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번에 쓴 “루아크(ruach): 영, 숨, 바람에 대한 상고”에 대해 들어온 반론을 소개하려 합니다. 예전에 저는 성막뜰에 기구들이 두 개밖에 없다는 것에서 조명을 얻게 됐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을 뜻하는 성막뜰에 기구가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영과 혼과 육’ 삼분설이 아닌 ‘영혼과 육’ 이분설로 나눠진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영혼과 육’이란 의미는 ‘영, 숨, 바람’으로 번역되는 ‘ruach(루아크)’의 기능이 그냥 ‘숨’의 기능에서 멈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ruach(루아크)’의 3단계 기능에 대해 얻었던 조명도 지난번 글에 함께 적었습니다.
코멘트를 보내주신 분은 성막뜰에 있는 기구가 두 개인 것은 ‘영혼육’ 이분설이라는 조명에는 동의하면서도 ‘영혼과 육’이 아닌 ‘영과 혼육’이라고 하는 게 맞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니지 못한 사람의 상태와 관련하여 이분설을 쓸 때 ‘영혼과 육’으로 쓰는 것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영과 혼육’으로 써야 맞습니다. 성경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영/혼/몸)을 만드셨지요(창2:7). 이브(이브의 혼)가 자신의 마음(영)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에 굴복하였습니다(창3:6).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제 아담과 아담의 자손들의 혼은 진토(몸)에 붙어버렸습니다(시119:25; 44:25). 구약 율법 하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혼이 육과 붙어 있었기에 부정한 것을 만지면 그들의 혼도 부정해졌으며, 부정한 것을 먹으면 그들의 혼도 부정해졌으며, 몸이 죄를 지으면 그들의 혼도 죄를 짓는 것이 되었습니다. 혼이 진토에 붙은 자들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중일지라도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는 죽은 자들입니다. 지나간 때에 우리는 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엡2:1). 그러나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의 할례로 말미암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 버림으로 손으로 하지 않은 할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골2:11).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을 벗어버렸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은 그들의 혼이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에서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의 믿음의 결말, 곧 혼의 구원입니다(벧전1:9 히10:39). 육신에 속한 죄들의 몸에서 벗어난 혼이 구원받은 우리는 겉사람(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죄의 몸/사망의 몸)은 썩어 없어져도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고후4:16). 진토에 붙어 있던 혼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살리는 것은 주의 말씀(시119:25 약1:21),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엡2:1), 영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들(요6:63), 살려주는 영이 되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고전15:45)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요3:5-8)이고 우리의 혼은 죄로부터 구원받았다는 것(마1:21)이고 우리의 몸은 부활의 영광스런 소망으로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는 것(롬8:23-24)/ 땅에 속한 아담의 형상을 벗고 하늘에 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는 것(고전15:49)/ 우리의 천한 몸이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된다는 것(빌3:21)입니다”
첫째 반론에 대한 저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론하신 분이 “영혼과 육’으로 쓰는 것이 성경적으로 맞지 않고 ‘영과 혼육“이어야 맞다고 생각한다며 제시한 반론도 타당성 있는 부분도 있기에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분설이라는 제 생각과 같다면 다행이고 ‘영과 혼육’이어야만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까지 변론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 제가 ‘영혼과 육’으로 썼던 이유는 우리가 죽게 되면 육은 없어져 흙으로 돌아가고(창 3:19; 전 3:19-20; 시 146:4) 사람에게 생명을 줬던 영은(숨) 하나님께로 돌아가지만(전 12:7; 시 103:29, 146:4), 혼은 심판의 때를 위해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시 119:175; 겔 18:4; 마 25:46; 눅 16:19-31; 계20:4, 13). 여기서 심판의 때라는 것은 상과 벌로 나뉘는 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부연설명하는 이유는 대부분 사람이 ‘심판’하면 무조건 영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멘트를 쓰신 분이 그런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혼육’이 붙어있고 하나라고 한다면 육신의 죽음과 함께 혼도 죽는다는 영혼소멸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시편 119편 25절과 44편 25절에 쓰인 ‘진토’는 말 그대로 ‘흙(aphar)’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을 ‘흙(aphar)’으로 빚으셨기에 우리는 죽으면 ‘흙(aphar)’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이 의미를 혼이 육신과 붙어있다는 의미로 풀었는데, 시편 44편과 119편의 모든 구절을 문맥과 함께 살펴보십시오. 이 의미는 지금 내가 죽게 생겼으니(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제발 구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이지 우리 혼이 육신과 붙은 상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구약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혼도 땅 밑으로 갔기 때문에 더욱 흙에 달라붙게 되었다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인용한 44편 25절을 앞뒤 구절과 함께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없게 흠정역으로 가져오겠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종일토록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겨졌나이다.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어찌하여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고 우리의 고난과 학대받는 것을 잊으시나이까?우리의 혼이 진토에 꿇어 엎드리고 우리의 배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긍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시 45:22-26)“
“우리의 혼이 진토에 꿇어 엎드리고 우리의 배가 땅에 붙었나이다”란 표현이 지금 우리가 땅에 엎드려 쓰러져 죽게 되었다는 절규인지 인간의 혼과 육이 달라붙어 버렸다는 의미인지 각자 판단할 일입니다. 25절의 뒷부분에 나오는 대로 정말 우리의 배가 땅에 실제적으로 붙어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면 25절의 앞부분에 나오는 우리의 혼도 진토에 꿇어 엎드려져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죽게 생겼으니 우리를 구속(구원)해달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인용한 시편 119편 25절의 앞뒤 구절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주의 증언들을 지켰사오니 모욕과 멸시를 내게서 제거하소서.통치자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였나이다.주의 증언들은 또한 나의 기쁨이요, 나의 조언자이니이다.(딸레트) 내 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나를 살리소서. 내가 내 길들을 밝히 보이매 주께서 내 말을 들으셨사오니 내게 주의 법규들을 가르치소서.나로 하여금 주의 훈계들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놀라운 일들을 이야기하리이다.내 혼이 근심으로 인하여 녹사오니 주께서 주의 말씀에 따라 나를 강하게 하소서(시 119:22-28).”
이 구절이 과연 인간의 혼과 육이 달라붙어 버렸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내가 지금 나를 비방하고 모욕하는 자들에 의해 죽게 생겼으니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나를 살려달라(구원해달라)는 의미인지 아닌지 역시도 각자 판단할 일입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 28절을 보십시오. “내 혼이 근심으로 인하여 녹사오니 주께서 주의 말씀에 따라 나를 강하게 하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혼이 근심으로 정말 실제로 녹아내렸다는 의미인가요? 만일 혼이 근심으로 실제적으로 녹아버린 것으로 이 구절을 이해한다면 “내 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나를 살리소서”란 의미도 혼이 정말 흙에 붙어버렸다고 이해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반론하신 분은 “진토에 붙어 있던 혼을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에서 벗어나게 함으로 살리는 것은 주의 말씀(시119:25; 약1:21)”이라고 쓰셨는데, 주님의 말씀이 가르는 것은 영과 혼이라는 구절은 있어도 혼과 육이라는 구절은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는 그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이 쪼개어 나누는 것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히 4:12)“이기에 저는 ‘영혼과 육’, 즉 영이 ‘숨’의 기능에 멈춰 있어 죽을 수밖에 없는 혼을 살리는 영이 되어주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혼과 영을 나누어’ 성령을 주사 거듭나게 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에서 ‘및’이란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혼과 영) 한 세트 (관절과 골수) 한 세트를 구분짓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원어로는 ‘te(테) kai(카이)’란 단어가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란 단어들 사이에 들어가 있습니다. 테 카이는 ‘더 나아가 그리고’란 의미이며 영어로는 ‘moreover and’입니다. 영어 킹제임스로도 가져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of soul and spirit, and of the joints and marrow”. 헬라어 원어에서 주는 차이점을 잘 나타내기 위해 ‘혼과 영’ 그리고 ‘관절과 골수’ 사이에 쉼표를 넣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세트 앞에 ‘of’를 넣어 나눠주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혼과 영’을 나누고 ‘육과 육(육신을 쪼개는)’을 나누는 말씀이란 의미입니다. 또한 ‘혼과 영’이라고 하면서 ‘혼’이 먼저 나왔다는 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주와 함께 살면 “영과 혼과 육(살전 5:23)”으로 영이 앞서지만 그렇지 않으면 혼이 먼저고 영은 전에도 말했듯이 숨의 기능으로 혼을 보조하는 역할밖에 못하기에 그렇게 나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 두 번째 반론을 소개합니다.
“지난 번 글에서 지성소/성소/성막뜰을 구원받은 자의 영/혼/몸으로 매칭하며 구원받은 자가 지성소로 올라가기 위한 첫번째 단계가 땅에 속해 있는 내 육신의 지체들을 성막뜰에 있는 번제단에서 태워없애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육을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쓰며 번제단을 십자가와 같은 의미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번제단과 십자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서로 대체가능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날마다 죽어야 할 곳은 번제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번제단은 거듭나지 않아 혼이 구원받지 못한 자가 받는 지옥불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혼이 구원받은 자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때문에 성막뜰/성소/지성소를 구원받은 자의 몸/혼/영으로 매칭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저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코멘트를 주신 분은 제 글에 대해 “번제단을 ‘육을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쓰며 번제단을 십자가와 같은 의미로 쓰셨습니다. 그러나 번제단과 십자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서로 대체가능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질문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통한 죽음으로 이루신 것은 무엇이며 가셨던 곳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우리 주님은 우릴 위해 죄가 되셔서(고후 5:21)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우릴 위해 죽으심으로 우린 그의 피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롬 5:8-9). 그리고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롬 3:25)”이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반론하신 분의 생각처럼 번제단과 십자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이 번제단의 희생제물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은 성경 곳곳에서 증언되는 진리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라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히 5:8-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제물이 직접 되어 주신 사건입니다. 이 5대 헌물을 올려드리는 장소는 다름아닌 번제단입니다. 예수님은 양과 염소와 같은 짐승의 피가 아닌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히 9:23-28).
영혼육 삼분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렸던 그림에도 제가 적었고 또 반론하신 분도 동의하듯이 번제단은 지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희생제물이 되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까지 우릴 대신해 내려가셨으며(벧전 3:19-20, 4:6) 포로로 잡혀있던 혼들을 이끌어 함께 부활하셨고(마 27:52-53) 하늘로 옮기셨습니다(엡 4:7-9).
그랬던 주님은 우리에게도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고 말씀하시며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를 속 썩이는 사람, 특히 식구를 ‘내 십자가’라고 표현하지만, ‘자기 십자가’란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나 자신이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갈 5:24)”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갈 2:20)’ 사람들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흠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요 1:29) 우릴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번제단의 희생 제물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제사)를 드릴 수 있는(롬 12:1) 왕 같은 제사장들이(벧전 2:9) 되었습니다.
따라서 번제단은 단 지옥불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헌신으로 나아가는 예배의 첫 걸음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곳이기도 합니다(창 12:8, 13:4, 26:25). 성경에서 ‘예배’란 단어가 가장 처음 쓰인 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갔을 때였습니다. 이 조명은 “헌물(offering), 제물(oblation), 희생 제물(sacrifice)의 차이“란 글에 적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기에(롬 8:13; 골 3:5)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번제단에서 나의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약 4:1).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이미 피 흘려주셨기 때문에 언약의 소금과 함께 피 흘림 없이 올렸던 소제(곡식헌물)처럼(레 2:13) 우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막 9:50).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한 번제단의 지옥불 심판을 받으신 것으로(지옥과 땅) 성소와(둘째하늘) 지성소를(셋째하늘)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찢으셨으며(눅 23:45) 바로 그 하늘로 들어가사(히 9:24) 야곱의 꿈에 나왔던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창 28:12-15; 요 1:51). 때문에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이제 세 번째 반론을 소개합니다.
“성막뜰/성소/지성소를 첫째 하늘과 땅과 지옥(육)/둘째 하늘(혼)/셋째 하늘(영)로 매칭했는데 여기서의 육/혼/영 역시 구원받은 사람의 육/혼/영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적 사악함이 거하는 둘째 하늘(엡6:12)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께끗하지 않습니다(욥15:15). 때문에 둘째 하늘은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혼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여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5:18-20). 성막뜰/성소/지성소를 구원받은 사람의 육/혼/영과 첫째 하늘/둘째 하늘/셋째 하늘과 매칭하셨지만 저는 성막뜰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성소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지성소는 영광스러운 하늘에 속한 몸을 입는 사람(의로운 자들의 부활-행24:15/생명의 부활-요5:29)으로 이해합니다. 성소와 지성소와 달리 성막뜰에 두 개의 기구들이 있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혼이 구원받지 못한 자의 ‘영/혼육’의 상태(이분설)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세 개의 기구들이 있는 성소는 진토에 붙었던 혼이 그리스도의 할례로 육신의 죄들에 속한 몸에서 벗어남으로 영/혼/육(이때 ‘육’은 아직 죄의 몸, 사망의 몸임)으로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증거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 세 개가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는 거듭나서 혼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다리던 몸의 구속(롬8:23)이 이루어진, 부활의 몸을 입은 자들의 영/혼/육(이때 ‘육’은 죄가 없는 몸)을 보여줍니다.”
이 반론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반론은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 저는 “성막뜰/성소/지성소를 첫째 하늘과 땅과 지옥(육)/둘째 하늘(혼)/셋째 하늘(영)로 매칭”했을 때 “구원받은 사람의 육/혼/영”을 염두에 두고 한 게 아니었습니다. 제 글에도 이미 썼었고 반론하신 분도 제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성막뜰에만 머무는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으로 영혼육 2분설에 속한 사람이며 지옥 및 땅과 첫째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번제단에서 땅의 지체를 죽이고 자기 부인하며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소로 들어가는 사람은 비로소 영과 혼과 육으로 나뉠 수 있게 된 사람으로 성령의 조명으로(금등잔대) 말씀을(진설병) 취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상달되는 기도(분향단)를 올릴 수 있습니다.
반론하신 분은 이런 성소가 둘째 하늘에 비유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영적 사악함이 거하는 둘째 하늘(엡6:12)은 하나님의 눈 앞에서 깨끗하지 않고(욥15:15) 때문에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혼과 같으며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여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15:18-20).”라고 쓰셨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성소는 둘째 하늘이며 마음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 불의와 의가 공존하는 곳이며 영적 광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곳에서 늘 말씀을 취해 마음에 두고(시 119:11) 성결케 해야 하는 장소인 것입니다(약 4:7-8).
저는 지성소를 영에, 성소를 혼에, 성막뜰을 육에, 비유하면서 이미 ‘혼’에 속하는 성소는 ‘마음’에 해당하기도 한다는 점을 적으며 “성소에 거하십시오:지성소로 올라가는 5단계”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었습니다. “또한 성소는 우리 혼, 즉 마음의 영역이기에 성령께서(등잔대) 내재하시는 곳이며, 우릴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중보하시는 곳이며(분향단),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진설병)을 기억나게 하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할 것이니 거기서 생명의 근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잠4:23).” 반론하신 분이 제기한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며(렘 17:9),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릴 더럽게(마 15:18-20)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 나오는 곳이기에 성령을 의지해 우리가 말씀으로 지켜보호해야 할 영역이기도 한 것입니다(잠 4:23).
둘째하늘에 대한 부분도 이미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을 했지만 다시 하겠습니다. 둘째하늘은 마귀들이 거하는 곳이요(엡6:12; 욥15:15) 하나님께서 둘째 하늘을 만드신 둘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지만(창1:8), 그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을 두시고 낮과 밤을 나누신 후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들어 땅을 비추게 하신 넷째 날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창 1:14-18). 성소는 바로 이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둘째하늘이며 성소에 있는 3가지의 기구도 해와 달과 별들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반론하신 분이 생각하는 둘째하늘이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공간을 말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우주 공간엔 악한 영들과 어둠만이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직접 지으셨고 또 보시기에 좋다고 말씀하셨던 해와 달과 별들이 주는 빛도 있습니다.
둘째하늘을 장악하게 된 악한 세력은 당연히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고 깨끗하지 않아 보이시겠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둘째 하늘에 담겨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은 선하며 보시기에 좋다 하셨습니다(창 1:14-18).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4-5)”는 말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엔 ‘세상을 벗하는 자는 간음하는 자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니라(약 4:4),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고 나옵니다. 그 ‘세상’이 바로 악한 영들이 공중 권세 잡은 세상을 말한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에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 그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혼들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문에 저는 성소를 둘째하늘에 비유하는 것이며 또한 광야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생명과 사망이 공존하며 나뉘는 곳이기에 내가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함을 받고 나날이 공급해주시는 만나를 취하며 믿음으로 지켜 행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 반론하신 분이 “성막뜰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혼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성소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혼이 구원받은 사람)으로, 지성소는 영광스러운 하늘에 속한 몸을 입는 사람(의로운 자들의 부활-행24:15/생명의 부활-요5:29)으로 이해”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적용해도 저는 아무 이의가 없고 그 이해한 부분을 더 풀어서 쓴 뒷부분의 내용도 본인의 믿는 바와 깨달음을 적은 부분이기에 굳이 ‘틀렸다 맞았다’란 표현으로 판단할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인 네 번째 반론을 다루겠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혼육 삼분설에 대하여]란 글에서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에 대해 증거판을 성부로, 만나 항아리를 성자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성령으로 보셨습니다. 만나 항아리를 성자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성령으로 보신 것은 성경적으로 이해가 됩니다만 증거판을 성부로 보신 것은 잘 이해가 안되네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증거판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만나 항아리는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싹난 아론의 지팡이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반론에 대한 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반론하신 분께서 증거판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만나 항아리는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싹난 아론의 지팡이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 모두 예수님께 적용한 부분은 아주 좋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성막뜰을 구원을 얻은 사람의 영과 혼과 육으로 본다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머리에 해당하는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의 3가지 성물을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하는 것이 맞습니다.
단, 저는 지성소를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3천층으로 성소를 2천층으로 성막뜰을 1천층으로 본 관점에서 3가지 성물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증거판은 성부 하나님, 만나 항아리는 예수님,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성령님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글에서도 저는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분들은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란 점을 분명히 적었었습니다.
제가 증거판을 성부 하나님으로 생각한 이유는 언약궤 안에 있는 3가지 성물을 역시 영혼육에 비유하게 되면, 영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육은 만나 항아리일 것이기에 혼이 증거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증거판은 ‘하나님이 직접 쓰신 말씀’을 담고 있는 돌판으로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과 연결이 된다고 생각됐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개역개정이 ‘마음’으로 번역한 헬라어는 ‘혼’을 뜻하는 ’psuché(프수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보라 내가 택한 종(성자) 곧 내 혼이(성부)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성자) 내가 내 영을(성령) 그에게 줄터이니 그가(성자)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기에 ‘혼’에 해당하는 증거판을 성부 하나님께 적용하게 됐습니다.
성경 말씀을 함께 공부하고 생각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킹 제임스 영어 성경을 구체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는 영 혼 육 삼분설은 모르고 영혼과 몸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 영혼이란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 할 한 단어는 없고 영어 성경에서 영과 혼을 구별해서 쓰고 있더군요. 성소와 지성소도 엄연히 휘장으로 구분되었는데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사역과 우리 영의 거듭남과 연관해서 비유해 볼 수가 있습니다.
또 마음이란 단어도 heart, mind 를 둘다 마음으로 번역하기도하고 mind는 생각이라고도 하더군요. 지 정 의는 혼에 속해있고? 혼의 생각과 영에 속한 마음으로 구별하기도 어렵지요?
성경 말씀을 잘 알아듣고 이해한 말씀으로 거듭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계속 자라가기를 원합니다.
“[17]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19]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엡 3:17~19, 킹흠정역)
Ephesians 3:17-19 KJV
[17] that Christ may dwell in your hearts by faith; that ye, being rooted and grounded in love, [18] may be able to comprehend with all saints what is the breadth, and length, and depth, and height; [19] and to know the love of Christ, which passeth knowledge, that ye might be filled with all the fulness of God.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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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도 세상 곳곳에 흩어진 지체들과 커뮤티케이트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코멘트에 적으신 것처럼 “마음이란 단어도 heart, mind 를 둘다 마음으로 번역하기도하고 mind는 생각이라고도” 합니다. “지 정 의는 혼에 속해있고? 혼의 생각과 영에 속한 마음으로 구별하기도 어렵지요?”라고 하셨는데 그 부분도 맞구요.
그래서 원어를 찾아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시는 공부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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