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하늘의 문(또는 창문)’에 대한 구절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때 하늘의 창(window)을 열고 닫으시는 것으로 비를 쏟아붓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셨으며(창 7:11, 8:2)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가져오는 자들에게 하늘의 창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말 3:10). 또한 하나님은 하늘의 문(door)을 열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셨으며(시 78:23-24) 본절에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시기 위해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열린 문(또는 창문)’에 대한 구절들을 읽어보면 열린 창은 마지막 때에 임할 심판의 창임을 알 수 있습니다(사 24:18). 또한 믿음의 열린 문(행 14:27), 사역을 위한 광대하고 유효한 열린 문(고전 16:9), 복음의 열린 문(고후 2:12),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 할 전도의 열린 문(골 4:3),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두신 열린 문(계 3:8), 그리고 본절입니다.
‘나팔’은 히브리어로 ‘שׁוֹפָר(쇼파)’ 또는 ‘יוֹבֵל(요벨)’인데 숫양의 뿔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9장 13절에 처음 쓰이며 성경 전체에 103구절에 걸쳐 총 115번(구약에 104, 신약에 11) 나옵니다.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말고 민수기 10장 8절에 처음 등장하는 제사장들만 불 수 있는 은으로 된 나팔은 히브리어로 ‘חֲצֹצְרָה(캇소쳐로)’입니다. 히브리어로는 이 두 종류의 나팔이 구별되지만 영어든 한국어든 번역본엔 모두 구분 없이 ‘나팔(trumpet)’로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차이와 조명에 대해 적겠습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은 헬라어로 ‘salpizó(샐피드조)’이며 11번 나옵니다(나눔과 심판을 의미하는 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신약에 쓰인 나팔의 용도는 구약과는 조금 다릅니다. 나중에 ‘양각 나팔’과 ‘은 나팔’의 차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적을 때 이 부분도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신약에 나온 나팔의 용도만 적겠습니다. 신약에서 나팔은 속된 사람들에 의해 공지사항이나 선전용으로 쓰였습니다(마 6:2). 그 외에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과 심판의 신호로 나옵니다(마 24:31; 고전 14:8, 15:52; 살전 4:16; 히 12:19; 계 1:10, 4:1, 8:2, 6, 13; 9:14)
따라서 1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 후에 내가 보니 보라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나와 얘기하던 그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을 들으니 이리로 올라오라 이런 것들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그리고 이 직역된 구절의 의미를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것들 후에 내가 보니 보라 하늘에 믿음과 말씀의 문, 그리스도의 비밀의 유효한 문이 열렸고 나와 얘기하던 그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이 내게 이르기를 이리로 올라오라 이런 것들 후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들을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본절의 ‘곧’은 ‘즉시’를 뜻하는 ‘eutheós(유떼오스)’인데 신약에 총 84번 나옵니다. ‘성령에 감동되었다’는 표현은 의역이고 직역은 간단히 ‘I was in Spirit[내가 성령(영) 안에 있어]입니다.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라고 했는데 그냥 ‘놓여 있고(keimai)’입니다.
따라서 2절을 원어대로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즉시(곧) 영(성령) 안에 있어 보라 하늘에 보좌(왕좌)가 놓여있고 그 보좌(왕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모양’으로 번역한 헬라어 ‘horasis(호라시스)’는 신약에 총 4번 등장하는데 ‘비전, 출현’ 등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vision, appearance’입니다(행 2:17; 본절(2), 계 9:17). 따라서 이 구절은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았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그분의 출현(나타나심:appearance)이 벽옥과 홍보석 같았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벽옥’은 ‘iaspis(제스피스)’로 영어로는 ‘jasper’입니다. 반투명한 값지고 귀한 보석인데 전체 성경에 총 7번 등장합니다(하나님의 완전 수 7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Jasper stone이 등장하는 7구절들을 읽어보면 제사장의 흉패에 물린 보석 중 하나였고(출 28:20, 39:13), 두로 왕에 비유된 사단 마귀를 장식했던 보석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겔 28:13). 또한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출현과 연관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성 예루사렘의 빛이며(계 21:11), 새 예루살렘의 벽이 Jasper stone(벽옥)으로 되어 있고(계 21:18), 12 기초석 중 첫 번째 기초석 역시 Jasper stone(벽옥)입니다(계 21:19). ‘벽옥’이 어떤 보석인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여러 색이 얼룩진 보석으로 붉은색, 노란색, 고동색 또는 초록색이며 아주 희귀하게 파란색을 띠기도 한다고 합니다. 가장 흔한 색은 철의 함류량이 많아 붉은색이라고 합니다.
‘홍보석’으로 번역한 ‘sardion(사르디오스)’는 영어로는 ‘Sardius 또는 Sardine’으로 쓰입니다. 전체 성경에 총 5번 등장합니다(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홍보석’이 등장하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벽옥’처럼 제사장의 흉패에 물린 보석 중 하나였고(출 28:17, 39:10), 두로 왕에 비유된 사단 마귀를 장식했던 보석 중 하나였습니다(겔 28:13). 그리고 본절에서 하나님의 출현과 연결된 보석이며 새 예루살렘 성의 12 기초석 중 6번째 보석입니다(계 21:20). ‘홍보석’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주로 붉은 오렌지색을 띠며 가끔 노란색도 있다고 합니다. 홍보석을 루비(ruby)라고 보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무지개’를 뜻하는 ‘iris(아이리스)’는 신약에 2번 나오는데(증언 및 증인을 뜻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본절과 계시록 10장 1절인데 주의 천사로 현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지개를 머리에 두르신 모습입니다.
“내가 또 보니 힘 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계 10:1-3)“
구약에 4번 나오는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qesheth(퀘세스)’인데 ‘화살(bow)’을 의미하며 총 76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다시는 물로 땅의 생명체들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의 증표로 무지개를 구름 가운데 두셨으며(창 9:13, 14, 16), 에스겔은 하나님의 출현의 광채를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증거합니다(겔 1:28).
‘녹보석’은 영어로 ‘Emerald(에머랄드)’인데 전체 성경에 총 6번 나옵니다. ‘녹보석’이 등장하는 구절들을 읽어보면 역시 제사장의 흉패에 물린 보석 중 하나였고(출 28:18, 39:11), 두로에서 무역으로 팔던 보화 중 하나였고(겔 27:16) 두로 왕에 비유된 사단 마귀를 장식했던 보석 중 하나였습니다(겔 28:13). 그리고 본절에서는 무지개에 둘러싸인 보좌의 빛이며 새 예루살렘의 4번째 기초석이기도 합니다(계 21:19).
요즘 북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오로라가 전 세계 방방곡곡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 본절에 나오는 색깔과 가장 가깝게 나타났을 것 같은 오로라와 해무리 무지개를 첨부합니다.
따라서 3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앉으신 이의 출현(나타나심)의 영광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를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하나님의 보좌(왕좌)를 둘러 있는 24 보좌에 앉은 24 장로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일단 숫자 24가 나오는 구절들을 모두 찾아본 후 본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구절들에 비추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나이가 많아 아들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30세 이상인 레위 사람을 계수하니 모든 남자의 수가 38,000명이었습니다. 이 중 24,000명은 여호와의 성전의 일을 보살피게 했고 6,000명은 관원과 재판관 4,000명은 문지기 4,000명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리기 위해 모든 악기로 찬송하는 자들이었습니다(대상 23:1-5). 다윗은 또한 아론의 두 아들인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자손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섬기게 했는데 엘르아살의 자손이 16명이었고 이다말의 자손은 8명이었기에 그들의 이름에 따른 24 반열로 나눈 후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해서 일주일씩 성전을 섬기게 했습니다(대상 24:1-19). 그리고 성전에서 찬송할 사람 288명도 제비를 뽑아 12명씩 24반으로 나눠 노래하게 했습니다(대상 25:7-31). 또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가문의 우두머리와 천부장과 백부장과 왕을 섬기는 관원들의 반을 나눠서 각 반열에 24,000명씩 두어서 일 년 동안 자기 반에 해당하는 달에 출입하게 했습니다(대상 27:1-15).
신약에서는 계시록에서만 숫자 24가 등장하는데 모두 24 장로에 대한 언급입니다(본절, 계 4:10, 5:8, 14, 11:16, 19:4). ‘장로’로 번역한 헬라어 ‘presbuteros(프레스부테로스)’란 단어는 흥미롭게도 신약에 66번 나오며 계시록에서는 12번(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의미하는 1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나옵니다(계4:4, 10; 5:5, 6, 8, 11, 14; 7:11, 13; 11:16; 14:3; 19:4). 장로는 신구약에 모두 있던 직분으로 이스라엘 회중에도 장로들이(출 19:7, 24:1; 히 11장) 있었고 교회에도 장로들이(행 14:23, 20:17, 21:18) 있습니다.
따라서 이 24명의 장로는 다윗과 솔로몬의 왕국에서 보여지듯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왕가의 제사장들로 섬길 24 반열의 대표들입니다. 제사장들을 엘르아살과 이다말의 24 아들들을 대표로 한 24 반열로 나눠 일주일씩 돌아가며 성전을 섬기게 했고, 찬송하는 일도 12명씩 24반으로 나눠 노래하게 했으며, 왕을 섬기는 관원들도 각 반열에 24,000명씩 두어 12달을 돌아가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들의 정체성은 구약도 신약도 아니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왕족이 된 제사장 나라요 하나님의 새 민족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8-10)”
이들은 함께 ‘새 노래’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자신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나라와 제사장들로 삼으셨기에 땅에서 왕 노릇 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지난 6천 년의 기간을 거쳐 하나님께서 수확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과 12 보좌를 약속받았었던 예수님의 12사도들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마 19:28; 눅 22:30). 또는 이스라엘의 12지파와 12사도의 이름들이 새 예루살렘의 문들과 기초석에 새겨져 있는 것을 미루어 구약 교회를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와 신약 교회를 대표하는 예수님의 12사도로 구성된 24명일 수도 있습니다(계 21:12, 14). 어찌 됐거나 이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것처럼 마지막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땅을 심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천 년간 땅을 통치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교회의 대표들입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 24:21-23)”
‘교회’는 ‘집회, 회중’을 뜻하는 헬라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를 번역한 것으로 의미는 ‘called out from’ 즉, 어떤 것이나 어떤 곳에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내다란 뜻입니다. 또 ‘called out to’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어떤 것을 하도록, 혹은 어떤 곳으로 불러내다, 또는 분리해냈다란 뜻입니다. 이 ‘ekklésia(에클레이시아)’란 단어를 영어는 ‘church’라고 번역하는데, ‘church’는 ‘주께 속한’이란 의미의 헬라어 ‘kyriakos(큐리아코스)’에서 온 것입니다. ‘church’는 신약에서만 나오는 단어이지만 그렇다고 신약 성도들만 ‘교회’는 아닙니다. 성경은 이집트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시킨 이스라엘 회중을 도로 ‘ekklésia(에클레이시아)’ 즉 ‘교회(church)’라고 부릅니다(행 7:37-38). 믿음을 다루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아벨의 때부터 내려오는 믿음의 선진들을 열거하다가 다음 40절의 내용으로 마무리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이니 우리가 없이는 그들이 완성되지(완전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 하심이라(직역)” 그러니까 창세 이후 하나님을 향한 찬란한 믿음으로 살다 간 성도들을 신약의 성도들이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장로들이 입고 있는 ‘흰 옷’은 ‘himation(히마티온)’으로 신약에 총 61번 나옵니다. 옷 위에 걸치는 긴 겉옷을 의미하는데 특히 목과 팔이 들어갈 구멍이 있는 한 조각으로 된 소매 없는 망토를(cloak, tunic) 의미합니다. 주로 양이나 염소의 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옷은 그 사람의 신분 및 영혼의 상태와 감정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그 옷을 입은 사람과 동일시되는 단어이며 부활의 몸을 상징하기도 합니다(고전 15:53). 본절에 쓰인 ‘흰 옷’은 즉 ‘흰 himation(히마티온)’과 정확히 같은 단어가 쓰인 구절들을 찾으면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옷이 빛처럼 희게 빛났을 때(마 17:2; 막 9:3), 그리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에 대해 말씀하실 때 쓰였으며(계 3:4, 5, 18), 본절에 쓰였습니다(계 4:4). 특히 망토인 ‘himation(히마티온)’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벗은 몸을 짐슴의(아마도 양) 가죽으로 덮여주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가 덮여진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4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풀 수 있습니다. “또 보좌(왕좌)를 원으로 둘러 24 보좌(왕좌)들이 있고 그 보좌(왕좌)들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대표하는 24 장로들이 머리에 금관을 쓰고 예수 그리스도로의 의로 옷 입고 앉았더라“
5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번개’로 번역한 헬라어 ‘astrapé(에스트라페이)’는 ‘astraptó(에스트라포)’라는 어원에서 파생한 단어로 두 단어 모두 ‘번개 혹은 번개의 번쩍거림’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는 신약에 총 11번 나오는데 영적인 존재, 즉 천사들과 연관 있는 단어란 걸 알 수 있습니다(11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 점이 제겐 흥미로웠는데 그 이유는 천사들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란 복수를 성경 전체에서 찾게 되면 역시 11번 나오기 때문입니다(창 6:2, 4; 욥 1:6, 2:1, 38:7; 요 1:12; 롬 8:14, 19; 빌 2:15; 요일 3:1, 2).
‘번개’가 등장한 11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이는 번개에 비유됐습니다(마 24:27; 눅 17:24(2)).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주의 천사는 번개처럼 나타났으며(마 28:3) 사단도 하늘로부터 번개처럼 떨어집니다(눅 10:18). 개역개정은 주의 천사가 나타났던 것에 대한 부분을 ‘그 형상’이 번개와 같았다고 해놓았기 때문에 마치 주의 천사의 생김새가 번개 같은 것처럼 읽힙니다. 그렇지만 앞선 계시록 4장 3절처럼 마태복음 28장 3절도 형상이 아니라 그 나타남 즉 ‘출현(appearance)’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등불의 비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의인화된 등불에 비유하신 것인데 여기서도 등불이 ‘비출 때’로 번역된 원어는 ‘번개의 번쩍임(astrapē)’입니다(눅 11:36). 안식일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보는데, 이때 ‘찬란한’으로 번역된 단어도 ‘번개의 번쩍임(astraptó) 입니다(눅 24:4).
또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번개들이(복수) 나오고(본절)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일 때도 번개가 있습니다(계 11:19). 그리고 제단 곁에 섰던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을 때와(계 8:5)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라고 할 때도 번개들이 발생합니다(계 16:18). 따라서 ‘번개’ 관련 11구절을 모두 살펴본 결과 ‘번개의 번쩍임’은 천사들의 나타남과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절에 ‘음성’으로 번역한 ‘phóné(포네이)’는 신약에 총 139번 나오며 ‘음성 및 소리’를 뜻하는 총괄적인 단어입니다. 그에 비해 신약에 12번 등장하는 ‘우렛소리(bronté:브론테이)’는 ‘번개’처럼 영적 존재들의 ‘음성’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렛소리’는 주님이 요한과 야고보에게 지어준 별명(우레의 아들)이기도 했고(막 3:17) 하늘에서부터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했으며(요 12:29), 하나님의 보좌와(본절) 하늘의 성전 안에 있는 언약궤가 보일 때 나는 소리이며(계 11:19), 네 생물의 음성이기도 합니다(6:1). 또한, 제단 곁에 섰던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을 때(계 8:5)와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로 현현했을 때 같이 말하던 7 우레이며(10:3, 4(2)), 어린 양과 시온산에 서 있는 144,000명이 하프(거문고)를 타며 부르는 새 노래의 소리이기도 합니다(계 14:2). 또한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보좌로부터 나서 ‘되었다’라고 할 때도 우렛소리가 있고(계 16:18), 천상의 무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며 경배할 때 내는 소리이기도 합니다(계 19:6).
본절에 나오는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아마도 성령이지 않을까 유추할 수 있지만, 이번엔 성경이 정의하는 ‘일곱 영’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일단 “일곱 영”이란 표현은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에서만 본절을 포함해 4번 나옵니다(4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관련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첫째, “일곱 영”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계1:4). 둘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3:1). 셋째,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일곱 등불”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일곱 눈”입니다(계5:6). 특히 이 일곱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일곱 영’이란 표현이 왜 세상 및 창조물을 뜻하는 4번 성경에 등장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예전에도 적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떠한 정교한 프로그램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숫자나 단어나 그 뜻에서 정확하게 떨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와 번역의 오류에서 오는 것일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얻은 정보를 갖고 한 단계 더 들어가게 되면, 요한계시록 4장 5절에서 ‘일곱 영’을 뜻하는 ‘일곱 등불’은 또 무엇인가입니다. 성경에서 ‘등불’을 찾게 되면 정확하게 50번 나오는데 50은 은혜와 온전한 속량 및 자유의 완전 수이며 성령의 법을 뜻합니다(숫자 50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에 ‘등불’의 바른 의미를 알고자 성경에서 ‘lamp’가 들어간 구절을 모두 찾아 읽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린 결론은 ‘등불’은 하나님의 계명 및 언약 즉 성령의 법을 뜻한다는 거였습니다. 몇 구절을 예로 든다면 등불은 창 15:17에 처음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반으로 찢긴 헌물의 사체들 사이로 등불과 화로가 지나가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시 119:105절에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라는 다윗의 고백이 나오며 잠언 6:23절엔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명령으로 번역된 단어가 영어로는 ‘commandment’ 즉, 계명입니다(이 발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란 표현입니다. 즉, 켜진 등불이란 빛을 발하고 있는 등불이란 의미이기에 잠언 6장 23절에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와 함께 보아야 하며 50이란 수와 곁들여 구약의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약, 즉 ‘성령의 법’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계시록 5장 6절에서 나오는 “일곱 눈”은 무엇인가입니다. “일곱 눈”이란 표현은 신약에 한 번, 구약에 한 번, 딱 두 번 등장합니다(증언, 증인 및 나눔을 의미하는 2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관련구절들을 읽어보면 이 “일곱 눈”은 어린 양에게 있으며(계 5:6)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에 있는 것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할 것입니다(슥 3:9). 구약의 “여호수아”란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로 신약의 헬라어로 표기된 “예수”와 같습니다.
그리고 숫자 7은 성령의 수이면서 안식과 영적 완전함 및 완성을 의미합니다(숫자 7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관련 구절들이 갖는 2와 7과 50의 특성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의 의미를 풀어 적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은 성령으로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완전한 속량의 보증이십니다.”
따라서 5절의 의미를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좌로부터 천사들의 나타남과 음성과 천상의 무리의 찬양과 경배의 소리가 있고 보좌 앞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땅에 증인으로 보내심 받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완전한 속량의 보증이신 성령의 법이 있으니“
6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본절에 나오는 수정은 ‘krustallos(크루스탈로스)’이며 영어로는 crystal인데 신약에 딱 두 번 나옵니다. 본절과 계시록 22장 1절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수정과 같은 생명수의 강입니다.
‘유리 바다’에서 ‘유리’로 번역한 ‘hualinos(후알리노스)’는 ‘hualos(후알로스)’에서 파생한 단어로 두 단어 다 ‘투명한 돌이나 유리’를 뜻하며 신약에 총 5번 나옵니다. 관련 구절들을 모두 읽어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바다는 유리처럼 투명하며 수정(크리스탈)과 같은데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144,000명이 서서 하프를 뜯으며 찬양하기도 한 곳입니다(계 15:2(2)). 또한 예루살렘 도시와 길은 유리처럼 투명한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계 21:18, 21). 예전에 discovery 채널을 우연히 보다가 한 과학자가 순도 100퍼센트인 금은 투명하며 우주비행사들이 쓰는 헬멧의 유리가 이런 순도 100퍼센트의 금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듣고 요한계시록이 떠올라 감탄했던 적이 있습니다. 2000년 전에 그런 과학적 기술도, 지식도 없었던 때에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도시는 100퍼센트 순도의 금으로 되어 있기에 투명하다는 걸 적었다는 것 자체가 성경은 성령의 감동과(딤후 3:16) 조명으로 된 책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본절에 ‘생물’로 번역한 ‘zóon(준)’은 신약에 23번 나오는데 계시록에서만 20번 나오며 ‘생명이 있는 존재’ 즉, ‘생물’로 번역하는 게 맞습니다. 이 ‘네 생물은 앞뒤로 눈들이 가득했다’라고 나오는 부분은 이들이 온몸에 눈들로 다닥다닥 가득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의미는 요한계시록 5장 6절과 누가복음 11장 36절에 비추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눅 3:34-36)“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따르면 어린 양에게 있는 일곱 눈은 하나님의 일곱 영, 즉 성령입니다. 또한 ‘등불’도 누가복음의 등불의 예에 비추면 자유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의미하며 완전한 속량의 복음(성령의 법)을 의미합니다(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1장에 적었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3장 34-36절에서 눈과 등불의 관계를 연결하시면서 네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비출 때’는 5절에 설명했듯이 ‘번개의 번쩍임’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온몸이 눈으로 가득했었다는 것은 성령으로 가득한, 즉 성령 충만한 존재로 성령과 하나되었음을 의미하며(겔 1:12, 20) 우리처럼 눈으로만 한정되어 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온몸이 밝아 온몸으로 다 볼 수 있는 존재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회전하지 않고 동서남북으로 움직일 때 각 방향으로 직행하며 나아갑니다(겔 1:9).
따라서 본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그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로 네 생물이 있는데 성령으로 가득하여(충만하여) 온몸이 밝아 온전히 밝더라“
7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본절에 나오는 네 생물은 에스겔에게도 나타났던 생물들로 그룹(cherub, cherubim)입니다.
“그룹들에게는 각기 네 면이 있는데 첫째 면은 그룹의 얼굴이요 둘째 면은 사람의 얼굴이요 셋째는 사자의 얼굴이요 넷째는 독수리의 얼굴이더라…그것은 내가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래에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겔 10:14, 2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겔 1:10-14)”
에스겔이 본 그룹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얼굴을 가진 4 생물이었으며 이들도 번개처럼 오고 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룹(cherub)을 찾으면 총 95번 나오는데, 이들에 대한 주요 구절들을 살펴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3:24).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들 때 순금으로 속죄소(긍휼의 자리)를 만들되 그룹 둘을 양 끝에 하나씩 서로 마주 보게 만들고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하게 하셨으며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게 하셨습니다(출 25:17-20).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긍휼의 자리)의 두 그룹들 사이에서 모세와 말씀하셨습니다(민 7:89). 솔로몬의 성전에는 금칠한 올리브 나무로 만든 두 그룹이 서로 날개를 맞대고 내소에 서 있었고(왕상 6:23-28) 성전 벽과 문들에도 그룹들을 조각해 넣었습니다(왕상 6:29, 32). 또한 성전 뜰에는 놋으로 받침 수레 10개를 만들었는데 거기에도 사자와 소와 그룹들의 모양을 새겨 넣었습니다(왕상 7:29, 36).
성경을 읽다 보면 궁금해지는 내용이 참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룹들은 4 생물로 되어 있는데 언약궤와 솔로몬의 내소에는 ‘그룹들’로 불리는 두 생물만 있었으니 과연 4 생물 중 어느 생물일까였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왕상 7장 29절을 읽으면서 풀렸었습니다. 성전 뜰에 있는 받침 수레 10개에 사자와 소와 ‘그룹들’의 모양을 새겨 넣었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언약궤 위와 솔로몬 성전의 내소에 있던 ‘그룹들’은 특별히 사람과 독수리였겠구나 싶어졌던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서 거하시는 분임을 여러 번 얘기하는데 총 6번 나옵니다( 삼상 4:4; 삼하 6:2; 왕하 19:15; 대상 13:6; 시 80:1; 사 37:16). 하나님은 그룹을 타고 나시며 바람(영)의 날개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삼하 22:11; 시 18:10).
이 그룹들은 세상의 창조물을 대표하기도 하는데, 사자가 맹수라면(길들여지지 않은 동물들) 소는 가축(사람에게 길들여진 동물들), 사람, 그리고 독수리는 공중에 나는 새들을 대표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이 이 4개의 영적 생물로 압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는 70퍼센트가 물, 즉 바다입니다. 세상을 대표하는 그룹 중에 바다를 대표하는 생물이 빠져있습니다. 원래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겔 28:14)이었던 용 또는 옛 뱀으로 불리는 사단(계20:2)이 바다의 생물과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파충류를 대표했었습니다. ‘사단 장’으로 불리는 에스겔 28장에 보면 9개의 보석으로 치장하고 불탄 돌들 사이를 오가며 하나님의 성산과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 나옵니다. 이 그룹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많은 무역(물품)으로 마음이 교만해져서 불법과 횡포를 행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나 땅으로 내침받았다고 나옵니다. 이 그룹은 ‘덮는(סָכַךְ:소콱) 그룹’이었기에 4개의 그룹들 위를 덮고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룹들 중에서도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였기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세상 창조물을 대표하는 그룹은 4가 아닌 5가 됩니다. 가만히 있었으면 5란 숫자로 하나님의 법과 은혜를 잘 드러내는 영광의 자리였겠지만(5에 대한 의미는 여길 누르시길 바랍니다) 사단은 자리를 이탈하며 하늘의 질서를 깼고, 아담을 타락하게 만들며 땅의 질서마저 깨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그 질서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우릴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회복시키시고 화평케 하셨으며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의 우편에 영원한 제사장으로 앉아계십니다(히 10:12). 이런 사단과 예수님의 차이에 대한 조명을 쓴 글은 여길 누르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네가지 생물은 4복음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나타내며 사자의 왕권을 담고 있습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계 10:3)” “사자는 짐승 가운데 가장 강하니(잠30:30).”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암 3:8)”
마가복음은 여호와의 종되신 예수님을 나타내며 소와 같은 힘과 인내의 섬김을 담고 있습니다.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잠 14:4)“. 소는 사람을 위한 섬김으로 힘을 쓰는데 이것은 고전 9장 10절에 나오는 일꾼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소는 또한 율법의 가장 으뜸가는 희생 재물입니다. 누가복음은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인성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그들 앞에 먹을 것을 두었노라(호 11:4)“.
요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독수리와 같은 높은 영광과 권세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보살핌은 독수리에 비유됩니다.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출 19:4)”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 17:8)”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7)”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1-12)”
8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본절에서는 네 생물이 각각 6 날개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에스겔이 봤을 때는 4개의 날개만을 갖고 있었습니다(겔 1:11, 23, 10:21). 이 차이에 대해 뚜렷한 답을 제시하는 내용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나름 이 부분에 대해 묵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요한계시록을 쓰게 되면서 문득 창조물을 향한 구약과 신약의 구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4 생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창조물들을 대표합니다. 즉 에스겔이 4그룹을 봤을 때는 구약의 때이기에 구약 4000년을 상징하는 4개의 날개가 있었고 요한이 봤을 때는 모든 예언의 성취와 신약 시대의 완성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2000년을 상징하는 2개의 날개가 더해져서 비로소 6개가 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구속사는 단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창조물(생물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엔 ‘모든 창조물에게(creature) 복음을 전파하라’고 되어 있으며 로마서 8장 21-22절엔 ‘창조물들도 그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길 바라고 있으며 지금까지 모든 창조물이 함께 신음하며 산고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땅이 회복되고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던 생태계도 회복되어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해도 해를 입지 않는 걸 볼 수 있습니다(사 11:6-8, 65:25).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3번 나오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나오는데, 본절과 이사야서 6장 3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1-3)” 천상의 생물들 중에는 그룹들과 스랍들이 있는데 에스겔과 요한이 그룹들에 대해 적었다면 이사야는 스랍들에 대해 적었습니다.
9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세세토록’은 주로 ‘영원(ever, forever)’, ‘때, 세대들(ages)’로 번역됐습니다. 한국어로는 어떤 단어가 가장 이 단어에 적합한 단어일까 고민하다가 어떤 시간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안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마디가 있는 시간의 순환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세세대대(世世代代)’가 가장 적합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어 한문/영어사전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세대대’를 ‘age after age’로 정의해 놓았기에 이 의미가 ‘aiōnas(아히오나스)’와 제일 근접하다고 판단이 됩니다.
따라서 9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생물들이 보좌(왕좌)에 앉으신 분 곧 세세대대로 살아 계시는 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때에“
10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경배’로 번역한 헬라어 ‘proskuneó(프로스큐네오)’는 ‘경외심을 나타내다, 무릎 꿇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다, 경배하다’란 의미입니다.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에서 ‘드리며’로 번역한 헬라어 ‘balló(발로)’는 ‘던지다, 내려놓다, 떨어트리다’란 뜻입니다. 늘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24 장로들이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 혹은 던진(cast)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드렸다고 하면 내 공이 아닌 하나님의 공이기에 다시 공손히 하나님의 보좌 앞에 돌려드렸다는 것 같았고, 던졌다고 하면 왠지 불경스럽게 느껴지지만 역시 내 것이 아니란 의미로 던진 건가? 싶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원어로 읽어보니 의문이 풀렸습니다. 본절에 ‘엎드려’로 번역한 헬라어 ‘piptó(핍토)’는 ‘넘어지다, 떨어지다, 쓰러지다’란 뜻으로 ‘엎드려’ 보다는 좀 더 과격한 표현입니다. 즉, 본절은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으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쓰러져(넘어져)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머리에 썼던 관을 보좌 앞으로 떨어트리게 된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만큼 감격스럽고, 따라서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경배하는 걸 묘사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10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24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분 앞에 쓰러져 엎드려 세세대대로 살아 계시는 분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관을 보좌 앞에 떨어트리며 이르되“
11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영광과 존귀와 권능”이란 표현은 요한계시록에서만 5번 나옵니다(본절, 계 5:12, 13, 7:12, 19:1).
‘주의 뜻대로’에서 ‘뜻’으로 번역한 헬라어 ‘theléma(뗄레마)’는 ‘뜻, 소원’이란 의미로 신약에 총 63번 나오며 거의 모든 구절에서 ‘뜻(will)’으로 번역했습니다(글자를 누르면 단어가 쓰인 모든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창조되었고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며 근본임을 증거합니다(골 1:16-19).
따라서 본절을 직역해서 풀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오니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 주의 뜻대로 그것들이 존재하고 창조되었나이다,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