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장 원어/영어 분석 1(계3:1-11)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Sardeis)’란 이름은 요한계시록에서만 3번 등장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의미도 3가지 견해로 나뉩니다. ‘기쁨의 왕’, ‘남겨진(머무는) 것’, ‘탈출하는 자들’이란 견해입니다. 그리고 ‘편지하라’는 그냥 ‘쓰라’는 의미의 ‘graphó(그라포)’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1장 11절에 7 교회에 보내는 책(두루마리)에 쓰라는 지시입니다.

본절에 나오는 “일곱 영”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에서만 본절을 포함해 4번(계 1:4, 본절, 4:5, 5:6) 나옵니다(4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이 4구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계 4:5)’이며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에게 있는 일곱 눈(계 5:6)’입니다.

그렇다면 ‘일곱 등불’은 또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성경 전체에 총 50번 등장합니다(창 15:17; 출 25:37(2), 27:20, 30:7, 30:8, 35:14, 37:23, 39:37(2), 40:4, 40:25; 레 24:2; 24:4; 민 4:9; 8:2(2); 8:3; 삿 7:16; 7:20; 삼상 3:3; 삼후 22:29; 왕상 7:49; 왕상 15:4; 대상 28:15(3); 대하 4:20; 대하 4:21; 대하 13:11; 대하 29:7; 욥 12:5, 41:19; 시 119:105, 132:17; 잠 6:23; 13:9; 20:20; 사 62:1; 겔 1:13; 단 10:6; 슥4:2; 마 25:1, 3, 4, 7, 8; 계 4:5; 8:10). 이 또한 놀라운 것이 50은 은혜와 온전한 속량 및 자유의 완전 수이며 성령의 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숫자 5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lamp’가 들어간 구절들을 성경에서 모두 찾아 읽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계명 및 언약 즉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몇 구절을 예로 든다면 등불은 창 15:17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시 119:105절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며 잠언 6:23절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이 발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란 표현입니다. 즉, 켜진 등불이란 빛을 발하고 있는 등불이란 의미이기에 잠언 6장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와 함께 보아야 하며 50이란 수와 곁들여 구약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즉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5장 6절에서 나오는 “일곱 눈”은 무엇일까요? “일곱 눈”이란 표현은 구약과 신약에 1번씩, 총 2번 등장하는데(증언, 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슥 3:9)”

따라서 이 “일곱 눈”은 어린 양에게 있으며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에 있는 것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할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로 신약의 헬라어로 표기된 “예수”와 같습니다.

숫자 7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 및 완성을 의미합니다(숫자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관련 구절들이 갖는 2와 7과 50의 특성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의 의미를 풀어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성령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완전한 속량의 언약입니다.

본절의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사자)”라고 계시록 1장 20절에 이미 그 의미가 해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주님과 같은 천사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고전 15:47-53).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며(엡 5:25-33) 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몸이기(엡 4:15-16; 엡 5:23)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 관계이면서도 부부이기에 한 몸이 되는 것을 에베소서 5장 23-33절까지 설명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삼위일체의 하나님만큼 현재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래야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미스테리, 즉 ‘비밀’입니다.

본절의 ‘죽음(dead) 또는 죽은 자(the dead)’를 뜻하는 ‘nekros(네크로스)’는 신약에 130번 나오는데, 죽음을 뜻하거나 생명이 없는 물체, 즉 시체를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영적인 사망을 뜻할 때도 쓰이며 특히 살리는 영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지 않고 죄 가운데 죽은 상태 및 ‘사망에 속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8:22; 눅 9:60; 골 2:13; 엡 2:1, 5; 본절).

따라서 1절의 의미를 분석해서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데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성령,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실 완전한 속량의 보혜사와 완전하게(7) 된 교회의 천사들(그리스도의 몸)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영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받은 생명의 이름 즉,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졌지만 실은 죄 가운데 죽은 사망에 속한 자도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일깨어’는 ‘깨어 있으라(to be awake, to watch)’란 의미의 ‘grégoreó(그레이고류오)’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 총 23번 나오는데, 잠이 죽음과 연결되듯이 ‘깨어 있는 것’은 생명과 연결됩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내가 어느 날, 어느 시각에(hour) 다시 올지 알 수 없으니 깨어 있으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구절들과 비유에 8번 쓰였고(마 24:42, 43, 25:13; 막 13:34, 35, 37; 눅 12:37, 39),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슬픔과 고통 가운데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 있자고 부탁하실 때 6번 쓰였습니다(마 26:38, 40, 41, 막 14:34, 37, 38). 그리고 사도들이 성도들에게 믿음과 감사와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라는 촉구에 3번 쓰였으며(행 20:31; 고전 16:13; 골 4:2), 주님 오실 날이 도둑처럼 임하지 못하도록 깨어 있으라에 5번 쓰였고(살전 5:6, 10, 본절, 계 3:3, 16:15), 마귀가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깨어 있으라에는 1번(벧전 5:8) 쓰였습니다.

이쯤 되면 억지로 꿰맞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 즉 재림의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자들이 깨어 일어나 부활할 것이며 주님이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땅에 살아 있는 자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몸이 변화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주님이 내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으라고 얘기하신 구절은 성경에 새로운 시작, 새 창조 및 부활을 의미하는 8번 나오고, 주님이 괴로움 속에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했지만 단 한 시각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자던 제자들에게는 인간과 사단의 수 6번 쓰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믿음과 감사와 기도 가운데 깨어 있으라고 성도들에게 당부한 구절은 영적 완전함과 부활의 수 3번, 주님이 도둑처럼 임하지 못하게 깨어 있으라는 건 은혜의 수 5번, 그리고 마귀에게 삼킴을 당하지 못하게 깨어 있으라는 1번 나오니 말입니다(해당 숫자들을 누르시면 그 숫자의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행위’로 번역한 헬라어 ‘erga(에르가)’는 ‘일, 행실, 행위(work, task, deed, action)’등을 뜻하는 ‘ergon(에로곤)’의 복수형입니다. 영어로는 ‘works, deeds, actions’ 등으로 번역됐습니다. ‘온전한 것’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pléroó(플레이루)’인데 ‘성취하다, 완성하다, 끝마치다’란 의미입니다. 신약에 총 88번 나오는데 이 단어가 쓰인 구절들을 살펴보면 특별히 예언의 성취를 의미하는 단어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죽게 된 것’으로 번역한 ‘ha(하) emellon(에멜론) apothanein(애파때나인)’은 ‘곧 죽게 될(which are about to die)’입니다. 즉, 곧 죽게 될 ‘그 남은 것들을(ta loipa)’을 굳건하게(stērison) 하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2절을 원어대로 직역해서 그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믿음 안에서 감사와 기도로 깨어 있어 곧 죽게 될 그 남은 것들을(그 나머지를) 굳건하게 하라 내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네가 성취한(완성한) 일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생각하고’는 ‘기억하라’란 의미의 ‘mnémoneuó(므네이모뉴오)’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여 지키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본절에 ‘회개’로 쓰인 헬라어는 ‘metanoeó(메타노에오)’입니다. 그냥 후회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속사람이 바뀌어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걸 의미하며 신약에 총 34번 나옵니다(좀 더 자세한 내용은 ‘회개, 후회, 돌아옴의 차이‘에 적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은 ‘그러므로(oun) 만일(ean) 깨어 있지(grēgorēsēs) 아니하면()’입니다. ‘깨어 있으라(to be awake, to watch)’는 의미의 어원 ‘grégoreó(그레이고류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2절에 이미 했으니 넘어갑니다.

주의 날에 주님이 ‘도둑같이 이르실 것’이란 표현은 신약에 총 7번(하나님의 완전 수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옵니다(마 24:42-44; 눅 12:39-40; 살전 5:2-4(2); 벧후 3:10; 본절; 계 16:15).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밤에 도둑이 몰래 침입하듯이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기에, 악인들은 피할 새도 없이 갑자기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둠에 있지 않고, 빛의 자녀들이요 낮에 속했기에 그날이 도둑같이 임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처럼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는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너에게 이르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느 때’, 즉 어느 ‘시각에(hóra) 네 위에(epi) 이를지 네가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깨어 있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처럼 어둠에 속한 자들이기에 피할 새 없이 갑자기 멸망당할 것이란 무서운 경고입니다. 특이한 것은 앞에 3 교회가 발람과 같은 자들(니골라 당)이나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가 있어서 미혹 당하기도 하고 힘써 싸우기도 하고 인내하기도 했던 교회라면, 이 교회는 그냥 자신들이 살아 있는 줄 알지만 실은 죽은 좀비 같은 교회라는 겁니다. 자각증상조차 없기에 실은 더 심각하고 무서운 상태입니다.

과연 어떤 교회가 이런 교회에 해당할까 생각해 봤을 때 떠오르는 이단 혹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건 지극히 사적인 의견이니 내가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교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경우는 어차피 이단이긴 하지만 성령의 역사도, 영혼의 불멸도, 지옥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하는데 그분이 도로 하나님이시라는 삼위일체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만 자꾸 거론해서 좀 그런데, 그들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단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어 뭐라 할 말도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란 글에서도 썼듯이 여호와의 증인 아니더래도, 마치 예수님 때의 사두개파 같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행 23:8)”던 사람들인데, 아직도 이런 자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칭 교회들이 이 땅에 꽤 존재합니다. 설사 ‘부활’을 인정하는 것 같더래도 안에 들어가보면 결국 천사도 영도 부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비록 바리새인들은 마귀의 자식들이란 꾸지람도 듣고 악령에 쓰임 받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려는 열심이 있었으며 ‘부활도 천사도 영도 다 있다고 믿었기에(행 23:8)’ 그 안에서 구원 얻는 사람들도(아리마데 요셉, 니고데모, 바울 등등) 있었습니다(눅 23:50-53; 요 19:39, 행 9장). 그 반면에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성경에 몇 번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아예 열외입니다. 이처럼 사단조차 틈타지 않을 만큼 죽은 교회들이 앞에서 나온 3교회보다도 더 위험한 상태인 것은, 이 안에서 구원을 얻을 사람이 몇 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4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에 물을 너무도 많이 타서 도덕책 수준 정도로만 가르치기에 진리를 깨닫지 못한 채 세상 지식과 전혀 구별되지 못한 교회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세상과 동화되려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요 14:6)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것까지(행 4:12) 부인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회야말로 자신들이 잘하는 줄 알고 살아 있는 줄 알겠지만 실은 죽은 교회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지 않았기에 주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지 않으실 자들입니다(마 10:32-33; 눅 12:8-9).

따라서 3절을 원어대로 직역해서 그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해 내어 속사람이 바뀌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굳게 잡으라 만일 믿음 안에서 감사와 기도로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에게 집어삼킴을 당해 내가 어느 시각에 네게 도둑같이 이를지를 네가 알지 못 하리라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성경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옷’을 가리키는 단어들이 나오지만 한국어 번역엔 대부분 그냥 ‘옷’으로 뭉뚱그려 번역했습니다. 영어는 그나마 구분해서 번역한다고 했지만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지 않고 뒤섞여 번역한 부분이 꽤 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성경에 나오는 여러 ‘옷’에 대해 분석하고 연구를 하려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요한계시록을 다루면서, 그 문제에 다시 당착했습니다. ‘옷’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따로 글을 써서 올려야 할 것 같고, 지금은 해당 구절에 나오는 옷에 대해서만 다루려고 합니다.

본절에 나오는 ‘옷’으로 번역한 헬라어 어원 ‘himation(히마티온)’은 신약에 총 61번 나옵니다. 옷 위에 걸치는 긴 겉옷을 의미하는데 특히 목과 팔이 들어갈 구멍이 있는 한 조각으로 된 소매 없는 망토를(cloak, tunic) 의미합니다. 주로 양이나 염소의 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은 그 사람의 신분 및 영혼의 상태와 감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옷을 입은 사람과 동일시되는 단어이며 부활의 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고전 15:53).

‘더럽히다’로 번역한 헬라어 ‘molunó(몰루노)’는 ‘더럽히다, 부정하다’란 뜻인데 성경에서는 특히 우상에 의한 영적인 더럽힘을 의미하며 신약에 3번 나옵니다(고전 8:7 본절 계 14:4). 3이란 수는 ‘어떤 것의 완성 또는 영적인 완전함’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안 좋은 것의 완성, 즉 ‘더러운 영의 완전함’을 의미합니다(3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런 교회에서 조차도 ‘몇 명(oligos:few)’은 ‘흰 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거닐 것(peripateó)’이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본절에서 ‘다니리니’로 번역한 ‘peripateó(페리파테오)’는 신약에 총 96번 나오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살아가는 것’과 동일시되는 단어였습니다. 즉 그냥 ‘걷다’는 의미보다는 ‘삶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고(예: 믿음으로 걸으라, 정직하게 걸으라 등등) 특별히 ‘완전히 한 바퀴(궤도)를 돌며 걷는 것(walk around in a complete circuit or full circle)’을 의미합니다. 계시록 2장 1절에서 주님이 원형으로 놓여있는 7 교회(7등잔대) 가운데에서 full circle로 걷고 계신다고 했을 때도 쓰였던 단어입니다.

본절에 쓰인 ‘흰 옷’은 즉 ‘흰 himation(히마티온)’과 정확히 같은 단어가 쓰인 구절들을 찾으면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옷이 빛처럼 희게 빛났을 때(마 17:2; 막 9:3), 그리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쓰였으며(본절, 계 3:5, 3:18),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앉아 있던 24장로에게 쓰였습니다(계 4:4). 특히 망토인 ‘himation(히마티온)’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벗은 몸을 짐슴의(아마도 양) 가죽으로 덮여주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가 덮여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4절을 원어대로 직역해서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데에 자신들의 영혼육을 우상으로 부정하게 하지 않은 적은 수의 사람들이 너에게 있느니라 그들이 나와 함께 그리스도로 입고 살아갈 것이니 그들은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입니다.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기는’으로 번역된 ‘nikaó(니카오)’는 ‘정복, 승리, 이기다’란 뜻으로 신약에 총 28번 나옵니다(글자를 누르면 28구절을 다 볼 수 있습니다). 7×4이기에 7에 대한 의미와(영적 완전함을 뜻하는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4에 대한 의미의(세상 및 창조물을 뜻하는 4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조합입니다. 따라서 ‘영적인 완전함이 깃든 세상’ 정도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28은 ‘영생’을 의미하는 숫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nikaó(니카오)’란 단어는 예수님 및 하나님의 말씀에 엮여서 5번 쓰였고(눅 11:22; 요 16:33; 롬 3:4; 계 5:5, 17:14), 교회(제자 및 성도)에 엮여서는 17번 쓰였으며(요일 2:13, 14; 요일 4:4, 5:4(2), 5:5; 계 2:7, 11, 17, 26, 3:5, 12, 21(2); 12:11, 15:2, 21:7), 악한 것에 엮여서는 6번 쓰였습니다(롬 12:21(2); 계 6:2(2), 계 11:7, 13:7).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어느 것 하나 어그러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nikaó(니카오)’란 단어가 말씀 및 예수님 관련해서 은혜와 율법의 수 5번 나오고, 교회(성도) 관련해서는 부활 승리를 의미하는 17번 나오며, 악한 것과 관련해서는 마귀의 수 6번 나오니 말입니다(각 숫자를 누르면 그 숫자와 관련된 자세한 내용을 읽을 수 있습니다).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고 또 숫자의 의미와 조합해보면, 교회에게 ‘이긴다’는 의미는 ‘사단 마귀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성도들이 악을 이기고 부활 승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명책’은 신약에 총 8번 나옵니다(빌4:3, 본절, 계 13:8, 17:8, 20:12, 20:15, 21:27, 22:19). 이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성도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며(빌 4:3; 계 3:5), 바다에서부터 올라오는 짐승을 놀랍게 여기지도 않으며 경배하지도 않습니다(계 13:8, 17:8). 또한 백보좌 심판 때에 생명책도 다른 책들과 함께 열리는데 누구든지 이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사람들은 불못에 던져지게 될 것이며(계 20:12, 15), 예루살렘 성안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계 21:27).

본절에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신 표현은 주님이 마태복음 10장 32-33절과 누가복음 12장 8-9절에서 하신 말씀을 합쳐놓은 것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에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5절의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단 마귀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악을 이기고 부활 승리한 자들은 이처럼 그리스도로의 의로 옷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첫째 부활에 속한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였기에 나도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귀 있는 자’란 표현은 신약에 총 13번 나옵니다(마 11:15, 13:9, 13:43; 막 4:9; 눅 8:8, 14:35; 본절, 계 2:11, 2:17, 2:29, 3:6, 3:13, 3:22). 이 표현이 쓰인 구절들을 보면 모두 주님과 성령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교회에게(성도에게) 설명하실 때 ‘귀담아들으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13의 의미는 7에 대한 글에 간략히 적어놓았으니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6절의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왕국(나라)에 대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들을지어다”

7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빌라델비아’는 요한계시록에서만 2번 등장하며 이름의 의미는 ‘형제 사랑’입니다. 그리고 ‘편지하라’는 그냥 ‘쓰라’는 의미의 ‘graphó(그라포)’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록 1장 11절에 7 교회에 보내는 책(두루마리)에 쓰라는 지시입니다.

‘다윗의 열쇠’란 표현은 구약에 한번 신약에 한번 총 2번 나옵니다(증언 및 증인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과 이사야서 22장 22절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1-22)

즉, ‘다윗의 열쇠’란 이사야서에 비추면 ‘다윗의 집의 열쇠’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다윗의 집’이란 표현은 성경에 총 25번 나오는데 구약에 24번 신약에 1번 나옵니다.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다윗의 집’은 ‘다윗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가, 즉 다윗의 왕국(삼상 20:16; 삼하 3:1, 6; 왕상 12:19, 20, 26, 13:2, 14:8; 왕하 17:21; 대상 17:24; 대하 10:19, 21:7; 사 7:13; 렘 21:12; 슥 12:10, 12, 13:1; 눅 1:27)’을 의미하기도 하며 성전과 다윗의 왕궁이 있었기에 거룩하게 여겨졌던 다윗의 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대하 8:11; 느 12:37; 시 122:5). 그런데 재림의 때에 ‘다윗의 집’은 하나님과 같고 그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천사와 같을 것이라고 스가랴 선지자는 예언합니다(슥 12:6-8).

따라서 7절의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족속의 아버지이며 다윗 왕국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리스도가 이르시되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배반’으로 번역한 헬라어 ‘arneomai(아르네오마히)’는 ‘부인하다, 부정하다’란 의미입니다. ‘행위’로 번역한 헬라어 ‘erga(에르가)’는 ‘일, 행실, 행위(work, task, deed, action)’ 등을 뜻하는 ‘ergon(에로곤)’의 복수형입니다. 영어로는 ‘works, deeds, actions’ 등으로 번역됐습니다.

따라서 8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그것을 능히 닫을 자가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들(일들)을 아노니 네가 작은(적은) 능력을 갖고서도 내 말을 지켰으며 내 이름을 부인(부정)하지 않았노라

9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탄의 회당’이란 표현은 본절과 계시록 2장 9절에 두 번 나옵니다. 이들은 서머나 교회에 있던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며 성도들을 비방하던 자들입니다. 따라서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9)’ 또는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본절)’는 말씀은 로마서 2장 28-29절과 연결선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kruptos:감춰진, 가리워진)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즉, 겉에 드러나는 육신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유대인이 아니요 내면의 감춰진 마음(심장)에 할례를 받은 자들이 유대인이란 것입니다. 이는 적힌 글(gramma)이 아닌 성령(영:pneumati) 안에서 된 것이기에 이들로 사람이 찬양받지 않고(epainos:praise)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집회로 모이던 곳이지만 신약의 교회에도 딱 한 번 쓰입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synagōgēn)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약 2:2)” 개역개정은 원어에 충실하게 ‘회당’으로 번역했지만 ‘집회’로 번역한 성경들도 있습니다.

‘비방’으로 쓰인 단어는 ‘비방 및 모독’ 특히 ‘신성모독’으로 쓰이는 ‘blasphémia(블레스페이메아)’인데 신약에 총 18번 나옵니다. 이 ‘blasphémia(블레스페이메아)’란 단어의 의미는 좋은 것을 좋다고 얘기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얘기하는데 더디고 내키지 않아 하는 상태를 뜻하며 더 나아가서 좋은 것을 나쁘다고 하고 나쁜 것을 좋다고 하는 악함을 뜻합니다.

본절엔 ‘그들 중 몇을 네게 주어’라고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그냥 ‘그들’입니다.

따라서 9절의 의미를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라, 성령 안에서 감춰진 마음에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아니면서 거짓 행세하는 사탄의 회당에 있는 자들을 내가 네게 주리라, 보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절하도록 할 것이니 그들이 내가 너를 사랑한 줄 알게 되리라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시험의 때’는 ‘시험의 시각(hóra:hour)’입니다.

10절을 직역해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으니 나 또한 시험의 시각으로부터 너를 지키리라 그것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리라

11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면류관’으로 번역한 헬라어 ‘stephanos(스테파노스)’는 ‘머리에 쓰는 둥그런 관’을 의미하며 총 18번 나옵니다. 성경엔 영적인 7개의 관이 나오는데, 영광(영화)의 관(잠4:9, 16:31; 사 28:5, 62:3, 렘 13:18, 벧전 5:4), 교만의 관(사 28:1, 28:3), 썩지 않는 관(고전 9:25-26), 기쁨의 관(살전 2:19), 의의 관(딤후 4:8), 생명의 관(약 1:12; 계 2:10), 그리고 바울은 복음으로 얻은 형제들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빌 4:1)이라고 합니다. 본절에 있는 면류관은 어떤 관인지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지만 면류관(stephanos)의 의미 차체가 승리, 통치입니다.

11절을 직역해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승리요 통치를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22절까지는 다음편에 적겠습니다.

Published by tnb4word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을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내도록 연구하라(딤후 2:15)" 성경 관련 질문이나 코멘트는 gloryb2mylord@gmail.com로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I am a diligent student of the Word. Please reach out to me with any bible related questions or comments via the email address ab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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