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에 대한 환상 이후에 어린양이 시온 산에 십사만 사천 명과 서 있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어린양(lamb)은 성경에 총 188번 나오는데, 계시록에서만 29번 나옵니다. 그 피로 우리 죄를 속량하신 주님은 하늘에서,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성도들 앞에서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때문에 본절에 나오는 시온 산은 다름 아닌 하늘에 있는 시온 산입니다. 예루살렘도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있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있듯이(갈 4:26; 히 12:22), 시온 산도 땅에 있는 시온 산이 있고 하늘에 있는 시온 산이 있습니다.
“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18-24)”
하나님은 시온 산에 계시며(시 74:2) 그분의 왕을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우십니다(시 2:6, 74:2). 이 시온 산에 어린양이 14만 4천 명과 함께 서 있습니다. 성경에서 ‘144(hundred forty four)’를 찾아보게 되면 총 5번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4번 모두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며(계 7:4, 14:1, 3, 21:17), 구약에서는 사단이 일으킨 시험으로 엄청난 환란을 통과하고 승리하게 되는 욥에게 유일하게 한번 쓰입니다(욥 42:16). 욥이 환란을 겪은 후에도 140년을 더 살고 4대째까지 자손들을 보았다는 부분입니다. “After this lived Job an hundred and forty years, and saw his sons, and his sons’ sons, even four generations(욥 42:16).
신약에 나오는 ‘144(hundred forty four)’는 마지막 때에 인침을 받는 144,000명에 관한 3 구절에서 나오고 나머지 한번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잰 수가 144 규빗이란 부분에서 나옵니다(계 21:17). 지난번 글에 적었듯이, 환란 전에 부활 및 휴거하는 성도들이 성전을 이룬다면, 환란 성도들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이룬다는 것을 아가서 8장 8~10절을 통해 조명 받았었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12장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에 환란 성도들을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의 성벽을 잰 수가 144 규빗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오히려 이런 조명을 확증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절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사만 사천 명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은 개역개정이 삽입한 단어이고, 원어로는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그냥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번역이 다른 이유는 번역본이 다른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엔(킹제임스가 쓴 번역본보다 더 오래된 번역본도 포함) ‘그의 이름’이란 단어도 들어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본절은 ‘그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게 더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계시록 22장에도 하나님과 그 양을 섬기는 종들은 그의 얼굴을 볼 것이며 그의 이름이 그 이마에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계 22:3-4).
이 14만 4천 명은 계시록 7장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 9장에서는 ‘하나님의 인’이 그 이마에 없는 사람들만 전갈의 꼬리를 가진 메뚜기와 같은 영적 존재들이 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환란을 통과한 후인 14장에서는 이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들은 환란 전에는 구약의 하나님은 믿고 섬겼지만, 신약과 예수님은 거부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두 증인(엘리야와 요한)의 증언과 그들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기에 이제 그 이마에는 ‘그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3년반의 환란기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신약 교회의 예표인 에녹은 홍수 이전에 하나님께서 옮기셨지만 노아와 노아의 가족은 방주로 보호하시며 홍수의 심판을 살아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지은 방주의 규격은 300 규빗, 50 규빗, 30 규빗(창 6:15)인데, 총 450,000 규빗의 공간이 됩니다. 노아의 가족과 수많은 짐승을 심판의 물에서 보호해 주고 구원해 준 이 공간은 은혜의 수 5의 5승에 144를 곱한 숫자입니다(55 X 144 = 450,000).
정처 없이 물 위를 떠돌던 노아의 방주가 비가 그치고 물이 줄어들자 아라랏 산 위에 멈춰서서 안식을 얻었듯이(창 8:4:The ark rested), 이들은 홍수와 같은 전 3년반의 환란기를 통과한 후에, 어린양과(방주) 함께 시온 산 위로 올라 안식을 얻습니다. 창세기 8장 4절에서 처음 등장하는 ‘쉼을 얻다’란 히브리어 ‘nuach(누아크)’는 구약에 총 67번 나오는데, 단어의 값이 ‘144’입니다.
2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3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많은 물 소리(voice of many waters)’란 표현은 성경에 14번 나옵니다(민 24:7; 삼하 22:17; 시 18:16, 29:3, 93:4; 아 8:7; 사 17:13; 렘 51:13; 겔 19:10, 43:2; 계1:15, 14:2, 17:1, 19:6).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많은 물’이란 ‘여러 나라(many nations)’를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는 ‘하늘에서 여러 나라들의 언어가 들렸다’란 의미입니다. 마치 오순절 때 성령이 강림하자 제자들이 15나라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행 2:9-11).
그에 비해 신약에 12번 등장하는 ‘우렛소리(bronté:브론테이)’는 영적 존재들의 ‘음성’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렛소리’는 주님이 요한과 야고보에게 지어준 별명(우레의 아들)이기도 했고(막 3:17) 하늘에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했으며(요 12:29), 하나님의 보좌와(본절) 하늘의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가 보일 때 나는 소리이기도 했습니다(계 11:19). 그리고 네 생물의 음성이기도 하며(6:1), 제단 곁에 섰던 천사가 향로를 갖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을 때(계 8:5)와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로 현현했을 때 같이 말하던 7 우레의 소리입니다(10:3, 4(2)). 또한 본절과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을 때 보좌로부터 ‘되었다’란 큰 음성이 나올 때도 우렛소리가 있었고(계 16:18) 천상의 무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할 때 내는 소리이기도 합니다(계 19:6).
그런데 특별히 본절에 쓰인 ‘큰’ 우렛소리(a great thunder)는 성경 전체에 2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증언 및 증인을 뜻하는 2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본절과 사무엘상 7장 10절인데, 앞뒤 구절을 함께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삼상 7:8-10)”
즉, 본절에 난 ‘큰 우렛소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적을 치시며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크신 구원으로 구원한 역사의 소리입니다. 그 때문에 이144,000명은 비파를 타며 새 노래를 부르는데 다윗이 지은 시편 144편에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그의 종 다윗을 그 해하려는 칼에서 구하시는 자시니이다(시 144:9-10)“
개역개정의 번역에는 ‘열 줄 비파’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로는 ‘십현금(‘ā·śō·wr bə·nê·ḇel)’입니다. 여기서 ‘십현금’ 즉 열 줄로 된 악기란, 본절의 ‘kithara(키따라)’, 영어로는 ‘lyre(라이어), psaltery(쌀트리), 또는 harp(하프)’이며 한국어로는 ‘수금’입니다. 특별히 수금은 10줄 악기로 모세의 십계명을 상징하는 악기이며 인간의 심장 모양을 따서 만든 악기로 사람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본절에 ‘거문고’로 번역한 단어가 원어로는 ‘kithara(키따라)’ 즉, ‘수금’입니다. 다윗의 144편 노래처럼 본절의 144,000명은 열 줄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며 그 구원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성경엔 수금과 비파 둘 다 나오는데, 문제는 원어로는 구분이 되어 있는 이 악기들이 영어로는 혼합해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히브리어의 나팔이 은나팔과 양각나팔로 구분되지만 영어로는 다 ‘나팔(trumpet)’로 번역했듯이, 같은 히브리 단어를 두고 영어버전마다 ‘lyre’ 또는 ‘psaltery’ 또는 ‘harp’ 등등으로 뒤죽박죽 번역했습니다. 그러다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수금이나 비파나 구분 없이 모두 비파(harp)가 되었습니다. 어찌 됐거나 수금(nebel: נֶבֶל) 또는 kinnor(키노어)는 하나님의 예언이 임하는 것과 악귀를 쫓는 축사와 연관 있는 악기입니다(삼상 10:5, 16:16, 23; 대상 25:1, 3).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쓰였던 주요 악기 중 하나로 언약궤를 옮길 때도 쓰였으며 여호사밧 때는 수금을 동반한 찬양을 올릴 때 하나님께서 직접 모압, 암몬, 세일 산의 연합 군대를 진멸하신 적도 있습니다(삼하 6:5; 왕상 10:12; 대상 13:8, 15:16, 21, 28, 16:5, 25:6; 대하 5:12, 9:11, 20:28, 29:25; 시 33:2, 57:8, 71:22, 108:2). 바벨론 포로 기간 후 돌아와 느헤미야 때에 성벽을 건축하게 됐을 때도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며kinnor(키노어)를 동원한 감사와 찬양을 올렸습니다(느 12:27).
성경엔 앗시리아와 전쟁하실 때 하나님 위에 소고와 수금(kinnor)을 둘 것이며 그들을 막대로 쳐 무너뜨리실 것이라는 특이한 예언 구절도 있습니다(사 30:32:직역). 다니엘의 때에 느부가넷살 왕은 높이가 60이요 너비는 6 규빗인 금으로 된 신상을 만들어 나팔과 피리와 수금(qitharos:아람어) 등의 모든 악기가 연주될 때 엎드려 절하도록(경배하도록) 명령합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풀무 불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는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던져지지만 인자와 같은 이가 그들과 함께 걸어 해를 당하지 않는 장면도 나옵니다(단 3:5-15). 이 사건들은 모두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계시록 5장 9절에서는 4 생물과 24 장로들이 이 수금(kithara)을 들고 새 노래로 찬양하는 걸 볼 수 있으며, 본절에서는 땅에서 속량한 144,000명이 수금(kithara)으로 새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때 4 생물과 24 장로들 앞에서 이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이들 외에는 능히 배울 자가 없더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계 14:1-3). 이 노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환란을 통과하고 인내로 그 믿음을 지켜 구원을 얻은 경험을 통해서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 홍해를 건너며 에굽 군대들은 수장이 되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은 후 그 일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부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은 ‘배우라’고 권면하시고 초청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 제물을 원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배우라(마 9:13). ‘너희는 내 멍에를 지고 내게서 배우라,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너희들의 혼이 안식을 얻으리라(마 11:29)’. ‘이제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가 나기 시작하면 여름이(끝이란 단어와 같은 발음) 가까운 줄을 너희가 아느니라(마 24:32; 막 13:28)’. 예수님은 또한 ‘이것이 선지서에 기록되었으니 모두 하나님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아버지에 대해 배우고 듣게 된 모든 사람들은 내게로 오라(요 6:45)’고 하십니다.
본절에 나오는 ‘새 노래’란 표현은 전체 성경에 총 9번 나오는데 관련 구절들을 모두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새 노래는 의인들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정직한 자들이 찬송할 때 수금으로 감사하며 비파로 찬양하는 것입니다(시 33:1-3). 새 노래는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그를 기다렸을 때 환난에서 건져주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의지할 때 부르는 것입니다(시 40:1-3). 새 노래는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하고 그 영광과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 선포할 때 부르는 것이며 하나님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때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의 진실하심으로(truth) 백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96:1-3, 13). 새 노래는 하나님이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사 공의를 뭇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시며 이스라엘의 집과 다윗에게 베푸신 인자와 성실로 구원을 보았을 때 수금(하프)과 비파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이며 의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공평으로 그 백성을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98:1; 144:9). 성도의 모임 가운데서 찬양하며 시온의 주민이 그의 왕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새 노래를 불러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할 것이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영광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좌우에 날 선 검이(two edged sword) 있는데 이것으로 뭇 나라에 보복하며 민족들을 벌하여 기록한 판결대로 그들에게 시행할 것입니다(149:1-9).
새 노래는 하나님의 택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시며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사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시고 갇힌 자를 감방에서 이끌어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실 때 부릅니다. 전에 예언한 일이 이뤄져서 예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올 것임을 선포할 때 부르는 찬양이기 때문입니다(사 42:1-10). 그렇기에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24 반열의 대표로 섬길 장로들과 모든 예언의 성취로 회복된 창조물을 대표하는 4 생물은 영원한 구원과 속량과 자유의 새 노래를 불러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 본절에 땅에서 속량 받은 144,000명도 새 노래를 부릅니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속량한 첫 열매요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고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며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계시록 15장 1-3절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위에서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하나님의 수금(kithara)을 갖고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과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나오지만(계 15:1-3) 새노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불렀다고만 되어 있습니다(계 15:1-3). 그 의미는 14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명이 환란기 동안 보호받다가 구원을 얻는 존재들이라면 15장에 나오는 무리는 환란기 가운데 죽어서 하늘로 간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절에 ‘속량함’으로 번약한 헬라어 ‘agorazó(아고라조)’는 신약에 30번 나오는데, ‘사다, 구입하다’란 뜻입니다. 이 단어가 쓰인 몇 구절만 예를 들면, 천국 비유에서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이를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에(마 13:44-46) 나오고 성도들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부분입니다(고전 6:20, 7:23). 또한 베드로는 백성들 가운데 거짓 선자자들이 일어났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어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한다고 말합니다(벧후 2:1). 요한계시록에서도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불로 연단 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이처럼 본절에 나오는 자들은 환란기를 통과하며 주님을 영접함으로 이런 것들을 주님께로부터 사고 또 주님이 사신 바 된 자들입니다.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본절에 쓰인 ‘더럽다’는 단어는 율법적인 의미의 ‘부정함(koinoó, koinos)’ 또는 ‘더러운(불결한) 귀신’에 쓰인 ‘akathartos(아카따르토스)’란 단어와는 다른 ‘molunó(몰루노)’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절을 포함해서 신약에 딱 3번 나오는데, 나머지 구절들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따라서 이들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우상 숭배에 따른 음행을 의미하며 ‘여자’는 계시록 16-18장에 나오는 바벨론을 상징하는 ‘짐승에 앉은 여자’란 걸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본절의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가 진짜 ‘여자’를 의미한다고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이들은 ‘순결한 자’라고 한 부분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순결한 자(virgins)’로 번역한 ‘parthenos(파르떼노스)’는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여자, 즉 숫처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절에 나오는 ‘여자’가 실제 여자를 의미하고 ‘처녀’가 정말 처녀를 의미한다고 하면, ‘여자들과 함께 더럽히지 않은 처녀들(직역)’이란 표현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여기에 쓰인 ‘여자들(women)’도 상징적 의미이고 ‘처녀들(virgins)’ 또한 상징적 의미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여자’란 표현은 총 15번 나오는데, 두아디라 교회에 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에게 처음 쓰였고, 12장의 시온 성, 그리고 17장의 짐승을 탄 여자 곧 바벨론 성입니다. ‘여자들’이란 복수형은 본절과 계시록 9장 8절에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메뚜기의 모습을 한 영적 존재들에게 쓰입니다. 이들의 머리는 ‘여자들의 머리카락과 같았고 이빨은 사자들의 이빨’과 같습니다.
이 십사만 사천 명에게 쓰인 ‘처녀’ 즉, ‘parthenos(파르떼노스)’란 단어는 신약 전체에 총 15번 나옵니다(마 1:23; 25:1, 7, 11; 눅 1:27(2); 행 21:9; 고전 7:25, 28, 34, 36, 37, 38; 고후 11:2; 본절).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에서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10 처녀의 비유에 쓰였고 바울이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했다…’라고 말하는 부분에도 쓰였습니다. 이들은 특히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은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속량함이란 단어는 도로 3절에 나왔던 ‘agorazó(아고라조)’이며, ‘사다, 구입하다’란 뜻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는 ‘첫 열매(firstfruits)’입니다. 헬라어로 ‘aparché(아파르케이)’인데 신약에는 총 8번 나옵니다(롬 8:23, 11:16, 16:5; 고전 15:20, 23, 16:15, 약 1:18, 본절). 이스라엘엔 3대 수확이 있습니다. 첫 수확은 이른 봄에 오는 보리추수이고 두 번째 수확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오는 밀 수확이며 세 번째는 가을에 있는 과일 추수입니다(이 3대 추수는 영혼육을 상징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영혼육 삼분설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약 교회를 의미하는 보리 추수의 첫 열매는 초실절에 죽음에서 부활하시면서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맏이이시고(롬 8:29) 교회의 머리(엡 1:22; 골 1:18)가 되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가 부활 및 휴거합니다(고전 15:20-23절). 이후 밀 수확(유대인 및 이방인 환란 성도)이 있는데 이 밀 수확의 첫열매는 특별히 하나님께 인침을 받은 이스라엘 혈통의 십사만 사천 명이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로 살아서 주님을 만나(휴거)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리 수확에 첫 열매인 예수님이 혈통적으로는 유대인이었던 것처럼 밀 수확의 첫 열매도 혈통적으로는 유대인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거짓말은 ‘pseudos(프수도스)’이며 신약에 총 10번 쓰입니다(요 8:44; 롬 1:25; 엡 4:25; 살후 2:9, 11; 요일 2:21, 27; 본절, 계 21:27, 22:15). 이 단어가 쓰인 10구절을 모두 읽어보면, 그냥 일반적인 거짓말을 뜻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즉 영적인 거짓과 마귀의 거짓말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참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또한 ‘흠이 없다’로 번역한 ‘amomos(아모모스)’는 총 8번 나오는데(거듭남, 새 창조 및 재생을 의미하는 8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주로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교회(성도)에 엮어서 사용됩니다(엡 1:4, 5:27; 빌 2:15; 골 1:22; 히 9:14; 벧전 1:19; 유 1:24; 본절).
6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7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본절에 나오는 ‘다른 천사(another angel)’란 표현은 성경에 총 10번 나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든 구절을 읽어 보면 6구절은 그냥 천사 중 하나를 의미하는 반면(본절, 8, 15, 17, 18, 18:1), 4구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슥 2:3; 계 7:2, 8:3, 10:1). 성경엔 천사로 현현한 하나님 또는 예수님에 대한 구절이 이 외에도 여럿 나옵니다(창 22:11, 15, 48:16; 출 3:2; 삿 13:20; 말 3:1).
‘공중에 날아가는데’에서 ‘공중’은 헬라어로 ‘mesouranéma(메수롸네이마)’입니다. 그냥 공중이 아닌 가장 높은 하늘을 의미하는 단어로 천정(天頂) 또는 정점을 의미합니다. 신약에 딱 3번 나오는데(신적 완전함 및 부활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계시록 8:13절에서는 화를 선포하는 ‘천사(독수리?)’가 하늘의 정점을 날았고 본절에서는 영존하는 복음을 선포하는 천사가, 그리고 19장 17절에서는 심판으로 죽은 하나님의 원수들의 살을 먹을 새들이 납니다.
이 천사는 큰 음성으로 영존하는 복음을 선포(euaggelizó(유앙겔리조))하며 심판의 시각(hóra(호라))이 이르렀음을 알리는데,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하나님을 경배할 것을 촉구합니다.
8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6절의 천사를 이어서 또 다른 두 번째 천사가 뒤따르며 모든 민족에게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던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음을 알립니다. 이 성은 노아의 홍수 이후 이 땅에 세워진 70개의 나라와 민족(창 10장) 중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났던 고대의 바벨 성입니다(창 11:3-9). 창세기 11장에서 이들은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거류하며 성읍과 탑을 건설합니다(창 11:2). 이들은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해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지만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신 여호와가 이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할 수 없이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원래는 한 언어를 구사했었는데, 갑자기 언어가 혼잡해지면서 서로 알아들을 수 없게 됐기에 그곳(시날)의 이름은 ‘바벨(Babel)’, 즉 ‘혼란’이 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는 בָּבֶל (“Ba-bel”)이며, 헬라어로는 ’Βαβυλῶνος(Babylonos:바벨로노스)’, 즉 바벨론입니다. 고대의 바벨이 시날 평지에 있었던 것처럼(창 11장) 다니엘 때에도 바벨론 왕국은 여전히 시날 땅에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단 1:2).
그러니까 이 바벨론 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적하며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세상 왕국의 첫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시조이자 세상의 첫 용사이며 첫 적그리스도의 예표인 니므롯은 바벨론뿐만 아니라 앗수르에서 니느웨까지 건설합니다. 즉, 니므롯(적그리스도)은 수천 년 후에 남유다를 멸망시키게 되는 바벨론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시조인 것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창 10:8-12)”
그러니까 노아의 후손들이 언어와 족속에 따라 온 지면에 흩어져 70개의 나라와 민족이 되고(창 10장) 하나님을 대적하여 바벨과 앗수르와 니느웨를 건설할 때,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홀로 불러내셔서 여호와의 분깃인 자기 백성을 삼으셨고, 이스라엘이란 새 나라를 창조하사 기업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신 32:9). 그리고 이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지난 2000년간 세상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난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사라진 바벨론이란 나라도 마지막 때에 다시 그 땅에 생겨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대적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왕중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며 노아의 때부터 모든 나라에 그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하던 바벨론은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은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폐하게 하며 니므롯 땅 어귀를 황폐하게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미 5:5-6).”
9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0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1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이제 세 번째 천사가 뒤따르며 큰 음성으로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두주를 마시게 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여기서 쓰인 ‘진노’는 헬라어로 thumos(또는 thymós)이며 신약에 18번 나오는데 계시록에서만 10번 나옵니다. 말 그대로 뜨겁고 격렬한 분노를 의미합니다.
‘포도주’로 번역한 ‘oinos(오이노스)’는 신약에 총 34번 나옵니다. 포도주는 주로 ‘피’에 비유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비유에서(마 9:17(3); 막 2:22(4); 5:37(2), 38)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흘리실 새 언약의 피(눅 22:20)로 비유되었고(이 비유에 대해 받았었던 조명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계시록에는 주로 심판의 대상인 바벨론이 마실 ‘음행과 진노의 포도주(계 14:8, 10, 16:19, 17:2, 18:3, 13, 19:1)로 나옵니다.
10절에 이 진노의 포도주는 ‘진노의 잔에 섞인 것 없이 부은 포도주’라고 하는데 여기서 ‘섞인 것 없이’로 번역한 헬라어는 ‘akratos(아크라토스)’입니다. ‘섞이지 않은(unmixed), 희석하지 않은(undiluted), 순도의(pure)’란 의미입니다. 즉, 그 어떤 긍휼이나 용서의 여지도 없이 온전한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데, ‘고난을 받다’란 동사 ‘basanizó(바사니조)’는 성경에 총 12번(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옵니다(마 8:6, 29, 14:24; 막 5:7, 6:48; 눅 8:28; 벧후 2:8; 계 9:5, 11:10, 12:2, 14:10, 20:10). 이 단어는 악인들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에도 쓰이는 일반적인 ‘고난’을 의미합니다. 이에 비해 11절에 나오는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에 쓰인 명사 ‘basanismos (바사니스모스)’는 고통 및 고문을 의미하며 모두 악인에게 쓰이고 6번 등장합니다(계 9:5(2), 본절, 18:7, 10, 15).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본절에 ‘쉼’으로 번역한 헬라어 ‘anapausis(아나포우시스)’는 총 5번 나오는데(은혜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모두 읽어보면 주로 ‘혼의 안식’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마 11:29, 12:43; 눅 11:24; 계 4:8, 본절). 즉, 짐승의 표를 받고 짐승을 경배한 자들은 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3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성도로 쓰인 ‘hagios(하기오스)’의 뜻은 ‘거룩, 신성한’입니다. 총 235번 나오는데 대부분 ‘거룩’으로 번역되었고 ‘성도’로 번역된 경우는 61번입니다. 이 환란 성도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entolé)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계명((entolé)을 지키는 자’라는 표현 때문에 환란 성도들은 율법을 따르던 이스라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방인인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 (entolé)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고 얘기합니다. 요한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entolé)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entolé)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entolé)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1-4)”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유대인 및 이방인 환란 성도들이며 이들이 환란 성도들이 된 이유는 환란기를 통과하면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또는 제대로 영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에는 교회는 다녔지만 아직 거듭나지는 않았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구약의 하나님만을 믿었던 유대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환란 전 휴거 및 부활까지는 못 했더라도 이들 역시 환란을 통과하며 참된 믿음을 얻었고 설령 죽는다 해도 참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의 ‘쉼’은 헬라어로 ‘anapauó(아나포우)’인데 총 12번 나옵니다(마 11:28, 26:45; 막 6:31, 14:41; 눅 12:19; 고전 16:18; 고후 7:13; 몬 1:7, 20; 벧후 4:14; 계 6:11, 본절). 모든 구절을 읽어보면, 이 단어는 특별히 몸의 안식, 즉 노동과 수고로부터의 쉼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가 이들을 따를 것이니, 곧 그들의 삶과 죽음으로 믿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14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5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16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본절은 공중 재림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이 있습니다. ‘예리한’으로 쓰인 헬라어 ‘oxus(오주스)’는 날카롭고 빠르다는 뜻입니다. 신약에 총 8번 나오는데(롬 3:15; 계 1:16, 2:12, 14:14, 17, 18(2), 19:15) 계시록에서만 7번 나옵니다(성령의 수이자 하나님의 완전 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주로 예수 그리스도에 연관되어 쓰였는데, 입에서 나오는 칼의 예리함 또는 추수를 위해 손에 든 낫의 예리함에 쓰였습니다. ‘낫’으로 번역한 ‘drepanon(드레파논)’은 ‘낫 또는 갈고리(가지치기에 쓰는 갈고리)’입니다. 이 단어도 신약에 총 8번 나오는데(막 4:29; 계 14:14, 15, 16, 17, 18(2), 19) 계시록에서만 7번, 그것도 14장에서만 7번 나옵니다. 이외 마가복음에 나오는 부분은 씨뿌리는 비유에서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9)”고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환란기 동안 주님께 돌아오고 믿음을 지킨 환란 성도들이 주님에 의해 직접 하늘로 거둬지는 부분입니다.
이때 또 다른 천사(네 번째 천사)가 성전에서 나와 구름에 앉은 주님께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시각: hóra)가 되었으니, 낫을 휘둘러 땅의 곡식을 거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익었다’로 쓰인 ‘Xérainó(제라이노)’는 신약에 총 15번 나오는데, ‘마르다, 시들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추수할 때가 지나 줄기와 껍질이 마르고 노랗게 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17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8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주님이 땅의 곡식을 직접 추수하신 후에 또 다른 천사(다섯 번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여섯 번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에게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말합니다. 계시록 14장에는 이렇게 총 6명의 천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불을 다스리는(power over)’은 헬라어로 ‘exousia(엑수시아)’인데, ‘어떤 권한이 주어진, 절대권, 권력’등을 의미합니다. 즉 이 천사는 심판의 불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졌는데 계시록 16장에는 물을 주관하는 천사도 나옵니다(계 16:5). 유대인들은 미가엘이 불을 다스리는 천사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찌 됐거나 이 여섯 번째 천사는 다섯 번째 천사에게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포도(grapes)’는 총 37번 나오는데 본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구절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그들의 반석이 우리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니 우리의 원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도다 이는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독이 든 포도이니 그 송이는 쓰며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라(신 32:31-33)”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1-5절)”
19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20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다섯 번째 천사는 낫을 땅에 휘둘러 포도를 거둔 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이후 이 틀은 성 밖에서 밟히는데, 악인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 성 밖에서 심판을 받기 때문이며(계 22:15), 속되고 가증하고 거짓된 것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계 21:27). 레위기에서도 죄와 부폐를 상징하는 나병에 관련한 모든 것들은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리고 태워야 했습니다(레 14:40-41). 낫으로 포도를 거두고 포도주 틀을 밟는 장면은 요엘의 다음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면의 민족들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지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민족들은 일어나서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욜 3:11-14)”
즉, 이 장면은 계시록 16장에서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 강물이 마르게 하자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온 천하 왕들을 전능하신 하나님과 전쟁하기 위해 아마겟돈이란 곳에 모은 부분과 19장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틀을 밟으시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포도주 틀(wine press)’은 성경에 총 18번 나오는데(민 18:27, 30; 신 15:14; 삿 6:11, 7:25; 왕하 6:27; 욥 24:11; 사 63:3; 렘 48:33; 애 1:15; 호 9:2; 슥 14:10; 마 21:33; 계 14:19, 20, 19:15) 주로 대적의 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포도주 틀에서 난 피는 말 굴레에까지 닿고 1600 스다디온에 퍼집니다. 틀에서 나온 피가 ‘말 굴레’까지 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내려오는 하늘의 군대들이 탄 말들의 굴레 위까지 찰 만큼의 깊이란 것입니다(계 19:14). 말 굴레에까지 닿으려면 적어도 깊이가 4-5피트(1-1.5미터)가 되는 셈이니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또한 그 피는 1600 스다디온(그 당시 로마가 쓰던 측량)에 이르는데 이것은 200마일(322킬로미터)에 해당하며 팔레스타인 땅의 길이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북쪽에 위치한 아마겟돈에서 남쪽에 있는 에돔까지 피가 흘러내리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묘사에 맞는 길이의 계곡은 갈리리 바다 북쪽에서 시작해서 홍해까지 뻗어 있는 요단 계곡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끝으로 요단 계곡 지도를 첨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