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장 14절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한국어나 영어로는 전달되기 어려운 뉘앙스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란 짧은 표현 안에 담겨 있는데, 그 이유는 지난 글에서도 다룬 “ginomai(기노마이)”란 단어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way·hî(웨이히)’라고 하며, 영어로는 “it came to pass”로 번역하는데, A란 일이 일어나고 어떤 정해진 시간이 흐른 후에 B란 일이 일어나게 됐을 때 쓰이는 접속사로 특별히 말씀의 성취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된(ginomai)” 이 사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것이며 정해진 시간이 흐르매 말씀대로 성취된 사건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릴 택하셨습니다(엡 1:4-5).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우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5).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해 예정하신 것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로 모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계획으로 예정을 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었고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엡 1:9-12).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여기서 ‘거하시매’로 번역한 ‘eskēnōsen(에스케노센)’은 ‘장막 치다(성막 치다)’란 의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낙원 가운데 친히 거닐며(창 3:8) 창조하신 사람들 및 창조물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분리가 일어난 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세우신 성막 가운데 거니시며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때부터 심지어 이 날까지 아무 집에도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거닐었나니 내가 온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걸은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 어느 지파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느냐, 하고 한 마디라도 말하였느냐?(삼하 7:6-7)”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범죄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난 후(겔 10:15-19) 신약에 와서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사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초림에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일시적으로 인생 가운데 장막(tabernacle:성막)을 치사 함께 거하셨었다면 재림 때 이루실 장막절(feast of tabernacles)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져 하나님의 왕국(나라)이 이 땅 가운데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나라)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오 시온의 딸아, 노래하며 기뻐하라. 보라, 내가 와서 네 한가운데 거하리로다. 여호와가 말하노라그 날에 많은 민족들이 여호와와 연합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한가운데 거하리니 그리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슥 2:11-12).”
요한복음 1장 15절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여 외치기를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합니다. 여기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로 번역한 부분을 직역하면 “내가 있기 전 그가 있었느니라”입니다. 육신적 탄생으로만 생각한다면 요한이 먼저 왔습니다. 요한의 어머니였던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보다 6개월 먼저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주님은 요한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장 24-27, 36-38절
24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제사장 가문으로 시집간 엘리사벳과 달리 마리아는 다윗의 자손이긴 했지만, 목수였던 요셉과 약혼합니다. 더구나 아직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게 돼서 세상눈으로 보면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부끄럽고 조용한 출산을 해야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였던 사가랴가 성전에서 당번을 설 때 천사로부터 탄생 고지를 받았고 노년의 엘리사벳에게 잉태되어 탄생부터 많은 관심과 기대를 받았던 요한과는 너무 비교되는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높으신 하나님 아들의 탄생이 이렇다는 것은 성경은 결코 사람의 상상력으로 쓴 소설이나 위인전이 아니며 사실대로 쓴 진실한 책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들이나 독재자들은 탄생을 미화하기에 바쁩니다. 흉이 될 만한 부분이나 미심쩍은 부분은 모두 지우고 각색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예수 그리스도는 요즘 말로 하면 미혼모에게서 나셨습니다. 약혼자였던 요셉이야 꿈에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니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사람들 눈에는 그냥 사생아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손가락질 받을만한 상황을 피해 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가 그것을 꿈으로 통지받은 요셉과 바로 혼인했더라면 적어도 외면상으로는 수치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복음 1장 56절에 보면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고 난 다음,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녀가 출산하기 전까지 약 3개월간을 함께 있다가 옵니다.
즉, 마리아가 요셉과 정식으로 결혼한 시기는 적어도 임신 3개월 이후였던 것입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시집을 왔는데, 6개월도 안 돼서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면 그 남자의 아이가 아니라는 게 감춰질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도 보는 눈이 곱지 않았을 텐데,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시대였으니 마리아와 예수님이 과연 어떤 눈총과 험담을 감수하며 살아야 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때문에 수치와 모욕을 당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세상눈으로는 치욕적일 수밖에 없는 일을 감당하는 것으로 오히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놓고 증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는 태어나심과 동시에 사생아로 낙인찍혀 멸시와 무시를 당하셨고, 죽으실 때는 십자가의 모욕과 수치를 감당하셨습니다. 하지만 장사된 지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영광을 위한 십자가의 길에서 수치와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자녀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기에 그분과 함께 영광받기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할 것이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롬 8:17-18).
때문에 성경은 우릴 연단하려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들이며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우리 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벧전 4:12-14).
요한복음 1장 16-17절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6절과 17절을 원어로 살펴보면 번역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의역일 뿐이고 직역은 ‘은혜에는 은혜라(charin anti charitos)’ 즉, ‘은혜는 은혜로 대체하느리라’입니다. 이 ‘anti(안티)’란 단어는 신약에 총 22번 나오는데 단어를 눌러 사용된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바로 된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 번역으로는 킹제임스가 맞게 번역하여 ‘grace for grace’라고 했고 다른 영어 번역본들은 ‘grace upon grace’라고 의역했습니다. 여기서 ‘for’로 번역된 헬라어 ‘anti(안티)’는 ‘대체하다, 교체하다, ~을 위해’란 의미로 모세의 율법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에도 쓰입니다(마 5:38). 구약의 율법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던 것이 신약의 성령의 법에서는 ‘은혜에는 은혜’가 되는 진정한 은혜의 역사로 승화된 것입니다.
이처럼 ‘anti(안티)’란 단어의 앞과 뒤에 오는 단어들은 서로 동등하며 대체 가능한 것으로 이 ‘은혜에는 은혜라’ 또는 ‘은혜는 은혜로 대치되느니라’란 의미는 이어지는 17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던 모세의 율법은 오직 또 다른 하나님의 은혜, 즉 아버지 품속에 있는 진리이신 독생자 예수로만 대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16절과 17절, 두 구절을 원어에 맞게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충만함으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이라 은혜에는 은혜니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고 그로인해 은혜와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왔느니라(For the law through Moses was given which(hē) grace and truth Jesus Christ came)”
여기서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으로 인해 은혜와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의미는 16절에서 말한 ‘충만함(성취)’, 즉 율법의 성취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완전하게’로 번역한 헬라어가 도로 ‘성취, 충만’을 의미하는 ‘pléroó(플레이루)’이며 영어로는 ‘fulfill’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8절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분의 얼굴을 보고 살 자도 없습니다(출 33:20). 다만 천사로 현현한(물질화된) 하나님을 본 사람도 있고, 영광의 구름으로(역시 물질화된) 대면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18절을 직역하면, “하나님을 어느 때에도 본 자가 아무도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품속에 있던 독생자를 나타내셨느니라(선포하신 것이라)”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드니로 돌아와서
요한복음 강해를 읽으며 위로와 소망의 시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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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궁금했는데, 잘 다녀오셨다는 연락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더욱 가까운 이때 말씀으로 위로와 소망의 시간을 갖는 권사님의 귀한 믿음이 제게도 힘이되고 위로가 됩니다.
강건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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