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5) – 와서 보라(요 1:28-51)

요한복음 1장 28-34절
28 이 일은 요한이 세례 베풀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32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사도 요한은 날짜의 시작을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던 날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의 첫째 날(Yom:날들)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시작한 날로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를 운행하시던 날(창 1:2)’이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그 빛과 어둠을 나누신 첫째 날(창 1:3)’에 놓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첫째 날이 그랬던 것처럼 세례 요한은 죄의 혼돈과 죽음의 공허 가운데 있던 사람들을 어둠의 물 가운데에서 세례를 주다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비둘기같이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제 그 이튿날인 둘째 날이 되었을 때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한 내 뒤에 오실 나보다 먼저 계신 이는 바로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 죄를 지고 가는”이란 번역은 원어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airōn(아이론)’은 ‘어떤 것을 들어서 등이나 어깨에 지고 가서 버려 없애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상 죄를 대신 지우시고 그것을 가져가 없애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신 후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르셨던 둘째 날처럼 세례 요한은 ‘내가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고 증언합니다.  

요한복음 1장 35-36절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제 그 이튿날인 셋째 날이 되었을 때, 두 제자와 함께 있던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다시 한번 말합니다. 여기서 거니심으로 번역한 헬라어 “peripateó(페리파테호)”는 신약에 총 96번 나오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살아가는 것’과 동일시되는 단어였습니다. 즉 그냥 ‘걷다’는 의미보다는 ‘삶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고(믿음으로 걸으라, 정직하게 걸으라 등등), 특별히 ‘완전히 한 바퀴(궤도)를 돌며 걷는 것(walk around in a complete circuit or full circle)’을 의미합니다. 초림의 예수님이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친히 지고 가셔서 없애려고 이 땅에서 순환하며 걸으셨다면 재림의 예수님은 원형으로 놓여있는 7 교회(7등잔대) 가운데에서 full circle(완전한 한 바퀴)로 걷고 계십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2장 영어/원어 분석에 적었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37-42절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의 증언에 그와 함께 있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돌이켜 그들이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 하나님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 1: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내가 내 질투와 내 분노로 말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이방의 수치를 당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맹세하였은즉 너희 사방에 있는 이방인이 자신들의 수치를 반드시 당하리라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리니 그들이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라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을 성읍들에 거주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겔 36:9-10)”고 약속하십니다. 창조 셋째 날 하나님께서 땅에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돌이켜 이스라엘과 함께하실 때에는 땅이 열매를 맺고 빈 땅에 건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를 따를 때 하나님도 돌이켜 그들을 만나주셨으며 “무엇을 구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그들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를 의지하고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며(시 9:10) 그분을 기다리는 자들이나 찾는 혼들에게 선하신 분이십니다(애 3:25). 주님은 우릴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며 우리에게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8).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우리는 인내로 결실해야 할 것입니다(히 11:6).

세례 요한의 두 제자가 예수님이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습니다. 여기서 10시란 유대인들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4시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시간으로 하면 오전 10시입니다. 요한은 다른 공관 복음서와 달리 로마인들의 시간을 썼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이유는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셨을 때의 시각이 “제육시(요 19:14)”라고 적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만일 유대인의 시간이었다고 하면 낮 12시가 되기에 다른 공관복음서가 서술한 시간과 맞지 않게 되지만-누가는 낮 12시에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로 묘사합니다(눅 23:44)-로마인들의 시간이라고 하면 새벽 6시로 조화를 이룹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을 따라갔던 시각은 오전 10시였으며, 이때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안드레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얘기한 후 예수께로 데리고 옵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 은혜와 평강과 기쁨과 사랑을 참으로 맛본 자들은 아직 어둠과 사망 가운데 있는 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아옵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하는 친구, 내가 사랑하는 이웃과 그 복된 소식을 함께 나누며 함께 기뻐합니다. 말씀의 씨앗으로 새 생명을 싹틔운 사람들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웃과 더불어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안드레가 데려온 시몬을 보신 예수님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 즉 베드로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후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나아오는 장면은 예수를 먼저 믿고 거듭난 이스라엘 교회를 통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마 16:16)”라고 고백하는 이방인 교회가 탄생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장 43-46절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이제 그 이튿날 즉 넷째 날이 됐을 때 예수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에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전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구약의 성경엔 나사렛이란 지명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나사렛이란 곳은 결코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습니다. 나사렛이 위치했던 갈릴리 지역은 북쪽 변방의 땅으로 정치 및 종교의 중심지였던 남쪽 유대에 비하면 ‘이방인의 땅’으로까지 불리며 무시당하던 곳입니다. 갈릴리 지역 자체에 대한 평가가 이 정도였는데, 나사렛은 그 지역의 가버나움이나 고라신처럼  큰 도시도 아니었고 작은 촌락이었습니다.

그런 나다나엘에게 빌립은 “와서 보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번에 글을 쓰면서 “와서 보라(come and see)”란 표현을 성경에서 찾아봤더니 총 10번 나왔습니다(하나님의 완전수 1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서 “와서 보라”는 표현이 맨 처음 나오는 부분은 자신을 쫓던 두 제자에게 “와서 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39절입니다. 그렇게 따라갔던 두 제자가 예수님이 계신 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한 때가 10쯤이었는데 “와서 보라”는 표현 자체도 성경에 총 10번 나오니 성경의 오묘함은 끝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정의하는 “와서 보라”는 표현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과 경륜, 특별히 구원 사역에 관련된 복음과 부활, 믿음과 영광을 와서 보라는 것입니다(시 66:5; 사 66:18; 요 1:39, 46, 11:34; 빌 1:27; 계 6:1, 3, 5, 7).

요한복음 1장 47-49절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그 초청에 따라간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냐고 묻고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반응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총 7명의 사람이 요한복음에 나오는데 그중 한 명이 나다나엘인 것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봤다’는 게 뭐 그리 놀라워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라고 까지 나다나엘이 화답한 걸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약 5-6년 전 쯤, 성경 전체에서 ‘무화과나무’를 찾은 후 읽어봤던 적이 있습니다. 킹제임스 버전으로 “fig tree”를 찾게 되면 성경 전체에 모두 38 구절 나옵니다.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상징하는 ‘무화과나무’가 들어간 구절이 성경에 38번 나온다는 게 신기했던 것은 38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뜻 없이 헤맨 연수였기 때문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명기 2:14)”

이스라엘은 총 40년 광야 생활을 했는데 그중 2년은 그나마 목적 있는 행보라면 38년은 범죄 후 오도 가도 못하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첫 세대가 모두 죽을 때까지 정지된 상태로 기다려야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기에 38은 특별히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38에 대한 또다른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어찌 됐거나 성경에서 찾아낸 38개의 ‘fig tree’ 구절들을 하나씩 읽다가, ‘Whoso keepeth the fig tree shall eat the fruit thereof: so he that waiteth on his master shall be honoured.(잠 27:18)’란 구절을 발견했을 때 바로 이 구절이란 성령의 감동이 왔습니다. 직역하면, ‘누구든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열매를 먹을 것이라, 이처럼 자신의 주를(혹은 주인을) 기다리는 자는 영광을 얻으리라’입니다. 나다나엘은 이 잠언 구절을 묵상하며 자기 뜰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가꾸고 지키며,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를 기다리며 기도했던 거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빌립이 너를 부르기도 전,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었을 때에 보았었다’란 말씀에 놀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며 그토록 기다리던 주님을 만났다는 깨달음에 감격의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성경을 좀 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성경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나다나엘은 정통 유대인으로 구약을 늘 읽고 묵상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알기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란 말도 할 수 있었던 것이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와서 보라’는 빌립의 말에 혹시 싶어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더구나 잠언은 그들이 늘 즐겨 읽고 외우는 책이기에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가 그 열매를 먹듯이 주를 기다리는 자는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고 무화과나무 밑에서 묵상하며 이제나저제나 오실 주님을 기다렸던 듯합니다.

또한 잠언 27장 18절에 ‘주인’으로 번역된 ‘master’는 히브리 원어로는 ‘아돈’인데, ‘lord’란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 325번 나오는데 대부분 ‘주 lord’로 번역됩니다. ‘주’를 뜻하는 소문자 ‘lord’로는 183번 번역되었고 하나님을 뜻하는 ‘주님’인 대문자 ‘Lord’로는 5번, ‘주인’을 뜻하는 ‘master나 owner’로는 121번 번역됐습니다. 주님과 주인이란 이중 의미가 있는 단어이기에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주님) 이스라엘의 왕(주인)이시나이다!’라고 고백한 부분도 명확하게 이해가 됐습니다.

요한복음 1장 50-51절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

나다나엘의 반응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고 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로 번역된 부분은 하나님의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야곱(이스라엘)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치다 벧엘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가 놓였는데 그 위를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 것을 본 장면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창조 넷째 날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후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셨으며 땅을 비추게 하여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사 빛과 어둠을 나누셨습니다(창 1:14-18). 구약의 이스라엘이(요셉의 꿈에서 해와 달과 11 별로 나오는 이스라엘과 그 아들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천사들과 그 사닥다리 위에 서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었다면 신약의 넷째 날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나다나엘이 하늘과 땅을 잇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교회를 예표하는 베드로가 예수님께로 인도된 다음 날 빌립을 통해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오게 되는 것은, 교회 시대 이후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믿지 않던 이스라엘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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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4 thoughts on “요한복음 강해(5) – 와서 보라(요 1:28-51)

  1. 수고하셨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

    요사이 선교와 교육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기대하며

    예수가 없는 광야같은 세상에서

    그곳에 태어났기 때문에 복음을 전해받지

    못한 아이들과 여인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확신과 위로와 도전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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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 소식을 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육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 몰라도 영 안에서 같은 소망을 품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것에 힘이 납니다. 우리 주님 오실 그날까지 사나 죽으나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저와 권사님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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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최근에는 글을 잘 오리지 않으시는군요. 뭐든 꾸준히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찾아보니까 워드프레스를 했던 적이 있더군요. 지금은 어디에도 글을 올리고 있지 않아요. 요즘 삶에서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특히 요즘 스마트폰을 쓰게 되면서는 이렇게 댓글을 쓰는 것조차 힘들어졌어요. 다행히 사무실에서는 컴퓨터를 활용하므로, 그나마 댓글을 적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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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런 저런 일이 많았고 바쁜 나날이 되다보니 글을 쓰지 못한지 좀 됐습니다. 성경 관련 글을 쓰셨던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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