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of Numbers:2란 숫자의 의미

오늘은 ‘나눔(분리), 또는 증인(증언, 확증)’을 의미하는 숫자 2에 대해 적으려고 합니다. 하나에 다른 하나가 덧붙여져서 2를 만든 경우엔 ‘나눔, 분리’를 의미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에 같은 하나가 덧붙여진 경우엔 오히려 ‘확증, 증인(증언)’을 의미하기에 숫자 2는 그 뜻조차도 이중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던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 가운데 궁창을 두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시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습니다(창 1:6-8). 같은 물이었지만 하늘 위, 하늘 아래 물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물이 창조 때 나뉘었다면 땅이 나뉜 시기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창 10:25).” 여기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הָאָ֔רֶץ(하아레스)’로 ‘땅, 지구’란 의미이며 창세기 1장부터 구약에 총 934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으로 10장에서 에벨이 벨렉과 욕단을 낳았던 시기가 11장의 바벨탑 사건으로 사람들이 흩어졌던 일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둘로 나뉘었지만 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2가 갖는 ‘나뉨과 증언’ 두 의미를 모두 충족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요 8:17-1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어떤 일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법을 악용한 악인들은 두 가짜 증인들을 내세워 의인이었던 나봇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입니다(신 17:6, 19:15; 왕상 21:10, 13; 마 18:16, 26:60; 고후 13:1; 딤전 5:19; 히 10:28; 계 11:3).

성경은 두 인물이나 사건을 대조해서 선과 악, 하나님께 속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아벨과 가인, 이삭과 이스마엘, 아브라함과 롯, 야곱과 에서, 룻과 오르바, 한나와 브닌나,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유다와 북이스라엘, 나봇과 아합,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있던 두 강도입니다. 하나님은 에굽을 심판하실 때 에굽 땅과 고센 땅을 구별하시고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백성을 구별(분리)하셨습니다(출 8:23). 롯 역시 두 천사에 의해 소돔에서 분리됩니다(창 19장). 우리 역시 세상에서는 분리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을 입습니다(엡 4:22-25).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2가 갖는 나뉨의 의미를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마 7:13-14).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7:17-18). 지혜로운 자가 지은 반석 위의 집과 어리석은 자가 지은 모래 위의 집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뉩니다(마 7:24-27). 또한 포도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안가고, 안가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가는 두 아들(마 21:28-31). 그리고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탕자와 아버지와 함께 있었지만 지금은 집 밖에 있는 맏이에 대한 비유도 그러합니다(눅 15:11). 예수님은 또한 그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한쪽을 미워하고 한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한쪽을 경히 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6:24).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도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김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4:40-41). 또한 아브라함에게서 난 두 아들은 육체를 따라 여종에게서 난 아들과 약속을 말미암아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로 나뉩니다(갈 4:22-26).

성경엔 두 종류의 부활도 나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단 12:2)”입니다. 어떤 부활에 속하냐에 따라 두 개의 다른 심판석 앞에 서게 됩니다. 성도들은 상급을 가리는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지만(고전 3:10-15; 고후 5:10), 나머지 사람들은 백보좌 심판석 앞에 나타납니다(계 20:11-15).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두 번의 죽음을 겪을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나 그 후에는 심판이 있기에(히 9:27)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수치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단 12:2)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져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계 20:14-15). 그러나 자는 자 중에서 깨어나 영생을 받을(단 12:2)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합니다(계 20:6).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릴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0:6).

요셉의 때에 바로가 꿨던 7년의 흉년과 7년의 풍년을 나타내는 두 번의 꿈도 이런 2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 꿈의 내용은 7년 흉년과 7년 풍년으로 나뉘어 있는 동시에 같은 의미의 꿈을 두 번 반복해서 꾼 것은 그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창 41:32)”이란 의미로 겹쳐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명의 인물이나 사건을 덧붙이는 것을 통해 성경은 악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증인을 세웁니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는 그 당시 완연했던 악을 증거합니다. 여로보암이 여호와를 경배하러 유다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단과 벧엘에 세운 두 마리의 송아지는 북이스라엘의 완전한 우상숭배를 증거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악의 증인은 나답과 아비후, 발락과 발람, 아합과 이세벨, 빌라도와 헤롯,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한 증인들은, 엘닷과 메닷(민 11:26),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두 번 정탐꾼을 보냅니다. 광야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기에 12명을 보내지만 이들 중 2명만(갈렙과 여호수아)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합니다. 광야 생활을 마치게 되는 말기에는 아예 2명만(미드라쉬에 의하면 그들은 비느하스와 갈렙이었습니다) 보내는데 이들은 돌아와 하나님의 약속과 크신 역사하심을 증거합니다. 신약에 와서도 엘리사벳과 마리아, 마리아와 마르다, 안나와 시몬, 바울과 바나바, 브르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사람들이 믿음의 증인들로 짝을 지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때에 패역한 세대였던 바리세인들을 정죄하는 증인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모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부터 왔던 남방의 여왕과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입니다(마12:41-42).

예수님의 12제자 중 선두그룹에 있었던 제자들은 모두 형제로 짝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이 따로 70명을 세워 하나님의 나라(왕국)를 선포하려고 내보내셨을 때에도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누가복음 10장). 이것은 하나님이 노아의 방주로 보냈던 동물들이 둘씩 짝지어 들어갔던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악한 세대의 멸망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루게 하시리란 약속도 주십니다(마 18:19). 변화산에서 영광 중에 나타나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십자가의 죽음을 얘기했던 사람들은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이었습니다(눅 9:30-31). 예수님이 승천하셨을 때도 두 천사가 제자들에게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란 증언을 줍니다(행 1:10-11). 요한계시록에도 마지막 때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2 증인이 나옵니다(계 11장).

성막을 제조할 때 주요 성분이었던 금과 조각목은(출 25-27) 예수님의 신성(금)과 인성(조각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도 증언을 뜻하는 두 개의 돌판에 주셨습니다. 언약궤를 덮고 있던 속죄소(긍휼의 자리)와 순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양쪽 끝에 있던 두 그룹도 언약의 증인입니다(출 25:18-20). 레위기에는 두 마리의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하나는 속죄헌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가져오게 했습니다(레 5:7). 나병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에는 정결한 새 두 마리를 가져와서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고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잡은 새의 피에 찍어 나병에서 나은 사람의 몸에 일곱 번 뿌린 후 들에 놓아줍니다(14:4-7). 또한 속죄절에는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죄를 속죄하기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취해 제비를 뽑습니다(레위기 16장). 여호와를 위한 제비에 뽑힌 염소는 여호와께 속죄 제물로 드리고 아사셀의 것으로 뽑힌 염소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죄를 전가한 후 아사셀의 것으로 광야에 놓아줍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날인 오순절에 올리는 ‘고운 밀가루에 누룩 넣은 빵 두 덩이(레 23:17)’도 2가 갖는 이중적인 의미에 충실합니다. 유일하게 누룩 넣은 빵을 올릴 수 있는 풍요와 감사를 상징하는 오순절의 빵 두 덩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뉘었지만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모세의 성막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케 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 두 왕의 합작이며 솔로몬과 두로왕 히람의 동역으로 지어집니다(왕상 5:18). 솔로몬이 성전 입구에 세웠던 두 놋기둥의 이름은 ‘그가 세우실 것’이란 뜻의 야긴과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의 보아스인데, 이 두 기둥은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 땅을 의로 통치하실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예표합니다.

4 복음서 중에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마태복음엔 이런 두 증인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집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두 명의 귀신 들린 자들(마 8:28)과 두 명의 장님들(마 9:27, 20:30)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어야 할 불신에 눈 멀고 악령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또한 첫째 되는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둘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2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40). 또한 성경은 구약을 ‘율법자와 선지자’ 둘로 함축해 일컫기도 합니다(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행 13:15, 24:14, 28:23; 롬 3:21). 성경엔 사람의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경우가 정확히 7번 나온다는 것을 약 7년 전쯤 발견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받은 조명과 깨달음은 ‘이름을 두 번 부르심’이란 글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 두 번째이신 ‘성자’ 예수님은 특별히 숫자 2의 특성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분 자체가 성육신하심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하나님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신 두 가지 본성을 갖고 계십니다. 또한 증언 및 증인에 대한 특징을 드러내시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땅에서 난 첫째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난 둘째 사람이시며(고전 15:47)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계 3:14). 예수님이 두 번 반복해서 쓰셨던 ‘진실로 진실로’란 표현을 킹제임스 영어성경에서 찾게 되면 요한복음에서만 25번 나옵니다. 개인적으로 이는 자신이 은혜의 법, 즉 성령의 법(5*5)의 증인이심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나타내셨으며,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증오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선상에서 쏟아내신 ‘물과 피’로 ‘속죄와 정결’의 온전한 속량을 이루셨으며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구분하셨습니다(겔 16:4; 엡 5:26; 히10:22). 그 일을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던 초림의 예수님은 세상 끝날에는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성경에 두 번 나오는 단어 중엔 ‘paroxusmos(파록수스모스)’와 ‘hekousiós(헤쿠시오스)’가 있는데 ‘분리와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맞게 두 가지의 다른 경우에 등장합니다. 이런 걸 발견할 때마다 성경의 위대함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단어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히브리서 10장 원어 연구 2탄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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