여’란 문구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그보다는 ‘흠(잘못)을 발견하셨다(memphomenos:멤포메노스)’가 더 맞는 번역입니다. ‘더불어’로 번역된 헬라어 ‘epi(에피)’는 ‘~위에, ~에게, ~을 기반으로’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맺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syntelesō(신텔레소)’는 ‘완성하다, 끝마치다, 성취하다’란 의미의 ‘sunteleó(순텔레오)’란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로 특별히 ‘(법을) 비준하다, 인준하다, (계약을) 승인하다’ 등을 의미합니다(영어로는 ractify).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흠을 발견하셨기 때문에(gar) 그분께서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라, 보라(Idou)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에게 그리고 유다의 집에게 새 언약을 인준하리라

9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본절에 나오는 ‘또’란 단어는 원어엔 없기에 뺍니다. 그리고 ‘열조’란 번역도 괜찮지만, 헬라어 ‘patrasin(파트라신)’은 ‘아버지들’이란 의미기에 그냥 ‘조상들’로 번역했습니다.

본절에 ‘맺은 언약’에서 ‘맺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epoiēsa(에포이싸)’로 8절에서 ‘맺은’으로 잘못 번역되어서 제가 ‘인준’으로 고친 ‘syntelesō(신텔레소)’와 다른 단어입니다. ‘epoiēsa(에포이싸)’는 ‘만들다, 하다, 짓다, 생산하다’ 등을 의미하는 ‘poieó(포에오)’에서 파생한 단어이기에 본절에서는 ‘맺은’으로 번역한 게 맞습니다.

본절에서 ‘머물러 있지’로 번역된 헬라어 ‘emmenó(엠멘노)’는 ‘머물다, 신의를 지키다, 관리하다, 인내하다’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신약에 4번 나옵니다(4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돌보지 아니하였다’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ameleó(아멜레오)’로 ‘상관하지 않다, 신경 쓰지 않다, 소홀하게 대하다, 돌아보지 않다, 무시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에굽 땅에서 이끌어 나오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그들이 내 언약 안에 머물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주가 말하노라.

10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본절에 ‘~때문에, 그것, 그렇기에’ 등을 의미하는 ‘hoti(호티)’가 빠져 있어 넣습니다. 그리고 본절에 ‘맺은’으로 역시 번역된 헬라어는 ‘diathēsomai(디아띠쏘마이)’로 ‘따로 두다, 유언으로 남기다’를 의미하는 ‘diatithémi(디아티떼마이)’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이 어원은 신약에 총 7번 나옵니다. 이 부분은 ‘새 언약’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렇게 8, 9, 10절에 나오는 각각 다른 3개의 헬라어가 모두 ‘맺은’으로 번역됐다는 게 유감입니다.

‘생각’으로 번역된 헬라어 ‘dianoia(다이아노이아)’는 ‘이해(명철), 지성, 생각, 정신, 통찰’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한국어는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지각’이란 단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됐습니다. 지각은 어떤 이해와 인식, 혹은 통찰력으로 갖게 된 생각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날들 이후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에 유언으로 남길 언약은 이것이기 때문이라(hoti) 주가 말하노라 나의 법들을 그들의 지각(생각) 안에(eis) 두고 그들의 마음 위에(epi)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또한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한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본절에 ‘각각 자기’로 번역된 헬라어는 ‘hekastos(헤카스토스) autou(오토)’인데, ‘각자’란 의미입니다.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그들이 각자의 이웃 그리고 각자의 형제에게 주를 알라고 말하며(legōn) 가르치지(didaxōsin) 아니하리니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까지 모두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니(hoti)”

12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

이 구절도 왜 킹제임스 영어랑 원어가 다른가 해서 보니 가장 오래된 1550년 원본에는 있는데 그 후로 ‘불법 혹은 무법’을 의미하는 헬라어 ‘ἀνομιῶν(anomia)’가 빠진 원본들이 주류를 이루어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 헬라어 ‘anomia(아노미아)’는 신약에 총 15번 나오는데 ‘무법, 불법, 불순종, 죄’란 의미로 쓰이며 대부분 ‘불법(iniquity)’으로 번역됐습니다. 주류는 아니지만 1550년 원본(스테파너스:Stephanus Textus Receptus), 1894 원본(스크리베너:Scrivener’s Testus Receptus), 2005년 원본(바이잔틴:Byzantine Majority Text)에는 본절이 이 단어가 있기에 번역합니다.

그리고 본절에 ‘불의’로 번역된 헬리어 ‘adikia(아디키아)’는 ‘부당, 불의’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에 총 25번 등장하는데, 킹제임스영어 성경은 이 단어를 어떤 구절은 불법(iniquity)으로 어떤 구절은 불의(unrighteous)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불법’에 해당하는 헬라어 ‘anomia(아노미아)’가 따로 있기에 다른 영어 성경처럼 ‘불의(unrighteous) 혹은 부당(unjust, injustice)’으로 번역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에 대해 긍휼을 베풀고 더 이상( eti) 그들의 죄들과 그들의 불법을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본절엔 ‘언약’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모두 ‘언약’을 뜻하는 거겠지 싶어 넣은 것이지만 이 구절은 오히려 뒤에 오는 9장 1절에 나오는 ‘첫 예배(섬김)의 규례(예법)들과 땅의 성막’에 대한 언급입니다. 참고로 9장 1절에도 ‘언약’이란 단어는 없습니다.

그리고 본절에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도 괜찮은 번역이지만 좀 더 맞는 번역은 ‘낡아지게 만들었으니(pepalaiōken) 낡아져 가고(palaioumenon)’입니다. 두 단어 모두 ‘낡게 만들다, 오래되어 쓸모없어지다, 늙어가다’란 의미의 ‘palaioó(팔라유)’란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또한 본절에 ‘쇠하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géraskó(가라스코)’는 ‘나이가 들다, 늙어가다’란 의미입니다. 본절에 ‘없어져 가는’으로 번역된 헬라어 ‘aphanismos(아파니스모스)’는 ‘사라져가다, 없어지다’란 의미입니다. 여기에 ‘(어떤 장소나 시간에) 가까운, 거의’를 의미하는 헬라어 ‘engys(엥기스)’를 넣고 원어와 문법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하시기를(legein), 새것이라(Kainēn), 첫 것은 낡아지게 만들었으니 낡아져 가고 오래되어(나이가 들어) 거의 사라져감이라

God of Numbers: 4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세상, 창조물을 의미하는 숫자 4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창조 4일째 되는 날 하나님은 4가지를 위해(징조, 계절, 날, 해) 궁창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띄우시는 것으로 하늘 단장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땅 위로는 4개의 강줄기가 동서남북 4방향으로 흐르도록 하십니다(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따라서 4란 수는 세상 창조와 그 안의 창조물을 뜻합니다.

예언서(에스겔, 요한계시록)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영적 생물이 나오는데 그들은 사자, 소, 사람, 독수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룹’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창조물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사자가 맹수라면(길들여지지 않은 동물들) 소는 가축(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들), 사람, 그리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이 이 4개의 영적 생물로 압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70퍼센트가 물, 즉 바다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그룹 중에 바다를 대표하는 생물이 빠져있습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용 또는 옛 뱀으로 불리는 사단(계20:2)이 바다의 생물과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파충류를 대표했었습니다. ‘사단 장’으로 불리는 에스겔 28장에 보면 9개의 보석으로 치장하고 불탄 돌들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성산과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나옵니다. 이 그룹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많은 무역(물품)으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법과 횡포를 행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침받았다고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에스겔 28장 16절에 ‘무역’으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맞게 번역된 건지 알고 싶어 원어로 찾아보게 됐습니다.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겔 28:16)”

흥미롭게도 ‘무역, 또는 물품’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רְכֻלָּה(뤠쿨라오)’는 구약에 4번 나오는데 모두 에스겔에서 나왔고 모두 사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겔 26:12; 28:5, 16, 18). 에스겔 26장은 두로란 나라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고 28장은 사단에 빗댄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마귀에게만 쓰인 ‘무역, 물품’이란 단어가 세상을 뜻하는 4번 등장한다는 게 성경의 묘미입니다. 이런 신기함이 성경 연구를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앞으로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수의 강만 있지 바다가 없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계21:1; 22:1). 성경은 이런 사단을 4개의 명칭으로(용, 옛 뱀, 마귀, 사단) 부릅니다(계20:2).

어찌됐거나 이 그룹은 ‘덮는(סָכַךְ:소콱) 그룹’이었기에 4개의 그룹들 위를 덮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룹들 중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였기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세상 창조물을 대표하는 그룹은 4가 아닌 5가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5란 숫자로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잘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였겠지만(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하며 하늘의 질서를 깼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며 땅의 질서마저 깨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질서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회복시키시고 화평케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앉아계십니다(히 10:12). 이런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한 조명을 쓴 글은 여길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4란 숫자는 2로 나눌 수 있는 첫 숫자이기에 둘로 분리되어 이중적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한 단어가 이중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4가 뜻하는 ‘세상’이란 단어가 그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세상’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구원의 대상인 창조물들과 사람을 뜻하기도 하고(요 3:16)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통치하는 죄악 된 세상을 뜻하기도 합니다(요일 2:15-17).

타락 이후 모든 창조물이 함께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는(롬 8:19-22)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도 4 복음서에 담겨져 있습니다. 에덴동산을 적시며 흐르던 4개의 강줄기가 모든 창조물에게 물을 공급했듯이, 성경엔 모든 창조물을 구원해줄 생명수가 4 복음서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4 복음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4개의 그룹에도 비유되는데 마태는 사자(왕), 마가는 소(종), 누가는 사람(인자), 요한은 독수리(하나님)입니다(이런 4 복음서에 대한 비교는 여길 누르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성경엔 총 4개의 가지(branch)가 나옵니다. ‘한 의로운 가지(a righteous Branch 렘 23:5)’, ‘그 종 가지(servant the Branch 슥 3:8)’, ‘그 가지(The Branch 슥 6:12)’, 그리고 ‘여호와의 가지(branch of the LORD 사 4:2)’입니다. 이 4개의 가지들도 순서대로 마태(왕), 마가(종), 누가(사람), 그리고 요한(하나님)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총 4번의 꿈으로 주의 사자로부터 지시받는 기록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데려오길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과 이름을 예수로 지으라는 것입니다(마 1:20-21). 두 번째는 헤롯이 아이를 죽이려 하니 에굽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마 2:13). 세 번째는 이제 안전하니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마 2:19-20). 네 번째는 갈릴리 지방으로 가라는 것입니다(마 2:22).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실 때 예수님의 겉옷을 4명의 군인이 4개로 나누어 가집니다(요 19:23).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4개의 증거와(표적들, 기사들, 여러가지 능력, 성령의 은사) 함께 증언하셨습니다(히 2:4). 주님은 자신이 재림하실 수 있는 시각을 4개의 시간대로(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 나눠 말씀하십니다(막 13:35).

다니엘서에 보면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기까지 이 세상을 차례대로 통치할 4개의 세상 왕국이 나옵니다(단 2:31-36). 이 왕국들은 하늘의 4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바다에서 나오게 된 큰 4개의 짐승에(사자, 곰, 표범, 열 뿔이 달린 짐승) 비유되기도 합니다(단 7장). 다니엘서에는 또한 4명의 왕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바벨론의 첫 번째 왕인 느부갓네살(단 1-4장), 마지막 왕인 벨사살(단 5장), 메대 왕인 다리오(단 5장, 6장), 바사 왕인 고레스(단 6장, 10장)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비유된 밭은 4종류의 마음 상태에 비유되면서 세상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기도 합니다(길 가, 돌밭, 기시떨기, 좋은 땅). 또한 마지막 때에 4천사가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침을 받기까지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에 불어 해하지 못하도록 땅 4 모퉁이에 서서 땅 4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는 장면도 있습니다(계7:1). 그리고 성경은 세상을 심판할 4개의 재앙(전쟁, 기근, 역병, 지진)을 주로 언급합니다(마 24장, 계 6장). 마태복음 24장 7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니까 역병이 빠져 있길래 원본과 영어 성경을 찾아보니 어떤 헬라어 원본을 보느냐에 따라 4가지 재앙이 다 나온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영어 킹제임스에는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을 경우 예루살렘에 역시 4가지의 중한 벌을(칼, 기근, 사나운 짐승, 역병)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겔 14:21).

천지창조를 담고 있는 창세기 1장과 2장엔 ‘창조물(creature)’이란 단어가 4번 등장합니다.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아들들에 의해 민족과 나라가 나눠지고 세워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나눠지게 된 4개의 단어가 나옵니다. 야벳은 땅(영토), 언어, 종족, 민족(창 10:5)으로 나뉘었고 함과 셈은 각각 족속, 언어, 지방, 나라(창 10:20, 31)로 나누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세상에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4개의 단어로(족속, 방언, 백성, 나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4개의 단어가 모두 쓰인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만 딱 4번 등장한다는 것도 이번에 발견하게 됐습니다(계5:9, 7:9, 11:9, 14:6).

요한계시록 5장 13절에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을 높이는 장면에서도 4개의 장소에 있는(하늘, 땅 위, 땅 아래, 바다) 창조물들이 하나님을 4개의 단어로(찬송, 존귀, 영광, 권능) 높입니다. 모세의 성막을 덮고 있던 천은 4겹이었는데, 맨 밑은 성막천, 그 위는 염소털, 그 다음은 수양가죽, 그리고 맨 바깥쪽은 해달가죽이었습니다(출 26장). 맨 안쪽에 있던 성막천은 4가지 색실로 수놓은 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흰 베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정사각형의 큐빅 모양입니다(계21:16).

욥기에는 욥 외에 4 사람이 등장해서 설전하는데 욥의 3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리고 엘리후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4명의 여인이 등장하며(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하와란 이름은 성경 전체에 4번 등장합니다(창 3:20, 4:1; 딤 2:13; 고후 11:3). 시편 107편은 성경에서 같은 구절이 유일하게 4번 나오는 권입니다(107:8, 15, 21, 31). 잠언에는 작지만 지혜로운 것 넷이(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 나옵니다(잠 30:24-28). 무지개는 성경에 4번 등장하는데 구약에 2번, 신약에 2번 등장합니다(창 9; 겔1:28; 계4:3, 10:1). 스가랴서에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4개의 뿔과 그 뿔들을 떨어뜨릴 4명의 목수가 나옵니다(슥 1:18-21). 또한 4병거와 4가지 색의 4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하늘의 4바람으로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다가 나가는 것이라고 합니다(슥 6:1-5).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4가지의 육체를 얘기하는데 사람, 짐승, 새, 물고기입니다(고전 15:39).

4는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의 개념으로도 세상을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동서남북 4방향, 4대 원소 (흙 물 불 공기), 4계절(봄 여름 가을 겨울).

이상이 숫자 4에 대한 상고입니다.

히브리서 7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7장 번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6장에 덧붙인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6장 6절에 ‘불가능하다’란 단어가 없다는 걸 발견하고 직역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분들을 위해 4절에 대한 설명도 더 덧붙이게 됐습니다. 6장 번역을 미리 보신 분들은 이해를 돕기 위해 교정한 부분을 밑줄 쳤으니 그 부분만이라도 한 번 더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위 번역도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장 앞부분에 ‘gar(가르)’가 들어갔기 때문에 문장 끝부분이 ‘~기에, ~때문에’로 끝나야 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니라. 그가 왕들을 살육하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하였기에

2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본 절에 ‘해석’으로 번역된 단어는 ‘번역, 통역’을 의미하는 ‘herméneuó(허르메이뉴오)’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도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그 이름을 번역하면 첫째로 의의 왕이요 그다음은 또한 살렘 왕이니 곧 화평의 왕이라

3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본 절에 ‘족보도 없고’로 번역된 헬라어는 ‘agenealogétos(어제네알라제이토쓰)‘로 ‘족보, 계보’를 뜻하는 ‘genealogy’에 ‘없다’를 뜻하는 ‘a’가 붙은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에서 ‘닮아서’로 번역된 헬라어 ‘aphōmoiōmenos(아포마이오메노쓰)’는 ‘~처럼 됐다, ~처럼 만들었다’란 의미로 영어로는 ‘having been made’입니다. 이처럼 완료형 수동태(have been ~ed)에서 have가 동명사 형태인 having으로 바뀐 경우는 이미 일어난 과거의 어떤 일이 현재나 미래의 어떤 일에 원인이 됐음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계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을 뿐만 아니라(de) 하나님의 아들처럼 된 그는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본 절에서 ‘얼마나 높은가’로 번역된 헬라어 ‘pélikos(페이리코쓰)’는 ‘얼마나 큰가, 얼마나 위대한가’란 의미입니다. 신약에 딱 두 번 쓰였는데 본 절과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 바울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얼마나 큰 글자들로 썼는지를 보라”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노략물’로 번역된 ‘akrothinion(에크로띠니온)’은 본 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헬라어로 ‘수북이 쌓인 물건 중에 가장 좋은 것, 첫열매, 노략물중 최상품’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라’로 번역된 헬라어 ‘theōreite(떼오레이테)’란 단어는 ‘뚫어지게 보다, 살펴보다, 분별하다, 동참하다’란 의미로 신약에 12번 나옵니다(단어를 클릭하면 12구절 모두 볼 수 있고, 숫자 12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theóreó(떼오레오)’라는 원어에서 파생한 이 단어는 특히 분석하려는 의도로 찬찬히 살펴보는 걸 의미하며 ‘연극’을 뜻하는 ‘theatre’도 ‘theóreó에서 온 단어입니다. 따라서 본 절의 의미는 그냥 생각해 보라는 게 아니라 성경을 펼쳐 그 부분을 눈으로 살펴보라는 의미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 살펴보라. 족장 아브라함조차도 그에게 노획물의 최상품 중 십분의 일을 주었고”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 번역도 아주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레위의 아들들 중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그 백성들에게, 즉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온 그들의 형제들인데도 십일조를 취해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느니라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러나’란 접속사가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받은’에서 ‘약속’이 단수 처리가 되어 있는데, 신약에 ‘약속’이란 단수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이 그 대상일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엔 ‘약속들’이란 복수로 기록하는데 본 절도 헬라어 복수인 ‘epangelias(에판겔리아스)’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영어 성경도 이 단어를 복수로 번역했다 단수로 번역했다 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약속’이란 어원이 나오는 52구절을 원어 중심으로 모두 단수와 복수로 분별해서 풀어봐야겠다 싶습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자신의 계보가(족보가) 이어지지 않은 그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거뒀고 약속들을 가진 그를 축복하였나니

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본 절에서 ‘논란’으로 번역된 헬라어 ‘antilogia(엔티로지아)’는 신약에 4번 쓰였는데, ‘부정하다, 반대하다, 논쟁하다, 반박하다’는 의미로, 영어로는 ‘gainsaying 또는 contradict’입니다(세상, 창조물을 의미하는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논란의 여지 없이’로 번역된 헬라어 문장은 ‘chōris de pasēs antilogias’인데 여기서 ‘코리스’는 ‘~에서 분리된, ~상관없는, ~이 없는’이란 의미이며 ‘파시스’는 ‘모든, 각종’이란 의미입니다.

‘낮은 자’로 번역된 ‘elatton(엘라톤)’은 ‘더 적은, 더 작은, 더 가난한, 열등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높은 자’로 번역된 ‘kreittón(크라잇톤)’은 ‘더 강한, 더 나은, 월등한’의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갖 반박의 여지 없이 더 작은 자가 더 나은 자에 의해 축복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죽을 자들’로 번역된 헬라어 ‘apothnēskontes(에포뜨네이스콘테스)’는 영어로 ‘dying’ 즉 ‘죽어 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7장 번역에 많이 빠져 있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성경에선 ‘진실로’로 많이 번역된 ‘정말로, 참으로, 진짜로’를 의미하는 헬라어 ‘men(멘)’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넣어서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참으로 여기서는 죽어 가는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지만 저기서는 살아 있다고 증언된 이가 받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원본엔 ‘and’를 의미하는 ‘kai(카이)’ 말고도 ‘as, so that, since’을 의미하는 접속사 ‘hōs(호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다, 답하다, 명령하다’를 의미하는 ‘eipein(에이페인)’ 또한 나옵니다.

따라서 원본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그렇기에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다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

위 구절을 보면 이해를 돕기 위해서인지, 아브라함이란 이름도 들어가 있고 레위란 이름도 들어가 있지만 원어에는 ‘그’라는 명칭만 나옵니다. 영어 킹제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이미’로 번역된 헬라어 ‘eti(에티이)’는 ‘아직도, 아직’이란 의미이지 ‘이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직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멜기세덱이 그를 만났었을 때에 그는 아직도 그의 아버지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

9절과 10절의 의미는 레위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아버지 허리 어딘 가에 있었을 때)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도 아브라함을 통해 바친 거나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본 절에서 ‘온전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teleiósis(텔리오시스)’는 성경에 두 번밖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완성하다, 성취하다, 완벽하다, 끝마치다’란 의미로 ‘혼인의 마지막 단계인 합방(consummation)’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 절 외에 누가복음 1장 45절에 쓰입니다.

‘그 아래에서’라고 번역된 헬라어 ‘epi(에피)’는 오히려 ‘위, 위로, 기본으로, 밑바탕으로, 근간으로’란 의미이고 ‘그’는 autēs(오테스)로 ‘it 혹은 her’로 번역됩니다. 또한 이 구절에도 ‘정말로, 참으로, 진짜로, 진실로’를 의미하는 헬라어 ‘men(멘)’, 영어로는 ‘truly, indeed’란 단어가 있는데 번역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나왔던 ‘아직도, 아직’이란 의미의 헬라어 ‘eti(에티이)’도 빠져 있어서 넣고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레위의 제사장 직분으로 정말(‘men(indeed)’) 성취됐다면 (백성이 그것을 근간으로 율법을 받았었느니라) 아론의 반차에 따라 부름받지 않고 아직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르는 또다른 제사장이 일어날 필요가 무엇이겠느냐?

12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한 구절, 한 구절, 번역할 때는 꽤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듭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살펴 보고 일일이 어법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문법에 맞게 재배치해서 읽어보고, 여러 의미 중에서 가장 적합한 의미를 찾아 고르고 넣어보는 작업을 하며 고심하며 번역을 마칩니다. 한 구절을 붙잡고 한시간도 넘게 작업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그런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쳐 번역된 구절만 읽어보면, 그런 숨은 노력이 드러나진 않습니다. 일반 문서를 번역하는 거라면 지금 들이는 노력의 반의반도 안 할 것 같습니다. 일반 문서였으면 엉터리로 했을 거라는 게 아니라 그 정도만 해도 적당하고 의미 전달에 아무 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 연구를 수년간 해오면서 번번이 경험한 것은, 성경엔 어느 한 자도 그냥 있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단 한 획, 한 철자도 너무도 정교하고 오묘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기에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해 여러 번의 반복적인 확인 작업을 통해 번역하고 있습니다. 언젠간 마주하게 될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을 생각하며 나의 속중심을 살피시고 감춰진 것들을 밝히 보여 알게 하시는 성령님의 조명에 의지해 작업합니다. 전에도 성경에서 오역된 단어들을 원어 중심으로 해석해 올리는 작업을 했긴 했지만 이렇게 한 권의 모든 구절을 원어 중심으로 번역하는 일은 처음이라서, 히브리서의 다른 구절들도 그렇지만 본 절을 번역하며 다시 한번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습니다.

본 절에 ‘바꾸다 혹은 변하다’로 번역된 두 단어는 모든 영어 성경에도 ‘change’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뀌었다’에 쓰인 헬라어는 성경에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 ‘metatithemenēs(메타티떼메니스)’로 ‘옮기다, 교환하다, 자리를 바꾸다, 떠나다, 변하다’를 의미하는 어원인 ‘metatithemi(메타티떼미)’에서 왔습니다. 이 어원이 쓰인 구절은 성경에 6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단어를 누르시면 모든 구절을 볼 수 있고 대부분 ‘옮기다 혹은 옮겨지다’로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설명하자면, 사도행전 7장 16절에 에굽에서 죽은 야곱 및 조상들을 아브라함이 묻힌 묘지로 이장하기 위해 세겜 땅으로 옮겨왔을 때 쓰였고, 갈라디아서 1장 6절에 얼마나 빨리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또다른 복음으로 너희가 옮겨가는지(떠나는지) 놀라울 뿐이라는 구절에도 쓰였으며, 히브리서 11장 5절에 에녹이 이 세상에서 저 하늘로 옮겨졌을 때도 쓰인 단어입니다.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에서 쓰인 헬라어는 ‘metathesis(메타띠이씨쓰)’로 성경에 딱 3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단어를 누르면 3구절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어원은 역시 ‘metatithemi(메타티떼미)’에서 왔다고 하는데도 이 3구절은 앞에 나온 6구절과 함께 나오지 않고 따로 구분됐습니다. 그래서 ‘메타티떼미’란 어원을 쓰는 구절은 9구절이 되는 셈입니다. 어원이 같기에 뜻도 비슷해서, ‘옮기다, 바꾸다, 떠나다’로 번역되며 이 단어 역시 에녹이 옮겨진 히브리서 11장 5절에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저는 본 절에 쓰인 이 두 단어는 ‘바뀌다, 변하다’를 의미하는 ‘change’ 보다는 ‘옮기다, 이동하다’를 의미하는 ‘transfer 혹은 translate’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사장 직분이 레위의 반차에서 멜기세덱의 반차로 옮겨지게 되고 율법이 성령의 법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지, 제사장 직분에 대한 정의가 변하거나 율법 자체가 바뀐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법에서 더 나은 법, 하나님의 피로 성취된 사랑과 용서가 포함된 성령과 은혜의 법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나는 율법을 성취하러(완성하러) 왔지, 폐하러 온 게 아니다’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 37-39절에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지 둘 다(오래된 부대와 새 부대 둘 다) 보존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비유에 대해 조명받은 글을 2018년에 올렸으니 읽어보길 원하시는 분들은 여길 누르시면 됩니다.

또한 본 절에는 정확히 번역되어 있지는 않은데, 아마도 ‘반드시’란 단어로 번역이 되지 않았나 싶은 헬라어 단어는 ‘anagké(에네케이)’로 ‘~할 필요가 있다, 바로 해야만 한다, 불가피하다’란 의미입니다. 여기에 역시 빠져있는 ‘~이 일어나다, ~이 되다’란 의미의 ‘ginetai(지네타이)’도 넣어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히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장 직분이 옮겨졌기에 율법 또한 불가피하게 옮겨지게 되느니라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위 구절도 나쁘진 않습니다. 하지만 ‘말한 것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legetai(레게타이)’는 ‘~불리다, 명명되다, 칭하다’란 의미로 성경에 8번 나옵니다(새로운 시작, 거듭남 등을 의미하는 8에 대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또한 위 구절에 빠진 것도 같고 아니면 다른 단어로 번역이 된 것도 같은 헬라어 ‘tauta(토타)’는 ‘이런 것들’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아무도 제단에서 섬기지 않았던 또다른 지파에 속하여 이런 것들을 위해 부름받은(명명된) 분에 대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위 번역 그대로 괜찮습니다.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본 절에서 ‘별다른’으로 번역한 단어는 아마 ‘또다른’을 의미하는 ‘heteros(헤테로쓰)’를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 절엔 ‘만일(ei)’에 해당하는 가정법 용어가 있는데 빠져 있습니다.

또한 ‘perissoteron eti(페리쏘테론 에티)’, 영어로는 ‘yet more abundant’로 번역된 헬라어 표현에 가장 적합한 한국어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을 때 ‘더할 나위 없다’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eti(에티)’는 ‘아직, 아직도’란 의미이지만 이 단어가 쓰인 93구절을 보면 ‘더, 더 이상‘이란 의미로도 번역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eti(에티)’와 함께 쓰인 ‘perissoteron(페리쏘테론)’의 의미가 이미 ‘더욱더, 더 훌륭한, 더 많은, 더 중요한’란 뜻이기에 ‘더 이상과 더욱더’란 두 단어를 합치면, ‘더할 나위 없다’로 번역하는 게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만일 멜기세댁과 같은 또다른 제사장이 따라(kata) 일어났다면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이니”

16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본 절에서 ‘육신에 속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sarkinos(사르키노스)’는 ‘육신적인, 육에 속한’을 의미하는 단어로 성경에 4번 나옵니다(글자를 누르시면 4구절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육체에 속한 것을 일컫는 단어가 성경에 ‘세상, 창조물’ 등을 의미하는 ‘4번’ 나온다는 것도 성경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숫자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한 계명의 법’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nomon entolēs(노몬 엔톨리이스)’인데, 신약에 61번 나오는 nomon(노몬)은 ‘율법’을 뜻하고 대부분 정관사 ‘the’가 붙습니다. 그리고 entolēs(엔톨리이스)는 ‘계명’을 뜻하는데, ‘명령, 계명’을 뜻하는 ‘entolé(엔톨레이)’에서 온 파생어로 신약에 9번 나오며 대부분 정관사 ‘the’가 붙고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의미할 때 쓰였습니다.

‘불멸’로 번역된 헬라어 ‘akatalytou(아카탈리투)’는 ‘akatalutos(아카탈루토스)’에서 파생한 단어로 ‘융해될 수 없는, 깨지거나 파괴될 수 없는’이란 의미입니다. 또한 ‘~이 되었다, ~대로 일어났다’를 의미하는 ‘gegonen(게고넨)’을 넣어 원어와 문법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신에 속한 율법의 계명에 따라 되신 분이 아니요 반면에(alla) 불멸한 생명의 권능(능력)에 따른 것이라

17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본 절에서 ‘증언하기를’로 번역된 헬라어 ‘martyreitai(마르티뤠이타이)’는 신약에 딱 한 번 등장하는데 ‘증인이 되다, 증언하다’를 의미하는 ‘martureó(마르튜레오)’에서 파생한 단어로 특히 ‘그것, 그렇기에, 그렇다’를 의미하는 ‘hoti(호티)’란 단어와 함께 쓰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으로 자신에 대해 증언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시편 110편 4절 말씀입니다.

또한 ‘영원히’로 번역된 헬라어 ‘aiōna(아이오나)’는 어떤 긴 특정 시간대를 의미하는 aión(아히온)에서 파생한 단어인데 신약에 31번 나오며 대부분 ‘영원’으로 번역됐습니다. 그리고 ‘~하였기에, ~때문에’를 의미하는 헬라어 ‘gar(가르)’를 넣고 문법과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니라는 말씀으로 증언하셨기에

18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전에 있던’으로 번역된 헬라어 ‘proagó(프로아고)’는 ‘앞서 이끌다, 먼저 가다’란 의미로 ‘이전에 존재(발생)하다’란 뜻입니다. ‘연약하고’로 번역된 ‘asthenés(에스떼네스)’는 ‘힘이 없다, 약하다’란 의미로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약하고 힘이 없다, 불충분하다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폐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athetésis(아떼테이씨쓰)’는 ‘한쪽으로 치워놓다’란 의미로 ‘취소, 더 이상 효력이 없다’로 쓰이는데, 히브리서에서만 두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본 절과 히 9:26). 한국어 성경들은 이 단어를 “폐하고”로 번역했는데,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성취하러(완성하러) 왔지, 폐하러 온 게 아니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뤄질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옳은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구절 번역에도 ‘정말로, 참으로, 진짜로, 진실로’를 의미하는 헬라어 ‘men(멘)’, 영어로는 ‘truly, indeed’란 단어가 빠져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에 존재하던(앞서 이끌던) 계명이 약하고 무익하여 참으로(진실로) 무효하게 되니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더 좋은 소망’이라고 해도 괜찮지만, 헬라어 ‘kreittonos(크레이토노스)’는 ‘더 낫다, 더 훌륭하다’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생기니’에서 ‘생기니’로 번역된 ‘epeisagoge(에피쎄고게이)’는 ‘~을 들여오다(bringing in), 도입하다(introduction), 수입하다(importation)’란 의미입니다. 특히 이미 있던 것 외에 더 들여온다는 뜻으로 본 절에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이 중에 ‘도입’이란 단어는 특별히 “새 법을 도입한다”에 쓰이는 단어이기에 이 구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이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성취하지) 못했기에 이제(de) 더 나은 소망을 도입하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0절과 21절은 어떤 헬라어 원본으로 보느냐에 따라 21절 문장의 앞부분이 20절 끝부분에 붙어 있기도 하고 개역개정처럼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다음은 20절에 21절의 앞부분이 붙어 있는 원본을 바탕으로 번역한 영어 성경 구절입니다. ‘None of this happened without an oathFor others became priests without an oath,(HCSB).’ 이런 차이를 제외하고 내용 자체에 큰 차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번역하기가 쉽지는 않아서, 말이 되게 하려고 이런저런 단어를 삽입했습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나 NASB 같은 경우는 삽입한 단어들은 가로 안에 넣었습니다. ‘And inasmuch as not without an oath [he was made priest]:(KJV)’ ‘And inasmuch as [it was] not without an oath(NASB)’

사실 번역이 매끄러워지려면 21절에 있는 앞부분을 가져오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있는대로 ‘그가 제사장으로 된 것은’이라든가 ‘그것은’이란 없는 단어를 삽입하지 않고 ‘~을 볼 때, ~란 사실에 입각할 때’란 의미의 ‘hoson(영어로는 inasmuch)’를 넣어 원어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 맹세 없이가 아닌 것을 볼 때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metamelēthēsetai(메타멜리띠이세타이)’로 ‘후회하다, 회개하다’란 의미의 ‘metamelomai(메타멜로마이)’에서 파생한 단어이며 ‘생각을 바꾸다’로 쓰이기도 합니다. 신약에 총 6번 나오는데, 본 절은 ‘후회하지 않는다’로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란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6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참으로(진실로)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들이 되었으나 그는 그에게 말씀하신 분을 통해 맹세로 된 것이니 곧 주께서 맹세하셨고 후회하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영원토록 제사장이라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본 절엔 ‘그리고(and), 또한(also), 그다음 혹은 그 후(then), 더구나(moreover), 심지어(even)’ 등을 뜻하는 ‘kai(카이)’가 나옵니다. 21절의 내용에 이어 나오는 22절 앞에 붙는 접속사로 하나씩 고려해 봤을 때 ‘then’이 맞는 것 같은데, 한국어로는 ‘그다음, 그 후’ 보다는 ‘그러고’가 적합할 거 같아 찾아보니, ‘그러고’는 ‘그리하고’의 줄임말이었습니다. ‘그리하고’라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 그다음에란 의미의 ‘then’과 제일 잘 어울리는 단어인 거 같아 ‘그리하고’로 썼습니다. 작업 시간을 줄이기 위해 헬라어를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원어에 맞게 번역한 단어들 옆 가로에 넣습니다.

그리하고 예수는 훨씬(tosoutos) 더 나은(kreittonos) 언약을(diathēkēs) 따라(Kata) 보증이(engyos) 되셨느니라

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항상 있지 못함이로다’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지속하다, 머물다, 인내하다’는 의미의 ‘paramenó(파라메노)’와 ‘~을 못하도록 막다’란 의미의 ‘kóluó(코루오)’입니다. 다른 헬라어는 일일이 설명하는 대신 번역한 단어 옆 가로에 넣었습니다.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더구나(Kai) 참으로(men) 많은(pleiones) 자들이(pleiones) 제사장들이(hiereis) 되온 것은(gegonotes) 죽음으로(thanatō) 인해(dia)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라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문장에 빠진 ‘de(그러나, 하지만)’를 넣고 ‘영구하다, 변화가 없다’란 의미의 ‘aparabaton(아파라바톤)’을 넣고 ‘그에게 있다, 그가 가지고 있다’를 의미하는 ‘echei(에케이)’를 넣고 원어와 문법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원토록 계시기에 제사장 직분도 영구히 그분께 있느니라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로 번역된 ‘hothen(호뗀)’은 ‘~에서, ~이유로’란 의미인데, 24절에 나오는 영원히 제사장 직분이 그의 것임으로 인해 ~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므로’ 보다는 ‘그로 인해’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본 절에 ‘온전히’로 번역된 ‘pantelés(판텔레이쓰)’는 ‘다 완성하다, 온전하다, 완벽하다, 언제나’란 의미가 있는데 본 절과 누가복음 13장 11절에 나옵니다. ‘간구 또는 중보’를 의미하는 헬라어 ‘entugchanó(엔퉁카노)’는 “만나다, 부탁하다, 중보하다, 간구하다”란 의미로 신약에 5번 나옵니다(은혜를 뜻하는 숫자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로 인해 또한(kai)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나니,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중보하시기) 때문이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본 절에 ‘이러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toioutos(토유토스)’는 ‘이와 같은, 이처럼, 이런 류의’란 의미입니다.

‘떠나 계시고’로 번역된 헬라어 ‘kechōrismenos(케코리스메노스)’는 ‘분리하다, 따로 두다, 나누다, 떠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어원 ‘chórizó(코리조)’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악이 없고’로 번역된 헬라어 ‘akakos(아카코스)’는 ‘순수하다, 교활함이 없다, 순진하다’로 쓰이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려는 의도조차도 없는’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순전하다’란 표현이 이 단어에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러움이 없고’로 번역된 헬라어 ‘amiantos(아미안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때가 타지 않은’ 등의 의미로 영어로는 성경에 ‘부정하다’로 많이 쓰이는 ‘defiled’의 반대말인 ‘undefiled’입니다. 따라서 ‘정하다’로 번역하는 게 제일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한(kai) 이와 같은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합당했기 때문이니(gar),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셨기에 거룩하고 순전하며 정하여 하늘들보다 더 높이 되셨느니라

27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단번에’로 번역된 헬라어 ‘ephapax(에파팩스)’는 영어로 ‘once for all’이란 의미로 신약에 5번 나옵니다(은혜를 뜻하는 숫자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는 없는 표현이라서 ‘단번에, 단 한 번에’라는 반쪽짜리 번역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once for all’이란 표현은 글자 그대로, ‘단 한 번에 다(모두)’란 뜻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란 의미입니다.

‘드린다’로 번역된 헬라어 ‘anapheró(애나퍼로)’는 ‘들어 나르다, 들어 이끌다, 희생제물과 같은 것들을 높은 제단에 올려 드리다’란 의미로 신약의 10번 나옵니다(완전수 중 하나인 10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이루셨음이라’로 번역된 헬라어 ‘epoiēsen(에포이센)’은 ‘만들다, 하다, 생산하다, 낳다, 짓다, 행동하다, 창조하다, 성취하다, ~야기하다’ 등을 의미하는 헬라어 어원 ‘poieó(포이에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따라서 본 절에 가장 적합한 번역은 ‘해내셨다’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처럼 먼저는 자신들의 죄 때문에 다음은 백성의 죄 때문에 매일 희생제물을 올려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시니 이는 그가 자기 자신을 올려드림으로 단 한 번에 다 해내셨기 때문이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약점’으로 번역된 헬라어 ‘astheneia(에스떼니아)’는 ‘연약함, 약점’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세웠다’로 번역된 헬라어 ‘kathistémi(케띠스테이미)’는 ‘임명하다, 세우다’란 의미입니다. ‘온전하게’로 번역된 헬라어 ‘teteleiōmenon(테텔레이오메논)’은 ‘끝마치다, 완성하다, 완벽하다’란 의미의 헬라어 어원 ‘teleioó(텔리아오)’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본 절 번역에 빠져있는 ‘gar(가르)’는 대부분 ‘~기에, 때문에’를 뜻하지만, 앞에 문장과 뒤문장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며 ‘정말, 참으로, 과연’이란 indeed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연(gar) 율법은 대제사장으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세우나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들이니라

히브리서 6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1절과 2절은 한 문장으로 연결되기에, 어느 한국어 번역본을 보든지 원어로는 1절에 있지만 어쩔 수 없이 2절에 번역해 놓은 단어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완전, 완벽, 성숙, 장성’을 의미하는 ‘teleiotés(텔라이오테이스)’ 와 ‘기초석’을 의미하는 ‘themelion(떼멜리온)’입니다.

1절에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라고 하니까 무슨 말인지 복잡하고 또 ‘버리라’고 하니까 갖다 버리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기초 교리를 떠나 이제는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절에 ‘버리고’로 번역된 ‘aphentes(아펜테스)’는 ‘떠나다, 남겨두다, 버리다, 떠나보내다’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에서 ‘도’로 번역된 단어는 ‘말씀’을 뜻하는 ‘logon(로곤)’입니다. ‘초보’로 번역된 ‘archēs(아르케스)’는 ‘시작, 시초, 처음, 첫째, 으뜸, 대장’을 의미하는데 신약에 27번 나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로 번역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그리스도의 처음 말씀’입니다.

1절과 2절엔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기초 말씀이 되는 여섯 가지가 열거됩니다. 첫째는 죽은 행실의 회개. 둘째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셋째는 세례들(침례들)의 교리. 넷째는 안수들. 다섯째는 죽은자의 부활. 여섯째는 영원한 심판입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바로 ‘세례(침례)들의 교리’라고 나오는 부분입니다. 한국어 성경엔 일단 ‘교리’가 ‘교훈’으로 번역되어 있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라고 되어 있어서 앞에 나오는 6가지가 다 교리인 것처럼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원어에는 ‘교리’라고 붙어 있는 단어는 세례(침례)이지 다른 기초 말씀엔 붙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 즉 믿는 자들의 침례는 늘 단수로 쓰이는 데 비해 여기엔 복수로, ‘침례들(세례들)’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데, 저는 ‘침례들(세례들)’이란 복수로 쓰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침례와 유대교 신자들이 이미 받았고, 또 알고 있었던 회개의 침례를 함께 일컬었기에 ‘침례들의 교리’라고 한 것이라는 주석에 동의합니다.

‘침례들(세례들)’이 복수인 것처럼 ‘안수’도 원어는 단수가 아닌 ‘안수들’로 복수입니다. 안수 역시 구약과 신약에 모두 등장합니다. 주로 복을 주거나(창 48:14; 마 19:13), 치유하거나(왕하 5:11; 막 8:23; 16:18), 임직(성직)하거나(민 27:18; 신 34:9; 딤전 4:14), 성령의 은사로 능력을 나눠주거나(행 8:17; 19:6), 하다못해 구약에선 죄를 전가할 때도 쓰였습니다(레 4:15 외). 이처럼 안수하는 행동은 손을 얹는 쪽이 손이 얹힌 쪽으로 복이든, 기적이든, 은사든, 죄든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나오는 ‘죽은자의 부활’ 즉, ‘부활 신앙’은 기독교의 기초 신앙으로서 유대교에서도 사두개파들은(막 12:18; 행 23:8)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인들은 믿었으며 주님께서도 가르치신 바입니다(요 5:28-29). 다니엘서(단 12:2)와 요한계시록(계20)에도 마지막 때에 있을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활은 6번째의 기초 말씀인 ‘영원한 심판’ 즉 영원한 천국의 삶 또는 영원한 지옥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1절에서 2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음 말씀을 떠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과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 세례(침례)들의 교리, 안수들, 죽은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석을 다시 놓지 말고 완전함(장성함)으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이 구절에서 “빛을 받고”로 번역된 헬라어 phótizó(포티조)는 ‘빛나다, 빛을 내다, 빛을 주다’란 의미이지만 어떤 사건이나 미스터리를 ‘밝혀내다(고전 4:5; 엡 3:9; 딤후 1:10)’는 의미로 쓰이며 살아 있는 성경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다, 깨우쳐지다, 조명 받다(요 1:9; 히 6:4, 10:32; 엡 3:9; 시 118:130; 삿 13:8; 왕하 12:2, 17:27; 엡 1:18)”란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4절의 ‘빛을 받고’란 애매한 해석보다는 생명의 말씀에 대한 ‘조명을 받고‘가 더 적합한 번역이지 아닐까 싶습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로 번역된 헬라어 ‘metochos(메토코스)’는 ‘파트너(동역자)’란 의미인데 성경에 6번 등장하며(6에 대한 의미에 대한 글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에 한 번 나오는 걸 빼고는 히브리서에만 5번 나옵니다(눅 5:7; 히 1:9, 3:1, 3:14, 6:4, 12:8). 그런데 ‘성령에 참여한 바’란 표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각각 독립된 인격체이시며 한 분이신데도 불구하고 유독 성령님만큼은 인격체가 아닌 ‘연기’와도 같은 취급을 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하나님의 말씀 또한 영이시지만(요 6:63) 그렇다고 우리가 성부와 성자를 인격체가 아닌 어떤 ‘기체’와도 같이 여기지는 않습니다. 성령님은 바람, 물, 불과 같은 것에 비유되시기도 하고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많지만 성령 또한 성부 성자와 동등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며 독립된 인격체이십니다. 그런데, ‘성령에 참여했다’는 본절의 표현에서도 그런 잘못된 생각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영어 성경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were made partakers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partaker’란 ‘같이 동고동락 하는 사람, 참가자, 동역자’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른 번역은 ‘성령의 동역자들이 되었다’입니다. 즉, ‘빛을 받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었고’라고 번역을 하면 마치 성령 세례(침례)를 뜻하는 것으로 오해할만 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빛을 받고’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이며, ‘성령의 참여’는 성령님의 동역자들로 되었다’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고 발람도 여호와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며 계시를 받았던 선지자입니다. 발람은 좋든 싫든 하나님의 지시를 쫓아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만일 그에게 정말 누구를 저주하고 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적극 못하도록 막으셨을까요?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을 ‘주님’으로는 모시지 못하고 맘몬을 ‘주인’ 삼았었기에 이스라엘에게 올무를 놓아 범죄하게 만들고 본인도 패망합니다. 발람에 대한 조명을 적은 두 글의 링크를 걸어놓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발람 1, 발람 2).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번 조명을 받았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았으며 그리고 성령의 동역자들로 되었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위의 구절도 괜찮지만 ‘하나님의 선한 말씀’보다는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이 직역입니다. 그리고 ‘내세의 능력’으로 번역된 부분은 영어로는 ‘the power of the coming age(aiōnos)’인데, 어떤 긴 특정 시간대를 의미하는 aión(아히온)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성경에 25번 나오는 이 ‘aiōnos‘란 단어는 신약에서 주로 ‘세상’으로 많이 번역되었고 ‘영원’에 해당하는 긴 시간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선하심과 오고 있는 시대(내세)의 능력 또한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서를 원어 중심으로 한 구절 한 구절씩 풀어가기로 한 이후, 가장 큰 반전을 가져다준 구절은 6장 6절이 아닐까 합니다. 이 구절은 여러 영어 성경 버전에도 ‘impossible (불가능하다) 혹은 can’t (할 수 없다)’가 들어가 있고 모든 한국어 성경에도(흠정역 포함) ‘불가능하다 혹은 할 수 없다’란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어에는 놀랍게도 그런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몇 번을 한 단어 한 단어씩 자세히 살펴보고 주석도 찾아봤는데, ‘불가능하다’란 의미를 넣지 않고는 해석하기 어려워 포함한 것이지 원어엔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킹제임스 영어 성경 구절만큼은 원어처럼 ‘불가능 혹은 할 수 없다’란 단어를 포함하지 않고 그냥 직역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 또한 가능한 직역 해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타락’으로 번역된 ‘parapiptó(파라핍토)’란 헬라어 어원은 ‘떨어지다, 떨어져 나가다, 뒤쳐지다, 실패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떨어져 나간 후에(having fallen away) 다시 새롭게 되려고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요 드러내놓고 욕되게(모욕) 하는 것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위의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한 후 그 땅을 가는 자들을 위한 합당한(유용한) 채소를 내는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만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버림을 당하고’로 번역된 헬라어 ‘adokimos(아도키이모스)’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다, 합당치 못하다, 가짜’란 의미여서 주로 ‘쓸모없다, 거절되다, 불합격, 불량품’으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쓸모없는 가시와 찔레를 내는 것은 저주에 가까워서 그 끝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확신하노라’에 쓰인 헬라어 ‘peithó(파이또)’는 ‘설득하다, 자신 있다, 확신하다’란 의미입니다. 개역개정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흠정역 번역이 잘 되어 있어 여기 옮깁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비록 우리가 이같이 말하지만 너희에게는 더 좋은 것들과 구원에 동반되는 것들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지만, 원어와 문법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시기에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향해 너희가 보여준 사랑, 곧 성도들을 섬겨준 것과 아직도 섬기는 것을 잊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부지런함’으로 쓰인 헬라어 ‘spoudé(스푸데이)’는 ‘서둘다, 빨리하다, 부지런하다, 진정성 있다, 성실하다, 적극적이다’란 뜻입니다. ‘나타내어’로 번역된 endeiknumi(엔디케누미)’는 ‘보여주다, 증명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나타내다란 번역 보다는 부지런함을 보여주라고 하는 게 원래 의미에 맞습니다.

그리고 ‘소망의 풍성함’에서 ‘풍성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 plérophoria(플레이로포리아)”는 ‘꽉 찬 보증, 확신, 자신’이란 뜻입니다. 즉 우리는 소망의 꽉 찬 보증을 향해 부지런히, 성실하게, 적극적인 태도로 서둘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어 성경엔 빠져있는 ‘그러나, 그리고, 뿐만 아니라, 이제, 지금’으로 쓰이는 ‘de(데)’란 단어를 구절에 넣고 원어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는 바는 너희 각 사람이 소망의 꽉 찬 보증을 향해 끝까지 동일한 부지런함(성실함,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위 구절에서 ‘게으르다’라고 쓰인 헬라어 ‘nóthros(노뜨로스)’는 ‘영적으로 둔감하고, 생기 없고, 느리고, 게으르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에 ‘본받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mimétés(미메이테쓰)는 ‘흉내 내는 사람, 본받는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특히 존경하는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에서 따라 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항상 긍정적인 의미로 쓰였습니다. 흉내 내다 혹은 따라 하다를 뜻하는 ‘mimic’이란 영어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은 이 단어를 ‘따라 하는 사람, 흉내 내는 사람, 본받는 사람’이란 의미의 ‘imitator’로 번역했고 킹제임스 같은 경우엔 ‘따르는 사람’이란 의미의 ‘follower’로 번역했는데,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따르는 사람보다는 따라 하는 사람이 맞기에 이 경우엔 ‘imitator(본받는 자)’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Biblehub.com이 기본 바탕으로 쓰는 헬라어 성경 원본엔 이 단어가 총 6번 나온다는 것입니다(고전 4:16, 고전 11:1, 엡 5:1, 살전 1:6, 살전 2:14, 히 6:12). 성경 연구를 하다 보면 자연히 숫자의 신비로움까지 함께 발견하게 되고 숫자에도 예민해집니다. 수천 년간 수십 명의 저자에 의해 쓰인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가 갖는 의미와 성경에 등장하는 숫자가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걸 번번이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 이 단어가 성경에 6번 나온다는 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었습니다(숫자 6에 대한 의미를 알고 싶으시면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완벽한 하나님을 ‘본받는 자’는 사람이니까 여섯 번 나올 수도 있겠지, 하고 그냥 넘어가려다가, 이 단어에 대한 여러 자료를 좀 더 찬찬히 살펴보니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바탕으로 쓴 헬라어 원본에는 벧전 3장 13절에도 이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7번 나온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이 구절들에 대한 링크를 걸어놓습니다). 이런 순간이, ‘그럼 그렇지!’ 싶어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성경을 잘못 번역하고 이해할 뿐이지 성경은 어떤 면에서도 완벽하며 완전합니다. 문명의 이기가 주는 안 좋은 면도 있지만 이처럼 원어와 원본을 쉽게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것과 한 단어가 성경 전체에서 몇 번이나 나오는지 쉽게 분석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종교개혁으로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된 커다란 은혜의 사건 이후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문명의 이기로 좀 더 쉽고 빠르게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많은 지식을 얻게 될 때마다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천사가 다니엘에게 했던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여기서 ‘지식이 더하리라’고 번역된 부분은 영어 성경이나 원어에 의하면 ‘지식이 매우 증가하리라(rabah, multiply)’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게으르지(둔감하지) 않고 다만 믿음과 인내를 통해 약속들을 상속받은 자들을 본받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위의 번역도 메시지 전달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원어와 단어 구성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그분보다 더 큰 맹세의 대상이 없으므로 자신을 두고 맹세하셨기에”입니다.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위 번역대로 좋습니다.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원어에 좀 더 맞는 번역은 “따라서 그가 오래 인내한 후에 약속을 얻었느니라“입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위의 번역은 메시지 전달이 어색합니다.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더 큰 자를 두고 맹세하며 그들의 모든 분쟁을(다툼을) 맹세의 확증으로(인준으로) 끝내기에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위의 번역도 괜찮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상속자들에게 그분의 불변하는 계획(뜻)을 더욱 풍성히 보여주시기를 원하셨기에 맹세로 보증하신 것이라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18절은 모든 한국어 성경에 잘못 번역되어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번역했고 흠정역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불변하는 것”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번역입니다. 분명 ‘이 두 가지 것(사실)’이라고 되어 있는데, 거짓말하실 수 없다는 것만 말한다면 한 가지가 아닌가요? 이런 오류는 원어에 있는 단어들을 제대로 배열해서 번역하지 못했기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원본에는 ‘거짓말하는 게 불가능하시다는 것’과 ‘그로 인해 변할 수 없으시다(불변하신다)는 두 가지 포인트입니다.

그리고 ‘안위’로 번역된 헬라어 ‘paraklésis(파라클레이씨스)’는 ‘부르다, 격려하다, 위로하다, 권고하다, 촉구하다’란 의미입니다. 또한 안위 앞에 개역개정은 ‘큰’으로 흠정역은 ‘확고’로 번역한 헬라어 ‘ischuros(이스쿠로스)’는 ‘힘이 강하다, 강력하다, 확고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이는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게 불가능 하시기에 불변하신다는 두 가지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피난처로 도피한 우리가 강한 위안을(격려를) 얻을 수 있도록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위 구절에 ‘튼튼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asphalés(아스팔레이스)’는 ‘확실한, 믿을 수 있는, 안전한’이란 뜻입니다. ‘견고하여’로 번역된 ‘bebaios(베바요스)’는 ‘단단하다, 튼튼하다, 확실하다’란 뜻인데, 특별히 ‘흔들림이 없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혼의 닻과 같은 이 소망은 확실하고도 확고부동하여 휘장 안의 그곳으로(지성소)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토록 대제사장이 되신 선구자(forerunner) 예수께서 우릴 위해 들어가신 곳이라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나? – 율법과 성령의 법

제 글에 대한 코멘트를 받는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2018년 여름에 쓴 (제 첫 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 가운데 두셨는가?“란 글에 대한 코멘트를 받고 감사했습니다. 요즘엔, 성경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쉽지 않고, 자신이 믿는 바를 성경으로 논증하며 풀어내는 사람을 만나는 건 더욱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코멘트를 보내주신 분의 의견에 동의를 하는가 안 하는가를 떠나서, 이렇게 말씀을 탐구하고 성경을 들어 증명할 수 있는 분의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습니다. 다음은 그분이 보내신 코멘트입니다. 자기소개 부분은 뺐습니다.

“위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를 두셨는가? 라는 질문에 성경적으로 답변을 제공하려고 노력하신 마음이 참으로 귀한것 같습니다. 몇가지 제 생각을 나누려 합니다. 먼저 본문 글 가운데  하와가 동산 중앙 나무를 언급할때 생명 나무를 (의도적으로) 빼고 또 먹지만 말라고 한 하나님 말씀을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해 마치 만지기만 해도 죽는다고  하와가 의도적으로 상황을 왜곡했다는 해석을 하셨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감추고 숨은 불만은 드러내 마귀에게 빌미를 줍니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동상 중앙에 선악과를 두고 먹지 말라고 하셔서 죄의 빌미를 주셨는가? 라는 질문에 잘못을 하나님으로 부터 하와로 이전 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성경적으로 또 복음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선악과를 따먹기 전 하와가 이미 불만, 의심, 왜곡, 거짓말이란 죄를 지었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죄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 함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로마서 5:12)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로마서 5:19)

아담(과 하와) 가 선악과를 먹어 불순종 하기 전에는 세상에 죄는 없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부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불만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왜곡하고 거짓말을 할수 있는 상태 였다면 로마서 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도 거짓이 됩니다. 첫 번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이미 죄가 마음에 들어온 상태라면 거룩한 하나님과 에덴 동산에서 함께 거닐며 교제할 수 없습니다. 

둘째 하와가 선악과 이전에 이미 죄를 지었다면 로마서 5장 말씀과 또 그리스도의 구속도 거짓말이 됩니다. 죄가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 세상에 들어 왔다면 죄의 해결도 둘째 아담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다른방법으로 먼저 해결할수 있는것 입니다. 오직 죄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세상에 들어온 것이고 동일하게 죄의 해결은 둘째 아담 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온 세상에 예수님을 믿는자들에게 사하심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전 하와는 뱀의 질문에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직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요구 하시는 하나님의 standard  이십니다. 죄에 (선악과) 대하여 만지고 가지고 놀아도 되지만 먹지만 말라라고 요구하시는것이 아니라 철저한 분리와 순종을 요구 하시는것 입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22)

우리가 죄에 대하여 가까지 가고 만지지만 선만 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은 성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과 반되대는 초등학문에 대하여서도”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로새서 2:21) 라고 말씀 하신 것 입니다.

위의 해석은 “왜 하나님께서 굳이 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를 두셔서 인간이 범죄하게 하였는가?” 라는 하나님의 도덕을 challenge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는 가운데 나온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동산 한 가운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두는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라는 전제에 동의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은혜, 주권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세상의 모든 생물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또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나는 열매를 자유롭게 먹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과 권세 가운데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는 하나님의 질서와 은혜와 주권을 상징하는것 입니다. Boundary 가 없는 자유는 곧 무질서와 혼돈을 가져다 줍니다.  한계가 없는 권력은 교만과 타락으로 이어질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질수 있는 세상에서는 감사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모든 것이 자유로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boundary  안에서 자유라는 질서를 제공해 줍니다. 선악과는 모든 권력이 주어진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인간 위에 계시다는 주권을 인정하게 해 줍니다. 선악과는 모든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게 해 줍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때 진정한 참 자유와 권세와 질서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영원히 축복 가운데 살수 있는 것 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에 중요한 장치 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볼수 있는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신것입니다. 제 의견에 대한 질문이나 코멘트도 자유롭게 나누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이 글에 대한 저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보냈습니다. 밑줄 친 부분은 보냈던 답글에 미처 포함 못 했던 부분을 덧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에덴 동산 한 가운데 두셨는가?“를 먼저 읽어보시고 싶은 분은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안녕하세요. 저의 글에 관심 가져주시고 이렇게 정성껏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하와가 동산 중앙 나무를 언급할 때 생명 나무를 의도적으로 빼고, 또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한 것, 하와에게 숨은 불만이 있었다는 것을 ‘죄’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세상은 죄가 없는 세상이기에 불만, 의식, 왜곡, 거짓말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죄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 함으로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라고 써주셨는데,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불순종’은 죄일까요 아닐까요 라는 것입니다. 만약 불만을 갖는 것이 죄라면 불순종하는 것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무죄하다고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는 세상인데 아담은 어떻게 불순종하는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예전에 이런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하나님은 왜 다른 사람들이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시고 오히려 보호해 주셨을까? 성경은 분명 살인한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왜 가인에겐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그 질문은 오랜 탐구 끝에 답을 얻었었습니다. 가인이 살인하던 당시에는 살인에 대한 법이 없었습니다. 처음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 있었던 법은 딱 하나. “선악과는 먹지 말라”였습니다. 그 법만 어기지 않는다면 ‘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유일한 법을 어기는 행위는 ‘선악과를 먹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후 가인이 살인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벌하지 않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노아의 홍수 이후, 살인에 대한 법을 주십니다.

창세기 9장 4-6절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노아의 홍수 이후로는 살인하는 사람은 법을 어겼기에 죗값으로 죽어야 합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길에서 스피드 사고가 너무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일정 스피드를 넘기면 안 된다는 표지판이 생깁니다. 그 표지판이 생기기 전에 그 스피드 이상으로 다녔던 차량들은 죄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법이 없었고 그래서 어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스피드 판이 생기고 난 후 어긴다면, 죄가 되고, 잡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고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는 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추리하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질 수 없는 존재라면 자유의지나 사고를 가진 존재가 아닌 로봇이었겠지요.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그당시엔 죄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보면 죽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아무 벌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 육신의 시조가 되는 유다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야곱은 두 아내를 두는데, 하다못해 친자매들입니다. 레위기와 신명기에 보면, 이런 행동들은 하나님이 절대 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행동이며 돌로 쳐 죽여야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돌에 맞아 죽기는커녕 믿음의 조상들이 됩니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아직 그런 법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아주 간단한 법을 어김으로 죄가 성립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담의 때에 유일한 ‘죄’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명령을 어기고 먹는 것이었고,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 죄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 후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하나 더 생겼고, 그 이후로는 우리도 알다시피 모세가 율법을 받는데, 다양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금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에 넘어와서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닌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금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의 서신서들을 보면, 마음으로 짓는 모든 것들, 탐욕, 불만, 시기, 질투 등등을 모두 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시점의 시각으로 보면 목사님의 말처럼 하와가 품은 마음은 죄가 되고,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지시겠지만, 그때는 전혀 죄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유일하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만이 죄가 됩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원이겠지요.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새로운 법이 생겼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생명나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믿으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어 죽었던 것에서 먹으라는 생명나무를 먹으면 사는 것입니다. 또한 처음 법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 8:1)”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들은 대로 말한 것이라는 목사님의 추론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면, 2장 16절에서 17절에 그렇게 쓰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긴 분명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만 되어 있지 “만지기만 해도 정녕 네가 죽으리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부풀려서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 네가 죽을까 하노라”하셨다고 한 것은 반쪽짜리 사실임으로 거짓말입니다. 그 틈을 거짓의 아비인 사단이 바로 틈타고 들어와 “결코 네가 죽지 않으리라!”고 맞장구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단도 하나님께 할 말이 있습니다. 난 하와가 하나님께서 만지기만 해도 죽는다고 하셨다길래 결코 죽지 않는다고 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적힌 그대로 읽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괴변이 되고 거짓의 아비에게 빌미를 주어 죄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 적힌 말씀이라고 다 같은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인지, 아닌지를 두고 분별하고 나누어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성경 말씀을 적힌 그대로 읽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는 부분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의 자세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않으려고 하는 것은 정말 바람직하고 좋은 것입니다. 유혹에 약한 인생들이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기에 난 근처에도 안 간다고 하는 거랑 하나님이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하셨다고 하는 거랑은 분명 다릅니다. 더구나 성경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을 초등학문에 비유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골 2:21-22). 이제 이런 것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와 복음인 성령의 법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목사님이 쓰신 “위의 해석은 “왜 하나님께서 굳이 동산 한 가운데 선악과를 두셔서 인간이 범죄하게 하였는가?” 라는 하나님의 도덕을 challenge 하는 질문에 대답을 하려고 하는 가운데 나온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동산 한 가운데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두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라는 전제에 동의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동산 한 가운데 있는 선악과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신 부분이 의아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의미로 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와 은혜, 주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쓰셨는데, 저야말로 ‘주권’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었기에 동의하면서도, 왜 제 글은 그런 시각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의아했습니다. 제 글의 다음 부분을 다시 한번 읽어봐 주시길 바라고 긴 글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코멘트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동산 중앙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두신 걸까요? 그 이유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는 말씀하신 것처럼 생명과 사망을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처럼 자연의 생성 법칙이었기에 생명 나무에서는 먹고 영원히 살라, 그러나 선악과는 네가 죽게 될 터이니 먹지 말라고 단순한 ‘팩트’를 일러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진리이신(팩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게 생명이요, 불신하고 따르지 않는 게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우리 몸은 원래 영원히 살게 만들어졌는데 죄가 들어와 죽게 된 거라고 흔히 듣던 말도 반쪽 사실이므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지어졌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도록 지어진 존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만물에겐 중력의 법칙처럼 벗어날 수 없는 법칙입니다. 단, 선택의 여지 없이 그리되는 세상 만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들은 자기 의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만 명령하신 게 아니라 생명 나무에서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좇아 생명 나무에서 먹으면 영원히 사는 거였고 먹지 않으면 죽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않았어도 생명 나무에서 먹지 않으면 그들은 결국 죽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면 단지 선악과를 따먹는 것만으로 죽는 거였으면 아담과 하와를 생명 나무에서 먹고 영원히 살지 못하도록 동산에서 쫓아낼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은 말씀하셨던 이 두 가지의 명령을 모두 순종해야 살 수 있었던 것이지 그중 한 가지만 지킨다고 살 수 있었던 존재가 아니었고 한 가지만 이행하는 건 불순종이었습니다. 즉, 생명 나무와 선악과에 관한 명령은 ‘and’이지 ‘or’가 아니었던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생명 나무에선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면 영원히 살 수 있었던 것이고 둘 중 한 가지만 이행하는 건 불순종(죄)이며 죽게 되는 거였습니다.

성경은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중간 과정까지 말하면 죄를 범하여 생명 나무가 금해짐으로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법을 따를 수도 있고 안 따를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속이려 오는 마귀에 대해 아셨고 또 속을 것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라고 그 나무들을 주셨던 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명기에서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내 말씀을 읽고 가르치고 지키라면서,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고 하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늘 생명을, 복을 택하라고 하지만 우리는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기에 마귀의 올무에 걸려들게 된 것이고, 그것조차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의 어린양으로 준비해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 대신 죄가 되어 사망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우리가 그분에게로 와 먹으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생명 나무가 되셨습니다. ”

히브리서 5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원어에는 있는 한 단어가 개역개정에는 빠져있습니다. 바로 ‘lambanó(램배노)’란 단어인데, ‘받다, 갖다, 취하다, 잡다’란 뜻입니다. 특히 본절에 쓰인 ‘lambanomenos(램배노메노스)’는 파생어로 ‘취해진’ 상태를 나타내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보니까 흠정역엔 이 단어가 번역되어 있긴 합니다.

또한 ‘택한’으로 번역된 어원 ‘kathistémi(캐띠스테이미)’는 어떤 직책이나 일을 하도록 ‘지정하다, 임명하다, 세우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들 가운데서 취해져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임명되나니, 그가 죄들을 위한 희생제물과 예물을 드리게끔 하려 함이라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에서 ‘무식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agnoeó(애그노에오)’는 ‘잘 모른다, 못 알아본다, 무식하다’란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의미까지 포함됩니다. 원어 공부를 하며 번번이 느끼는 것은 그 단어가 갖는 뉘앙스는 번역으로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국어가 갖는 독특한 의미와 뉘앙스는 그걸 쓰며 자라온 한국인들만 알 수 있는 부분이 꽤 있는 것처럼 성경의 원어를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하다 보면, 자연히 잘못 번역되는 부분, 아니면 좀 더 나은 번역이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던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몇 달 전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니까 한국어 대사를 영어로 얼마나 잘못 번역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나오는 걸 보았습니다. 그것에 대해 ‘직역을 해야 했다’, ‘아니다 이렇게 의역한 게 잘 한 거다’란 의견으로 다투는 일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떤 부분은 의역도 아니고, 직역은 더욱 아니고, 아예 오역한 부분도 있어서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어떤 시리즈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보게 되니까 그 시리즈를 만든 나라에서는 내용이 정확하고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좀 잘못된 부분이 있다해도 내용이나 흐름 자체가 이해 안 된다거나, 인기를 못 얻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세상의 유명한 영화 갖고도 오역되는 걸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성경에 대해 우린 과연 얼마나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는가 생각했습니다. 구약은 어렵기로 유명한 히브리어로 쓰여졌고(히브리어는 모음이 없기에 자음으로만 쓰인 단어들을 문맥에 따라 모음을 넣어 이해해야 하는 언어입니다),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기에, 그 원어의 의미가 온전히 전달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더구나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하다 보니 오역된 부분도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고, 의역된 부분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문화나 전통이 달랐기에 무슨 의미인지 이해 안 되는 표현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게 되는 것은 마치 번역된 오징어 게임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게 의역인지, 잘못 오역한 건지 알지 못한 채 재밌게 보듯이, 우리도 번역된 성경으로만 읽게 되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게 된다는 것을 원어 공부를 하며 자주 느낍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록하신 성경을 최대한 바로 알기 위해, 원어도 연구하고 주석도 찾는 노력을 하게 되면, 그 구절에 대한 의미가 풍성해지고 한결 또렷해지는 많은 유익을 경험합니다.

다시 본절로 돌아가, ‘미혹됐다’로 번역된 헬라어 ‘planaó(플래나오)’는 ‘헤매다, 속다, 길에서 벗어나다, 길을 잃다’란 의미입니다. ‘용납’으로 번역된 헬라어 ‘metriopatheó(메트리오패떼오)’는 유일하게 히브리서 5장 2절에 나오는 단어입니다. 의미는 ‘수용하다, 동정하다’는 의미로 ‘측은지심’입니다.

‘능히’로 번역된 ‘dunamai(두나미)’는 ‘능력이 있다, 힘이 있다, 할 수 있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이 이렇게 모르는 체하거나 속아 헤매는 사람들을 능히 동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3절에 이어지듯이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모르는 척하고 길을 잃은 사람들을 능히 수용할 수(측은히 여길 수) 있음은 그 자신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3절에서 ‘마땅하니라’로 번역된 ‘opheiló(오파일로)’는 ‘빚을 지다, 의무가 있다’란 뜻입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빚을 갚듯이, 의무를 이행하듯이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마땅하다’ 보다 강제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이래도 면죄부를 받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같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백성들을 위해서만 속죄제를 드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그가 백성을 위해 죄들을 위한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서도 드려야 할 의무가 있느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에서 ‘존귀’로 번역된 ‘timé(티메이)’는, ‘가치, 가격, 존귀, 영광’이란 의미입니다. 즉 대제사장이란 직분은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지, 스스로한테 그런 ‘가치를’ 준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의미입니다.

‘부르심’으로 번역된 ‘kaleó(칼레오)’는 ‘부르다, 소집하다, 초청하다’란 의미입니다. 즉 대제사장직은 스스로 자길 높게 생각해서, 난 그럴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초청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아론이나 우리 인간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도 해당하는 것임을 이어지는 구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 누구도 스스로 존귀(가치)를 취할 없으며 오직 아론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초청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는 본절은 시편 2장 7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도 본인 스스로 그런 영광을 취한 게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주신 것이란 의미입니다. 또한 모든 한국 성경엔 ‘대제사장 되심도’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genēthēnai archierea‘는 ‘대제사장이 되기 위해(to become High Priest)’ 혹은 ‘대제사장이 되려고’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참고로 영어 성경은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맞는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제사장이 되려고 스스로 영화롭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리하신 것이라.”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이 구절도 시편 110편 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난히 구약의 성경 구절, 특히 시편을 많이 인용하는데, 특별히 구약에 능통한 유대인들에게 구약에서 점진적으로 계시 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흠정역이 원어에 좀 더 맞게 번역했기에 옮깁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또한 다른 곳에서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심과 같으니라.’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본절은 잘못 번역된 부분이 몇 있습니다. 일단 ‘간구와 소원’이라고 된 부분은 ‘기도와 간구’입니다. 그리고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에서 ‘경건’으로 잘못 번역된 어원은 ‘eulabeia(유라바이아)’로 ‘두려움, 경외’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 기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동등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공경하며 또 경외하셨습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육체의 나날 동안 그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올리셨으며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아들이시면서도’에 함축된 원어 ‘kaiper(카이퍼)’는 ‘~에 불구하고, ~하더라도’ 등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고난으로 말미암은(고통당함을 통한) 순종을 배우사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온전하게 되셨은즉’에서 ‘온전’으로 번역된 ‘teleioó(텔리우)’는 ‘끝마치다, 완성하다, 달성하다, 완전(완벽)하다’란 의미로 특히 경주를 완주하다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계약이나 결혼식의 완성, 즉 ‘합방하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근원’으로 번역된 ‘aitios(아이티오스)’는 ‘근원, 창시자’란 뜻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근원이) 되시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에도 동등하심을 취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본을 먼저 보이셨기에 앞으로 예수님께 순종하며 나아갈 모든 자를 위한 영원한 구원의 시초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위 번역도 괜찮고 흠정역 번역도 괜찮습니다. 다음은 흠정역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이라 불리셨느니라.”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에서 ‘둔하다’로 번역된 ‘nóthros(노뜨로스)’는 ‘느리고 나태하다’란 뜻으로 특별히 영적으로 둔하고 무딘 상태를 말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우니라’로 번역된 ‘duserméneutos(두세르매네유토스)’는 본절에 유일하게 나오는 단어로 ‘해석하기 힘든, 통역하기 어려운, 설명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힘든’이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멜기세댁) 관해서는 우리가 말할 것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에 둔해져 버린 탓에(epei nōthroi gegonate:because you have become sluggish) 설명하기 힘드니라.‘ 즉, 원어 문법에 따르면 늘 둔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둔해져 버린 것입니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에서 ‘때’로 번역된 ‘chronon(크로논)’은 시간을 말하는 ‘크로노스’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순차적으로 흘러간 시간에 따르자면 너희는 이미 선생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본절에서 ‘단단한 음식’에서 ‘단단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stereos(스테레오스)’인데 ‘단단한, 튼튼한, 견고한’ 등의 의미로 신약에 4번 쓰였습니다(딤후 2:19; 히 5:12, 14; 밷전 5:9). 그리고 ‘젖’이란 의미의 어원인 ‘gala(갈라)’가 쓰인 구절은 총 5번 나오는데(고전 3:2; 벧전 2:2 외 다음 3구절), 그중 파생어 ‘galaktos(갈락토스)’가 3번 나옵니다(고전 9:7; 히 5:12, 13). 베드로는 우리에게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면서 말씀을 젖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그건 특별히 하나님 안에서 막 태어난 자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말씀의 초보’에서 ‘초보’로 번역된 ‘stoicheion(스토이카이온)’은 신약에 총 7번 쓰이는데(갈 4:3, 9; 골 2:8, 20; 히 4:12; 벧후 3:10, 12), 쓰인 구절들을 읽어보면 흥미롭습니다. 본래 의미는 한 줄, 알파벳의 한 자를 의미하는 기초와 기본 원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알파벳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본은(NIV) 이 구절을 ‘초등 원리’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마치 우리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가야 하듯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면 신앙의 연륜에 맞는 교훈을 받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에는 빠져있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시작, 시초, 처음, 첫째, 으뜸, 대장’ 등을 의미하는 ‘arché(아르케)’에서 파생된 archēs(아르케스)란 단어인데 신약에 총 27번 나옵니다(이 구절들을 훑어보고 싶은 분들은 해당 단어를 누르시면 바로 연결됩니다). 보니까 흠정역에는 이 단어가 더해져 있긴 합니다.

여기에 ‘필요가 있다’란 의미의 ‘chreian(크라이안)’이 두 번 나오는데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덧붙이고, 원어엔 있는 ‘무엇, 누군가’를 뜻하는 ‘tina(티나)’가 빠져 있어 덧붙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첫 기초(초등) 원리가 무엇인지(누구인지) 너희에게 다시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너희가 단단한 음식이 아닌 젖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되었도다‘입니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린 아이’로 번역된 ‘népios(네이피오스)’란 단어는 1살 미만의 어린 아이(infant)를 말하거나 단순하고 미성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경험하지 못한’으로 번역된 ‘apeiros(앱파이로스)’는 ‘경험이 없는, 기술이 없는, 무지한’이란 의미입니다. ‘젖을 먹는’에서 ‘먹는’으로 번역된 ‘metechó(메테코)’는 신약에 8번 나오는데, ‘함께 먹다, 함께 마시다, 함께 나누다, 참여하다, 동참하다’란 의미입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젖을 함께 먹는 모든 자는 의의 말씀에 무지하나니(경험이 없나니) 그가 어린아이기 때문이라‘입니다.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본절에 ‘지각을 사용함으로’에서 ‘사용한다’로 번역된 ‘hexis(헥시스)’는 ‘습관, 연습, 실행, 실천’을 뜻합니다. 즉, 지속해서 끊임없이 사용하며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연단을 받아’에서 ‘연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 ‘gumnazó(굼내드조)’는 ‘운동하다, 연마하다, 단련하다’란 의미인데 특히 벌거벗거나 최소부위만 가린 채 트레이닝할 때 쓰이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인들은 주로 이런 극심한 방식으로 힘써 트레이닝에 몰두했다고 하는데, gymnasium(Gym:체육관)이 여기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즉, 지각을 지속해서 힘써 연마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갖다, 소유하다’란 의미의 ‘echo(에코)’란 단어가 본절에 나오지만 한국어 번역에는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분별하다’로 번역한 ‘diakrisis(디아크리시스)’란 단어는 신약에 딱 3번 나옵니다(롬 14:1; 고전 12:10; 히 5:14). ‘구별하다, 판단하다, 분별하다’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니 그런 습관으로(실천으로) 단련된 지각을 가짐으로(echó:갖다, 소유하다) 선과 악을 분별(판단)하느니라.’

히브리서 4장 원어/영어 분석 연구

히브리서 4장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두려워할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phobeó(포베오)’로 ‘공포스럽다, 두렵다, 놀라 떨다’인데, 우리가 잘 아는 포비아(phobia)가 여기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남아 있을지라도’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kataleipó(카탈리포)’로 ‘떠나다, 저버리다, 포기하다, 놔두다, 남기다’란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24번 나오는데, 항상 ‘포기하다, 떠나다, 저버리다’ 등의 의미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라고 된 번역은(영어 포함) 잘못된 번역입니다.

또한 ‘이르지 못할’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 ‘hustereó(후스터레오)’는 ‘뒤처지다, 부족하다, 모자라다, 열등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6번 쓰이는 단어인데 꽤 유명한 구절들에 등장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부자청년이 예수님께 ‘그 모든 계명을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으니 내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마 19:20, 막 10:21)’라며 당당히 묻던 단어이며,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했으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fallen short of the glory)’에 쓰인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어에 충실히 번역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약속을 저버림으로(떠나므로) 혹여 너희 중 누구라도 부족하게 여겨질까(뒤처질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보다는 ‘우리도 그들처럼 복음을 선포 받았었지만’로 번역하는 게 원어에 더 가깝습니다.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에서 ‘결부’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 ‘sugkerannumi(숭커라누미)’는, ‘함께 섞다, 동의하다, 화합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우리도 그들처럼 복음을 선포 받았었지만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했던 것은 들은 자들의 믿음과 함께 섞이지(화합하지) 못한 탓이라.‘입니다.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좀 더 원어에 맞게 쓴다면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미 믿은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는 도다, 내가 노하여 맹세했던 것처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나, 세상이 창조되던 때부터 그 일들은 이뤄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좀 더 원어에 맞게 쓴다면, “그분께서 제칠일에 관하여 어딘가에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자신의 모든 일에서 안식하셨다, 하셨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좀 더 원어에 맞게 쓴다면, “다시 이 대목에서,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apoleipetai) 있거니와”는 썩 잘된 번역까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개역개정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로 번역된 헬라어 ‘apeitheia(앱파이띠아)’는, 특별히 의도적으로 믿지 않으려 하고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느 번역본이냐에 따라 ‘불신’ 혹은 ‘불순종’으로 번역합니다.

그리고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라고 번역된 헬라어 ‘ouk(~하지 않다) eisēlthon(들어갔었다)’은 ‘들어가지 않았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원어에 맞습니다.

원어에 충실한 번역은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안식) 들어갈 어떤 자들이 남아있게 된 것이며, 먼저 복음을 받았던 자들은 불순종(불신)함으로 들어가지 않았었던 것이니라

위 구절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예정론에 대한 지혜를 조명받습니다. 4절과 5절엔 반복해서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6절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불신(불순종)함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관점에서는 ‘들어오지 못했던 것’이고 사람들의 자유의지적 관점에서는 ‘의지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은 이처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서 동전의 앞면이냐 뒷면이냐 정도는 구분하겠지만 그렇다고 나뉠 수는 없으며 결국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와 ‘예정’에 대한 신학적 다툼은 불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위의 번역은 마치 다윗이 주체인 것처럼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원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다윗의 시편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니까 위 번역처럼 해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본에는 유추할 필요도 없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한국어 성경에 다윗의 ‘글’로 번역된 헬라어 ‘legōn(레곤)’은 신약에 179번 나오는데, 모두 ‘말하다, 말씀하다’로 번역합니다. 또한 다윗의 이름 앞에 붙은 ‘en‘이란 전치사는 ‘~안에, ~통해’란 뜻으로 ‘en Dauid legōn(엔 다위드 레곤)’은 ‘다윗 안에서 말씀하시는’ 혹은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는’이 됩니다. 모든 영어 성경은 이 부분을 ‘saying in David‘ 혹은 ‘spoke through David‘으로 번역했으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이와 비슷한 예가 히브리서 1장 1절과 2절에 나오니 히브리 1장 원어 연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윗글을 원본에 맞춰 번역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분께서 다윗 안에서(다윗을 통해) 말씀하시며 어떤 날을 오늘이라 지정하시나니 이는 곧,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 바와 같도다.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좀 더 원어에 맞는 번역은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분께서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입니다.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 구절에서 쓰인 ‘안식’은 다른 구절에서 쓰인 ‘안식’과는 다른 단어입니다. 히브리서의 다른 구절들에 쓰인 안식은 ‘쉬었다, 멈추다’란 의미의 헬라어 ‘Katapausis(카타포시스)’ 혹은 ‘katapauó(카타파우오)’에서 파생된 단어들인 것에 반면 이 구절에 쓰인 헬라어는 ‘sabbatismos(싸바티스모스)’로 신약에 딱 한 번 나옵니다. 즉 ‘안식일의 쉼‘을 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6일간 창조하실 때, 그날이 끝나고 다음 날이 왔음을 얘기하지만 2장에서 제칠일에 쉬셨다고 하는 부분에서 일곱째 날이 끝났다고 한 부분은 없는 것과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창조 때의 제칠일에 관해 나오는 3-5절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어에 맡게 번역하면 ‘그런즉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안식일의 쉼이 남아 있도다‘입니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좀 더 원어에 맞게 한다면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에서 그러하시듯이, 자기 일들로부터 안식을 얻느니라’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위 번역대로도 괜찮습니다. 여기서 ‘순종하지 아니하는’으로 번역된 ‘apeitheias(애피띠아스)’는 6절에 설명했듯이, 의도적으로 일부러 불신하거나 불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구절은 꽤 유명한 구절인데, 번역이 좀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좌우에 날선(distomos)’이라고 된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마치 칼날이 왼쪽, 오른쪽으로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양면이 날선’이라고 해야지 원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칼엔 칼등이 있고 칼날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 면이 다 날카롭다는 것입니다.

이 ‘distomos(디스토모스)’란 단어는 신약에 딱 3번 나오는데, 이 구절 외에 나머지 두 번은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에 대한 묘사로 쓰입니다.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6)”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계 2:12)”

요한복음 1장 1절과 14절에서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서술하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과 계시록을 비추어 볼 때 히브리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이다’는 도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좌우에 날선 검 =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한쪽만 날카로운 일반 검이 아닌 양쪽이 다 ‘tomos(토모쓰)’ 즉 예리한데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나눌 수 있는 것을 양쪽으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에서 ‘찔러’의 헬라어 어원은 ‘diikneomai(디익네오마이)’로 ‘관통하다, 통과하다, 찌르다’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쪼갠다’로 번역된 헬라어 어원은 ‘merismos(메리스모스)’로 ‘분리하다, 나누다’란 뜻입니다. 또한 ‘활력’으로 번역된 헬라어 ‘energēs(에너게이스)’에서 ‘에너지’가 파생된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이라고 된 부분도 더 맞는 번역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ennoiōn)’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골수와 관절까지 관통해서 우리의 생각과 의도가 무엇인지 다 나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은 ‘심판’이랑 같은 단어입니다.

따라서 위 구절을 원어에 맞게 번역한다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활력(운동력) 있고 양쪽 면이 어느 칼보다도 날카롭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 관통해 나누기까지 하며 생각들과 마음의 의도들을 심판(판단) 있느니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의도를 남에게 감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자신을 속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꿰뚫고 있다니, 심판주로 오실 주님 앞에 떨리는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를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그 어떤 창조물도 그분 앞에는 감춰질 수(aphanés) 없다’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발가벗겨지고(gumnos) 오픈(tetrachēlismena)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tetrachēlismena(테트랙케이리스메나)’의 어원인 ‘trachélizó(트렉케이릿쪼)’는 ‘목덜미를 잡힌 상태, 널브러진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죄수를 참수하기 위해 목을 뒤로 젖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위 구절을 원어에 맞춰 번역하면, ‘그 어떤 창조물도 그분 앞에 감춰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de) 우리의 보고(logos)를 받으실 분의 눈 앞에 모든 것이(만물이) 발가벗겨지고 드러나느니라‘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남의 눈을 속이며 애써 포장하고 나 자신에게도 위장하며 있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눈 앞에서 벗겨지고 그 실체가 드러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14절이 주는 위로와 평안은 12-13절의 적나라한 의미가 온전히 전달된 후에야 더 깊이 느껴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위 구절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승천하신’으로 번역된 것을 원어 그대로 옮긴다면, ‘저 하늘들을(tous ouranous) 통과하신(dielēlythota)’이 맞습니다. 그리고 ‘믿는 도리’로 번역된 헬라어 ‘homologias(호모로기아스)’는 히브리 3장 원어연구에도 적었듯이, 신앙고백입니다. 좀 더 바로 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기에(oun) 저 하늘들을 통과하신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의 신앙 고백들을 굳게 붙들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위 구절은 그대로 좋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위 번역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원어에 좀 더 맞는 번역은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려(찾으려:heurōmen) 은혜의 보좌(왕좌)로 담대히 나아갈지니라”

*** 알림 글 *** 고등학교부터 미국서 교육받았지만, 작문은 영어보다 한국어가 편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교육받았기에 영어가 수월합니다. 그런 저에게 하나님은 성경을 연구하게 하셨고 성령으로 조명해주셨습니다. 지난 몇 년간 90개의 글을 올리며 내심 안타까웠던 것은 한국어 성경이 원어나 영어와 비교했을 때 상당 부분 오역되어 있거나 뜻이 불분명하게 번역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내 글을 쓰기 보다 그런 단어와 구절들을 원어 중심으로 풀어 올리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천적/후천적으로 주신 달란트를 가장 잘 쓰는 방법은 원어나 영어로 된 성경 구절들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작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본문 구절과 함께 연결 구절도 덧붙이고 직접 원어와 뜻을 볼수 있도록 링크를 걸어놓겠습니다(파란색 단어들을 누르시면 됩니다). 원어사전은 스트롱스입니다. 누구든 필요하시면 자유로이 인용하시길 바랍니다. 우선 히브리서로 시작하나 성경의 특정 부분, 또는 구절의 원어/영어 분석을 원하시면 코멘트나 이메일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