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가나의 혼인잔치

요한복음 2장 1-11절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위 내용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최근에 소그룹 성경 공부에서 4절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질문하신 분은 이 구절에 대한 미국 목사님의 설명을 한번 찾아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답니다.

저 역시도 오래전 이 구절에 대한 설교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를 향해 ‘여자여’라고 하면 낮춰 부르는 것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 ‘Your Lady’와 같은 극존칭이라고 하는 분도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마리아가 나서서 설친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며 마리아를 폄하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흘려들었던 내용이었고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해 보진 않았던 차에 갑자기 던져진 질문이었지만, 지난 십수년간의 성경 연구와 성령의 조명을 힘입어 대답하면서 각 구절의 의미가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었기에 글을 올립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 즉 성령의 숨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특히 요한복음은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이 뚜렷한 책입니다. 공관복음과는(마태, 마가, 누가) 뚜렷이 차별화된 요한복음은 책 전체가 예표에 성령의 조명을 요하는 비유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에 대한 질문을 갑자기 받았을 때 떠오른 사실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요한복음 2장 1-4절에 나오는 포도주는 구약 즉 동물의 피로 맺은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반면 5절에서 11절에 나오는 물에서 변한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게 될 새 언약, 즉 신약에 따른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포도주에 대한 이런 깨달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을 읽는 중에 임했던 것인데, 지난 2018년도에 올린 ‘새 술은 새 부대에의 참된 의미’란 글에 자세히 적어 놓았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여자여’란 표현으로 두 번 부르시는데, 첫 번째는 2장의 가나의 혼인잔치이고, 두 번째는 19장의 십자가 선상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얘기하십니다(요 19:25-26). 이처럼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딱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마리아를 두 번 다 ‘여자여’라고 부르셨는데, 그것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닌, 성경의 예언에 입각한 ‘참 이스라엘’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인데, 성경 연구가인 R. K. Bultmann은 예수님의 어머니는 유대인 기독교를,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는 이방인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주석가 이상훈은 마리아를 거짓 이스라엘과 구분돼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대로 성실해 온 진정한 이스라엘의 대표로(롬 9-11장 참조) 해석했고, 사랑하는 제자는 참 이스라엘의 연속을 담당할 예수를 믿는 기독교 공동체로 해석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라고 하신 사실이 함께 고려되며, 마리아를 창세기 3장 15절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에 등장하는 ‘여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친인 마리아를 ‘여자여’로 부르시며, 자신이 바로 이 여자의 후손으로 와서 세상의 왕인 사단을 이기신 분이심을 드러내고 계시며,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 이 승리의 사역을 이어가기를 위임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아들이 된 요한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된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표가 되며, 마리아는 ‘여자의 후손’에 나오는 구속사의 시작과 ‘시온’이 나타내는 신실한 이스라엘의 대표가 됩니다. Raymond Brown 교수 또한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를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도록 묘사한 것은 메시아 시대의 이브와 그 자손의 새 백성을 탄생시키는 딸 시온에 관한 구약성서의 주제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분께, 2장의 ‘여자여’란 표현은 어머니 마리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참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고,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질 새 언약, 즉 성령의 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2장의 다른 구절들의 의미까지 자연히 풀어지면서 전체를 설명하게 됐습니다.

즉, 3절에서 ‘포도주가 떨어진지라’가 상징하는 것은, 구약의 언약, 즉 동물의 피로 맺은 모세의 언약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게 깨달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가 그 점에 대해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걸로 개역 개정엔 되어 있지만, 원어엔 “여자여 (그게) 나와 너에게(to me and to you:emoi kai soi) 무슨 상관이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나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영어 번역본들을 보니 영어로도 마치 예수님이 내가 너랑 무슨 상관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오역되어 있음을 봅니다. 원문 링크를 걸어두니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어찌됐거나 이 구절의 의미는 ‘구약의 율법, 즉 동물의 피로 맺은 제사 언약이 끝났다고 한들(동물의 피가 떨어졌다고 한들) 참 이스라엘아, 그게 너와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다만 아직은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모든 사람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하나님의 피로 새 언약을 맺을 것이지만 아직 십자가 구속의 때는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얘기하고, 하인들은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씻는 물 항아리 6개에 물을 채우시라는 말씀을 듣고 아귀까지 채웁니다. 그리고 그것을 연회장에게 갖다주니 그것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이 부분도, ‘정결 예식에 따른 물 항아리’가 나타내는 것처럼 주님께서 모세의 법, 즉 율법을 성취(물항아리의 아귀까지 물을 가득 채움)하시고, 성령의 법 즉 새로운 생명의 새 언약으로 바꿔 주실 것임을 예표로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연회장이 신랑에게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고 얘기하는 부분도 구약보다 신약이 훨씬 나은 언약임을 시현한 것이라고 그분께 설명해 드리게 됐었습니다. 이 모든 깨달음을 비교적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히브리서의 다음 구절에 간단명료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 8:6, 13, 9:11-12)”

신랑 되시는 주님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세상 곳곳에 흩어진 주님의 신부인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칩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5 thoughts on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 가나의 혼인잔치

  1. clear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으로 회복중에 있는 며느리와 나누겠습니다.
    2023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2024년에 모든 민족이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주안에서 평안하시고 강건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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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며느님이 회복중이시라니 다행입니다. 댓글이 늦으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며느님 상태가 안좋은 건가 잠깐 걱정이 됐었네요. 저도 이제는 권사님 댓글에 익숙해졌나 봅니다.
      그러게요. 2023년이 벌써 다 갔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2024년엔 좀 더 많은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기를 소망해봅니다.
      영육간에 강건하시고 주안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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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 이적 사건이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첫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과연 예수님의 공생애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몇몇 사람이 복음서를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은혜의 복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종종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얼마나 엄격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시기 위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5-7장에서 상상수훈을 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은 도저히 인간으로서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이거든요. 자 봐라, 너희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포기하라. 이제 새로운 법이 올 것이다.

    이런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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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4복음서가 구약과 신약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끔 행위의 구원을 말씀하셨고 또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니 새로운 법이 올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보아도 됩니다. 제가 올린 글들 중에서 다음 3개의 글들에 코멘트하신 것과 비슷한 개념이 나오니 읽어보시고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홈페이지로 가셔서 이 제목들을 누르면 글로 연결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의 참된 의미
      사람에겐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동산 한 가운데 두셨나? – 율법과 성령의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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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코멘트에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전한 대화를 하는 것이 참 오랜만입니다. 사실 제가 최근 몇 년 동안 성경을 등한시한 것이 반성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전체에 대한 구원자로서의 사역과 이스라엘 민족적 왕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세대주의자가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예언적인 부분에서는 참으로 맞다고 봅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민족적으로 부활했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성경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복음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말하는 것은 이중적으로 해석될 수가 있어요. 민족적인 메시아로서, 혹은 영원한 구원의 중보자로서, 물론 바울의 서신을 통해 전인류의 구원자로서 면모가 부각이 되기도 하지만, 로마서만 보더라도 이스라엘의 민족적 부활이 희망될 뿐만 아니라 예언되어 있습니다. 바울 서신의 일부는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그러한 부분을 함부로 풀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고요.

        조금 산만하게 답변을 달고 있군요. 제가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이렇게 답변을 다는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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