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구원 사역-한 번 구원은 영원한가?

사람이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일까요? 과연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이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원을 받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살펴보고, 구원을 잃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연구해 보는 것입니다.

먼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가 먼저 정의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영접 기도를 했거나, 교회에 출석하거나,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이 기독교 문화의 체험 중 일부가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본질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온전히 신뢰하여 성령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자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게 될 때, 그들은 구원이 영원히 보장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은 단순히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찬양 가운데 눈물을 흘리거나, 헌신적인 어떤 행동을 하는 것 이상입니다. 구원은 거듭나지 못한 죄인이 말씀의 물에 씻김 받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다시 태어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디도서 3: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겔 36:26-27절의 말씀처럼 용서받은 죄인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그 속에 새 영을 두셔서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게 하십니다. 또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연약한 우릴 위해 친히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십니다(롬 8장 26). 성경의 수많은 구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서 구원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의롭다 하는(Justified) 판결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의롭다 하시는 것은 의롭다고 법적인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으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기고 이전에 선고하신 것을 “번복”하셔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이 다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성한 법정에서 내린 판결을 뒤집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영생을 약속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영생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한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우리가 넘어질 때까지만 유지되는 생명이 아니라, 믿는 순간부터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만약 “영생”이 몇 년 후에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의상 “일시적인 삶”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으려면, ‘영생’이란 단어부터 재정의되어야 합니다. ‘영원’이 “영원”을 의미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Redeemed)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구속’이란 단어는 구매가 이루어졌고 대가가 지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대속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며(벧전 1:18-19)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그리스도의 신부임을 분명히 합니다(행 20:28; 고후 11:2; 엡 5:25-32; 계 21:9).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사신 바 되었기에 주인이 바뀐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으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을 치르고 사신 개인에 대한 구매를 스스로 취소하셔야만 합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개선된’ 버전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신자들은 믿을 때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납니다(요 3:3; 딛 3:5).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으려면, 거듭나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성경은 거듭남이 취소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일 4:15절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 또는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 것만 생각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으려면, 이 삼중 구조로 돼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완전히 파괴되어야만 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성부성자성령에 의해 3중으로 보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안전을 명확히 언급하시며, 그들을 “보존”하는 책임을 자신과 아버지의 손에 두셨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이 “이중의 손”, 즉 아들과 아버지의 손에 잡혀 있는 것은 존재론적 안전을 시사합니다. 만약 신자가 스스로 그 손을 놓고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본문의 “아무도”(자신 포함)라는 표현과 모순됩니다. 요 6:37-40절에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로마서 8장의 결론도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관계를 끊으려 시도하지만 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의 포괄적인 목록을 제공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신자 본인도 “피조물”이기에, 신자의 미래의 실패조차도 이 끊어지지 않는 약속의 범위 안에 포함됩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치심을 받았고 성령으로 봉인되었습니다. 엡 1:13-14절 말씀은 우리가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믿는 순간,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기업에 보증인이신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고 봉인됩니다. 그 최종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이 찬양받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인장은 소유권과 거래의 완료를 의미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께서 주신 “보증”(계약금)이라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찍으신 인장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증을 취소하시고, 약속을 어기시며, 기업을 빼앗고, 찬양을 포기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깎아내려야만 합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영화(Glorification)를 보장받았습니다. 성경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며 영화를 과거형으로 씁니다. 롬 5:1에 따르면 의롭다 하심은 믿는 순간 우리의 것이 되는데, 영화도 의롭다 하심과 함께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 말씀도 “허물로 죽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사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는 과거형으로 씁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 관점에선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시공간에 묶여 이 땅을 살아가야 하는 신자가 언젠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인들이 완벽한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만약 구원을 잃을 수 있다면, 롬 8:30과 엡 2:6은 오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모든 자에게 영화를 보장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잃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일어난다고 성경이 약속하는 거의 모든 내용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될 때 무효가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롬 11:29). 그리스도인은 다시 ‘새로 지음 받지 않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한 번 출생한 아기가 다시 출생 안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듯이, 구속된 자는 다시 ‘구매되지 않은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일시적일 수 없습니다. 성령은 모든 신자 안에 거하시며(요 14:17; 롬 8:9), 모든 신자에게 세례를 주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십니다(고전 12:13). 신자가 구원받지 못한 상태가 되려면 그리스도의 몸이 분열하고 분리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딛 1:2).

간혹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믿는 분들 중에는 내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거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성경이 진실되고 그 안에 있는 약속의 말씀이 영원한 진리라는 믿음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스스로도 그 믿음을 저버릴 이유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린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 앞에서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것 때문에 구원을 잃는다면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그를 회복시켜주신 예수님에 대한 내용이 성경에 적혀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고 말씀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히 4:15)”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제시되는 또 다른 주장 중 하나는 죄악되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이고 회개하지 않는 죄의 상태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요한1서 3:5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그리고 성경은 신앙을 떠난 사람은 그가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1 2: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는 종교적이었을 수도 있고, 훌륭한 연기를 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난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구약에서는 사울과 다윗, 신약에서는 유다와 베드로일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알다시피 사울과 다윗은 둘 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나님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둘 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허락하셨고 또 세우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울은 과연 구원을 받은 것일까 아닐까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사람들이 원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이고 다윗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신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 적이 없습니다. 사울왕이 등장하는 삼상 8장부터 31장을 한 번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무엘 당신의 하나님’으로 늘 얘기했고 하나님 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 받기를 원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는 시작부터 사람들이 원해서 세워지게 된 왕이었고 중간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여러 번 순종을 요구하셨지만 불순종했으며, 마지막까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미래를 점치다 죽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와 반대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셨고 “나의 하나님”이란 고백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밧세바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큰 죄를 짓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했고 용서받았으며 그것에 대한 죄값도 압살롬을 통해 치룬 사람입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또 어떻습니까? 유다 역시 예수님께서 12제자로 택한 제자 중 한명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또 쓰임받는다는 것을 구원으로 연결합니다. 하지만 반역하는 남왕국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선택하시고 쓰셨던 느부가넷살도 하나님은 “내 종(렘 25:9; 27:6; 43:10)”이라고 부르시지만 70년 후에는 그 바벨론의 왕과 그 나라를 벌하겠다는 약속을 함께 주십니다(렘 25:12). 북왕국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앗수르 왕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내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사 10:5)”고 말씀하시며 그가 징계의 도구로 선택받고 쓰일 것이지만 “주께서 주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하신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사 10:12)”하시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다 못해 열 재앙을 겪으면서도 계속해서 마음을 완악하게 하다가 홍해에 수장되어 죽은 에굽 왕 바로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출 9:1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잠언 16장 4절 말씀처럼 그 분의 목적에 따라 온갖 것을 그 쓰임에 맞게 지으셨고 악인도 악한 날을 위해 지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하나님께 선택받고 쓰임 받았지만 결국 구원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유다처럼 처음부터 사탄에 속한 자들이요 가라지였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71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마태복음 13: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0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예수님은 “주여 주여(마 7:21-23)”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까지 했던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자’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은 적이 없는 기만당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고 합니다.

유다와 달리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며 처음부터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정했지만 “네가 날 3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을 떠올리며 통회자복합니다. 그랬던 베드로를 예수님은 먼저 찾아오셔서 그를 회복시켜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 순교하는 자리로까지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롬 7:4).

이제 구원을 잃을 수 있을 것처럼 읽히는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첫째,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갈 5:1-4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율법을 더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신자들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이 오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전환됐습니다. 여기서 “은혜에서 떨어졌다(4절)”는 말은 구원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더 온전한 방식인 은혜에서 더 낮은 방식인 율법으로 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즉,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었는데 다시 할례라는 구약의 언약으로 의로움을 얻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합니다.

둘째, 불신앙 때문에 꺾인 가지인 이스라엘과 새로 접붙인 이방인에 대한 경고입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불신앙 때문에 꺾인 가지인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접붙인 가지인 이방인들에게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 것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교만을 교정하려는 ‘문화적/민족적 비교’이지, 개인의 구원 상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바울은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1:1)”라고 말한 후 이어지는 구절에서 엘리야 때에도 이스라엘에 바알에 무릎꿇지 않은 7000명을 남기셨던 것처럼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다라고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29절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결론짓습니다.

셋째,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대표적인 3 구절은 마 10장 22절, 24장 13절, 그리고 막 13장 13입니다. 이 구절들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경주를 완주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의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강해서라기 보다는, 끝까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들은 질문의 선후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만약 구원을 잃을 수 없다면, 구원받은 자는 끝까지 견딜 것입니다. 즉, ‘끝까지 견딤’은 참된 구원을 받은 사람을 식별하는 특징이 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요1 2:19)”라는 구절이 이 논리를 뒷받침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는 죄의 목록. 에베소서 5장과 고린도 전서 6장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는 죄의 목록이 나옵니다. 먼저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라고 하는데, 여기 언급한 음행하는 자, 더러운 자, 또는 탐하는 자가 우상 숭배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유의하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는 하지만 실제로는 우상 숭배자로 살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일리 없고 또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5장 5절과 고린도전서 6:8-10절에 나오는 죄의 목록들은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신자들도 순간 죄에 빠지고 유혹에 빠졌다 나오는 그런 단순한 일회성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열거된 죄의 목록들은 지속적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마치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teach”라는 동사에 “er”가 붙으면 선생님이 되어서 직업으로 늘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 구절들을 영어나 헬라어 본문으로 보면 “fornicators” “adulterers” “revilers” 등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명시된 죄의 목록들을 직업삼아 “practice”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practice”는 법정 용어로 “관습”을 의미하는데, 행위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죄악된 행위를 반복하는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관습적, 즉 습관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요한1서 3:9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에서 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표현이 원어로는 “hamartian ou poiei”, 영어로는 “does not practice sin” 즉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섯째, 심판받는 종(마 25:14-30; 눅 19:11-27).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맡기고 간 일을 신실하게 행하지 않은 종이 주인이 다시 왔을 때 받는 벌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의 앞에서 다뤘듯이 앗수르 왕이나 느부가넷살 또는 사울왕이나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이 종으로 택하셨고 또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데 쓰임 받았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똑같은 12제자로 부르심 받고 선택받았지만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역할을 해서 스스로 멸망의 자식임을 증명했던 가룟 유다처럼, 심판 받는 종들에 대한 비유를 보면 그 종들은 주인과 어떤 관계 맺음도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온 주인에게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란 소리를 듣는 마태복음 25장과 누가복음 19장의 종들은 주인을 향해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누가복음에서는 엄한 사람)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해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다”라고 얘기합니다. 주인에 대한 불만과 불신으로 비난을 퍼붓는 이러한 상태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향해 탓하고 비난하고 불만을 표시하는 불경스러운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거기서도 회개는 커녕 분하고 억울해 하면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습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 비유에서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0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41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따라서 우리는 주인에게 심판받는 종이 가라지였다는 사실을 그들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에 대한 암시. 요한계시록 3:5, 22:19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한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생명책에는 창조 이후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마치 명부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얻지 못할 때 지워지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계 17: 8절에 보면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길 것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은 짐승에게 속아 경배하게 될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생명책은 말 그대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3장 5절은 사데 교회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할 것”이란 주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결코 지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어적 강조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오히려 보장하신 것입니다.

계시록 22장 19절의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는 말씀은 “이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 중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경고입니다. 이는 회의론자들이나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지, 구원받은 자의 탈락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 다시 얽매이고 지는 사람에 대한 경고. 벧후 2:20-22절은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얽매이고 지면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해진다고 경고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전체를 읽어보면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선지자였지만 실은 맘몬을 섬기는 우상숭배자였던 발람에 대해 언급하면서 19절에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고 하면서 이어지는 20-22절의 경고를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소개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얽매이고 진 사람들은 멸망의 종들에 대한 내용인 것입니다.

여기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알았다는 것이지 결코 마음으로 믿어 삶의 구주로 영접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귀신들이 사람들보다 먼저 알아봤지만 회개나 순종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고보도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21절에서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라고 한 부분은 복음을 접한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차라리 복음을 알지 못했던 게 낫다는 의미입니다. 알고도 짐짓 범한 죄와 모르고 무지 중에 범한 죄는 신구약 모두에서 그 죄값에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버림 당할까 두렵다는 바울의 고백. 고전 9장 27절에서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한 부분은 복음 전파를 위한 자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표현이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을 염려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27절을 원어로 살펴보면 원어에는 있지 않은 두가지 단어가 덧붙여져 있는데 그것은 “도리어”란 단어와 “두려워한다”란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나는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버림 당할까 봐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버림 당한다”로 번역된 헬라어 adokimos는 불합격, 인정 못받음, 거부당함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바울의 이 고백을 구원에 적용한다면 바울은 자신이 구원을 거부당할까봐 아니면 인정받지 못할까봐 열심히 몸을 복종시키고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27절 이전 구절들을 읽어보면 바울은 구원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애 쓰는 자신의 상황을, 상을 받기 위해 달리기 경주하는 사람들에 비유합니다.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이기려고 모든 일에서 절제하듯이, 나는 이 달음질을 목적없이 하지 않고 싸우기를 허공에다 대고 싸우듯이 하지 않으며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남에게 전파한 후에 내가 그 일에 대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거부당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즉, 27절에서 바울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얻는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사역에 동참했을 때 받게 될 경주자의 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구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뒤 문맥을 살피고 고려하며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이단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가 믿는 교리에 맞는 것 같은 구절들을 문맥과 상관없이 뽑아와서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설교나 어떤 책을 통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자체를 기도하며 꾸준히 통독하고 또 정독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구원을 얻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이 이미 구원을 성취했음을 강조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2-14).”

아홉째,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어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과 짐짓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경고, 히브리서 6장과 10장. 일부 사람들은 이 구절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면(falls away)” 성령이 그들을 버릴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해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외면하고 용서하기를 거부하실 거라고 가르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문맥 뿐만 아니라 각 책이 특정한 대상에게, 특정한 이유로, 특정한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책 제목이 나타내듯이 유대인 청중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인 유대인’ 청중을 위해, 그중에서도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이들 중 다수는 토지를 잃고, 직업을 잃고, 심지어 가족까지 잃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었기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따라서 땅을 잃는 것은 하나님의 유업에서 제외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이러한 박해 가운데 잘못된 신학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옛 율법 아래서도 구원이 약속되었으니,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다시 옛 율법으로 돌아가자란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옛 율법 아래서는 박해를 받지 않았으니, 옛 제사 제도와 옛 방식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죠.

히브리서 저자는 바로 이런 신학에 반대하여 글을 쓴 것입니다. 그는 박해받는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이상 구원을 주지 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구원은 그분을 통해서만 발견됩니다. 이것이 히브리서가 기록된 이유이며, 이것이 수신자들입니다. 이러한 간단한 이해를 바탕으로 다시 6장 4-6절을 보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에게 구원을 잃는 것에 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실수를 하여 신앙에서 잠시 “멀어진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기를 거부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더더욱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4, 5“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여기서 저자는 그가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인임을 분명히 합니다. 오직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이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6절:“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함이 불가능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타락한”이란 표현은 ‘옛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어로는 fall away, 원어로는 parapiptó인데, 이것은 율법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들의 죄 용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역을 통해 발견됩니다. 만약 그들이 은혜의 복음에서 떨어져(fall away) 다시 옛 율법으로 귀의한다면, 그들은 회개에 이를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상, 이제 옛 율법 아래에는 죄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최고의 대가를 치르셨는데, 이제 와서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제안하며 그분이 하신 일을 거부하고 율법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히브리서 10:26-29절이 말하고 있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는 이제 옛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기에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이루신 사역을 부정하고 율법으로 해보겠다는 자들을 회개에 이르게 할 방법이 더이상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는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구원받았고 소중한 구원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믿습니다. 동시에,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구원이 우리 손에 있으며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믿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면, 그것은 상실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원이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말씀하셨는데, 믿음으로 얻은 구원에서 우리가 언제든 떨어져나갈 수 있다면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구원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생을 보장하시며 우리가 받은 구원을 유지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다니며,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눅 15:5-6)” 기뻐합니다. 어린 양은 발견되었고, 목자는 기꺼이 그 짐을 짊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길 잃은 자를 안전하게 집으로 인도하는 모든 책임을 지시며 그분이 시작하신 구원 사역을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히 7:25)”이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빌 1: 6절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한다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주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구원을 잃을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함부로 해도 된다거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전혀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 안에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내 손과 발을 내어드리는 것,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리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고린도전서 3장 말씀처럼 심판(보상에 대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니까 내가 죄 가운데 살아도 아무 상관없고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루시는 거니까 나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다면서 “회개”나 “행위”란 말만 나와도 무조건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성령으로 거듭난 구원을 얻었는지 스스로 점검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던 2000년 전부터 있었던 이단 교리로 대표적인 “영지주의”에 속하는 교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신자들이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해서 죄 가운데 계속 머물겠다고 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강력히 피력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1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떻게 죄에 거하며 죄 가운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죽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일으킴 받은 존재입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세례를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입니다. 약식으로 물 뿌리는 세례를 받는 것도 있겠지만 침례가 상징하는 것이 다시 태어남, 즉 영적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양수 속에 있던 태아가 출생하듯이 침례는 성령에 의한 새 생명으로 내가 거듭난 것을 상징합니다. 거룩한 성령을 힘입어 거룩한 새 삶을 살도록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죄 가운데 머물면서도 회개치 않거나,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는 선한 행실의 목록들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우리의 죄를 씻고 성화시키는 것이며 실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성령께서는 그들 속에서 정결케 하는 작업을 시작하시고 그 전에 즐기던 죄의 습관을 끊어 버리신 후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딤후 1:9)”입니다. 그 거룩하신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음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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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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