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서론 및 개요

들어가는 말…

이제부터는 요한복음을 강해하려고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지만 요한복음은 요한계시록처럼 한 차원 다른 성령의 계시와 지혜로 충만한 책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책이나 설교를 통해 접하는 가공된 말씀이 아닌 고운 밀가루처럼 순수한 성경의 말씀을 지속해서 통독하고 그 말씀 위에 성령께서 기름으로 눈을 밝혀주셨을 때 깨달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공관복음서가(마태, 마가, 누가) 모두 기록되고 난 후 에베소에서 요한이 썼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난 순서대로 적은 책이라면 요한복음은 주제별로 적은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에 초점을 맞춘 책이며 요한계시록처럼 성령의 인치심이 뚜렷한 숫자 ‘7’의 책이기도 합니다.

공생애 예수님은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지만,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엔 특별히 선정된 7 표적((7 signs)만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물을 포도주로(2:1-11), 2.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고치심(4:43-54), 3.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9), 4. 5000명을 먹이심(6:1-5), 5. 물 위를 걸으심(6:16-25), 6. 장님으로 태어난 자를 고치심(9:1-41),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44).

또한 7명의 사람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합니다. 1. 침례 요한(1:34), 2. 나다나엘(1:49), 3. 베드로(6:69), 4. 예수님(9:35; 10:36; 11:4), 5. 마르다(11:27), 6. 도마(20:28), 7. 사도 요한(20:31).

그리고 예수님이 ‘나는…이다’라고 선포하시는 ‘I Am statement’가 7번 나옵니다. 마치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I Am that I Am’이라고 모세에게 선포하듯이 예수님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 부분입니다. 1. 나는 생명의 빵이다(6:35, 48, 51),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9:5), 3. 나는 양의 문이다(10:7, 9), 4. 나는 선한 목자다(10:11, 14),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7. 나는 참포나무다(15:1).

약 10년 전 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이 3가지 세트들이 그냥 기록된 게 아니라 서로 연결된다는 점을 성령께서 조명해 주셨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씩 매칭하고 연결하며 큰 은혜를 받았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발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요한복음의 ‘7 I Am’, ‘7 기적’, ‘7 증인‘에 적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금 촛대(금등잔대)의 7줄기처럼 7개의 표적으로 뻗어나가는 상징적이고 계시적인 책이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보아스와 야긴)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의 시간과 영광의 시간(hour)’이란 두 기둥에 세워진 책이기도 합니다(2:4, 4:21, 23, 5:25, 28, 7:30, 8:20, 12:23, 27, 13:1, 16:21, 32, 17:1).

마태가 왕의 관점, 마가가 종의 관점, 누가가 사람의 아들이란 관점으로 쓰인 반면,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의 관점으로 쓰인 책입니다. 따라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엔 나오지 않았던 인물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요한복음의 주제에 맞춰 나오기도 합니다(나다나엘(1:45-51), 니고데모(2:23-3:21), 사마리아 여인(4:1-42, 음행한 여인(7:53-8:11).

또한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내용이 빠져 있는데 먼저 요한복음엔 족보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작과 끝이며(계1:8, 21:6, 22:13) 영원하신(창 21:33; 신 33:37; 사 9:6; 40:28) 하나님에게 족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상황에 대한 묘사도 없고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죄와 용서에 대한 회개의 외침도 없으며 침례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신 자세한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40일간 시험받으신 부분도 없고 귀신들을 쫓아내는 기록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12제자들을 택하시거나 70명을 내보내시는 기록이나 변화산의 변용에 대한 기록조차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기도’라는 단어가 예수님과 연관되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 ‘기도’를 검색해서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 마가 누가엔 예수님과 관련해서 수십번씩 등장하는 기도가 요한복음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원어로도 ‘기도하다’를 의미하는 ‘proseuchomai(프로슈코마히)’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서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며, 대신 ‘구하다, 묻다, 말하다’란 뜻의 ‘erōtō(에로토)’가 몇 번 나올 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생각되는 17장도,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9절에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의 ‘비옵나니’로 번역된 단어는 앞에서도 말한 ‘erōtō(에로토)’, 즉 ‘구하다, 묻다’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지 다른 공관복음서처럼 기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은 4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극명히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마태는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4:23)”라고 기록하고 마가는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막 6:46)”라고 기록합니다. 누가도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눅 9:18)고 기록하는데, 요한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5)”라고만 기록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상당히 놀라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굳이 승천에 대한 기록을 남길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공관복음서가 “하나님의 나라(왕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마태 55번 등장, 마가 20번 등장, 누가 46번 등장, 요한 5번 등장), 요한복음은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마태 7번 등장, 마가 4번 등장, 누가 5번 등장, 요한 36번 등장).

따라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선물로 주신 영생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기를 소원하며 강해로 들어갑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5 thoughts on “요한복음 서론 및 개요

  1. 감사합니다.

    구약을 창세기 부터 읽으며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민수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으며 함께 따라 가겠습니다.

    창세기를 공부하며 맘이 힘들었는데

    요한복음을 시작하셔서  전에 올리신

    요한복음의 ‘7 I Am’, ‘7 기적’, ‘7 증인’을 꺼내 읽고,

    읽을 때 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십니다.

    맘이 편해집니다.

    저는 3월에 21일에 한국에 갑니다. 한달 머물것입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십시요

    Liked by 1 person

    1. 소식 궁금했는데 업데이트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세기를 공부하시면서 마음이 힘드셨던 이유를 괜찮으시다면 나눠주실 수 있으신가요? 혹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여기에 답하셔도 되고 이메일로 보내주셔도 됩니다. 권사님의 성경공부를 위해 기억날 때마다 기도하겠습니다.

      Like

      1. 한국 시간으로 늦은 시간에 제가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창세기 1장을 시작하면서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에 빛을 지으셨는데
        14절~18절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들어 땅에 비취게 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빛을 이미 만드셨는데 그빛은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해,달,별들의 빛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다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제가 질문을 바로 했는지 모르겠네요.

        Like

      2. 좋은 질문입니다. 예전에 그 부분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어 보내드리니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첫째날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장 1-5절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천지창조의 내용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2절에서 땅은 이미 있었지만,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의 물 가운데 덮여있는 상태였습니다. 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했다고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생각을 얘기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성경에 나오지 않는 내용까지 다룰 필요는 없고-성경에 있는 내용만 다루자면,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 창조는 혼돈과 암흑의 물 밑에 있던 땅을 재정비하고 궁창,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 공간을 만드신 부분부터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지구의 나이를 계산해보면 수십억년 됐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창조 이후 기록된 인간의 역사는 현재까지 6000년입니다. 그러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게 되는데, 성경을 유심히 읽어보면, 땅을 창조한 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은 이미 있었고 물과 물을 나눠 궁창, 즉 하늘을 만드시는 장면부터 펼쳐진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구절별로 찬찬히 다시 잘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다 즉 비어있는 가운데 흑암의 물 밑에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빛을 부르십니다. 이에 빛이 생성되자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첫째날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또 기억해야 할 점은 해와 달과 별은 4째날이 되어서야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 여기서 나오는 빛과 어둠은 해와 달과 별이 주는 빛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우리가 생각하는 해를 기준으로 한 저녁과 아침의 하루 개념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날’하면 하루를 의미하고 영어로는 ‘Day’하면 하루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날’은 ‘Yom(욤)’인데, 복수형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날’을 의미하는 단수가 없습니다. 항상 복수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첫째날이라고 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루는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신약에도 조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8절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두 번 연속해서 하루와 천년을 비교하는 것은 증언의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증인은 늘 두 명 이상이어야 했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두 번 반복하시면 곧 반드시 그렇게 행하시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해와 달과 별은 4쨋날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하는 첫째 날, 둘째 날, 할때 ‘날’은 우리가 생각하는 해와 달을 기준으로 한 하루가 아니며 빛과 어둠도 해와 달과 별에서 나온 빛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엇입니까? 이것 역시 신약에서 조명합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이 여기서 얘기하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생명은 뭐라구요? 사람들의 빛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이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고 요한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첫째날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통해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창조사역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Like

      3. 감사합니다

        제가 email로 질문을 보낸것이 아니군요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 자세히 답변을 주셔서

        한구속에 무거운 맘이 개운해 졌습니다.

        용기 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교육하여 주시고 선한 교훈으로 약육해 주셔서

        믿음에 든든히 서는

        감사의 삶을 살겠습니다.

        저도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Liked by 1 person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