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술은 새 부대에의 참된 의미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7-39)”

누가복음 5:37-38절은 마태와 마가에도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지만 누가복음에만 39절이 더해져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로는 “No man also having drunk old wine straightway desireth new: for he saith, The old is better(눅 5:39).” 직역하면, ‘어떤 이도 묵은(오래된) 포도주를 마시고 난 후 곧바로 새것을 원치 않으니, 그가 옛것이 더 낫다 하기 때문이라’입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그동안 들어온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관련 설교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달아져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대중의 설교는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 새 몸 됐으니 옛 행실대로 하면 안 된다.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식인데, 이 구절은 성도에 대한 구절이 아닌 바로 예수님 자신의 사역과 율법을 고집할 유대인에 대한 예언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까지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눅 5:17-35에서 예수님은 친구들이 침상에 달아 내린 중풍 병자를 고쳐주신 것 뿐만 아니라 죄를 사하신 일로 바리새인 및 서기관들과 시비가 붙습니다. 그 후엔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가 예수를 위해 집에서 베푼 큰 잔치에 참석하십니다. 그 일로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냐는 비난을 들으시자 의사는 건강한 자가 아닌 병든 자에게 쓸 데 있는 거라고 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도 하시자 바리새인들은 요한의 제자와 우리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냐며 따집니다.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어떻게 금식하겠느냐며 그러나 신랑을 뺏길 날이 오리니 그때 금식할 거라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36절에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라고 나오는 내용이 ‘새 옷과 헌 조각’, 그리고 37절에서 39절로 이어지는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입니다.

예수님은 율법만 고집하며 주님의 사역을 거부하는 그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고수하는 모세의 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성령의 법이어야 함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옛 언약(모세의 율법)이 새 언약(그리스도와 성령의 법)보다 더 낫다고 말할 것을 빗대어 39절에 말씀하신 거였습니다. 즉 그들이 신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거부할 것임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5:37-39절을 영어 구절에서 직역한 후 영적 의미로 풀면, “아무도 새 포도주를(새 언약의 피/그리스도의 피) 오래된 부대에(구약) 담지 않으니 새 포도주가(새 언약의 피) 오래된 부대(구약)를 터트리고 쏟아지기 때문에 부대들이(언약 혹은 법들이) 망가져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 포도주는(새 언약의 피) 새 부대(성령의 법)에 담아야지 둘 다 보존하게 된다. 누구도 오래된 포도주(구약의 피/동물의 피)를 마시고 나서 바로 새것을(신약) 원치 않으니 그는 옛것이(구약) 낫다 하느니라.”

그러니까 한번 율법을 받고 그 율법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은 은혜의 법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구약이 낫다며 거부할 것을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에게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구절을 풀다 보니 예수님이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성취하러(완성하러) 왔다(마 5:17-18)’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오래된) 부대에 담으면 낡은 부대가 폐하여/망가져 없어진다(perish)는 비유에서도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게 아닌 예수님의 의도가 느껴졌습니다. 구약은 구약대로 보존하고(이 또한 영존하는 언약이니) 신약은 신약대로 보존하시는 하나님. 여기서 왜 천년왕국에 다시 에스겔의 성전이 생기고 율법과 제사가 되살아나는지 좀 더 확연해졌습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 22:20)” 이 구절에도 명확하게 포도주의 의미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분명히 나오는데도 그동안 눈이 가려서 연결 짓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엔 누가복음과 비슷하면서도 한 구절 더 있습니다.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 포도나무 열매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그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26:28-29).” 29절의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롭게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라는 의미도 이 과정에서 더 확연해졌습니다. 바로 천년왕국을 의미하시는 거고 또 그때는 이스라엘 모두에게 성령이 부어지니 새롭게 마신다고 하신 거였습니다. 더구나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책이고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염두에 둔 책이니 더욱 의미심장합니다(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침례 요한은 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먹고 마시셨을까요? 그것은 요한이 율법 즉 구약이라면 예수님은 은혜이신 성령의 법, 즉 신약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구약의 엘리야 영으로 온 것이고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마 11:13)”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와 율법’이란 표현은 구약을 일컬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자세한 설명은 ‘이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구약은 침례 요한까지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며 앞으로 신약이 펼쳐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요한이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고 했던 말의 의미도 더욱 확연해졌습니다. 여태껏 제자들의 숫자에 관한 얘기로, 혹은 요한의 대단한 인성 정도로 배웠던 말이 ‘율법은 쇠하고 성령의 법이 흥해져야 한다’는 예언이었다고 깨달아지니 더 의미심장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금식 안 하고 안식일 준수 안 하는 일로 지속적인 공격을 당하면서도 성육신하심이 구약의 모든 예언의 성취임을, 그렇기에 이제 그림자인 율법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꾸준히 율법대로 안 하셨습니다. 동물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피로 얻을 죄 사함에 대한 은혜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세상 죄인들의 눈에도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포도주를 마셨는데…’ 하면서 교회 다니면 왜 술 마시지 못하게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마시지 말라’가 답입니다.

율법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므로 술을 마시되 취하지 않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데 술이 날 먹는 꼴을 당할 테니 아예 입에도 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이상한 불을 드리는 잘못을 범한 후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회막에 들어올 때는(레10:8) 절대 술을 먹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주께 서원한 나실인들도 서원 기간엔 술뿐 아니라 포도에서 난 것은 입에도 대지 말라고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에 더욱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 또한 믿음이 약한 자들이 혹시라도 술 먹는 모습에 실족할 수 있기에, 율법보다도 더 고귀한 성령의 법에 따르는 우리는 마시지 않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패한 사귐을 가져서도 안 되는 게 함께 부패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율법을 성취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예수님은 마셔도 취하게 마신 적이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새 술로(새 언약) 만들어 주셨고, 안식일은 창조물이 창조주를 기억하고 경배하라고 주신 날이기에 안식일의 주인, 즉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지킬 이유가 없으셨던 것뿐만 아니라 오히려 병든 자들을 고쳐 주심으로 참된 안식의 날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죄인들과 어울리셔도 죄악에 오염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회개케 하시고 구원하셨기에 사귐을 가지셨던 겁니다. 마치 어둠 가운데 빛이 임하면 어둠을 밝히듯이, 예수님은 빛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인간의 몸으로 이 모든 걸 하시고도 죄짓지 않아 율법을 성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 가운데 계속 머무르고 악한 사귐을 하면 안 되며 계속 빛 가운데 머무르고 믿음의 교제를 해야만 제구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일 뿐이기에 예수님께 붙어있지 않으면 결코 열매 맺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2018년에 쓴 이 글에 공감이 가시는 분들은 최근에 올린(2023년 12월 22일)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가나의 혼인잔치“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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